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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79화 (79/384)

079화

다짐한 열망 (4)

양팔을 잃은 채 치사량의 피를 흘렸으나, 노도와 같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던 괴물.

그가 불현듯 발을 멈추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드디어 신앙심이 빛을 발하고 신께서 자비를 내려주신 걸까.

주교는 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께서… 들어주신 거야……! 신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신 거야!”

전투 한복판에서 주교는 석장을 높이 치켜들고 자비를 내려준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기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까아아아악!

괴조가 울부짖을수록 병사들의 머릿속에 죽음이 선명해졌다.

괴물은 움직임을 멈췄지만, 괴조는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도망쳐!”

“살려줘! 제발! 죽기 싫어!”

“후퇴하라! 후퇴!”

각국의 병사들이 미련 없이 주교를 지나쳐 도망친다.

“맞아! 도망쳐야 돼! 나는 살아야 돼!”

비루한 정신력을 증명하듯 법국의 지휘관은 군중심리에 빠져든다.

그러자 여신관이 그에게 청한다.

“주교님, 저분들은 어떡하죠?”

그녀가 가리킨 존재는 집사와 군관이었다.

잠깐이나마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 하지만 집사는 기절하고 군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냥 버리고 가!”

“어떻게 그래요?! 저분들을 저대로 뒀다가는 괴조한테 잡아먹힐 거라고요!”

“그저 외지인일 뿐이야! 게다가 저 꼴을 봐! 저들은 짐 덩어리밖에 안 돼!”

생존을 열망하는 그에게 동료 의식은 한 줌의 재조차 남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저들은 한낱 외지인에 불과했다.

국가의 정세가 혼란한 현재에 저들은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었다.

하나, 신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구해야 해요.”

두려움에 맞서 사람을 보살펴라.

고난이 있을지라도 사람을 우선시해라.

자고로 구원은 신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행하고 내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말씀이고 그녀의 믿음이었다.

“주교님은 먼저 가세요. 저는 저분들을 구할게요.”

공포에 잠식된 손은 크게 떨었으나, 그럴수록 그녀는 석장을 더욱 움켜쥐었다.

이를 본 주교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짧은 시간, 목숨과 전우애를 저울질하던 그는.

“…알겠습니다.”

그녀에게서 엿본 신의 말씀을 믿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꾸물거릴 시간 없다.

괴조는 발톱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은 황급히 발을 휘저으며 군관에게 다가간다.

“괜찮으십니까, 군관?”

“주교… 크으윽.”

“움직이시면 안 돼요. 상처가 벌어집니다. 저는 저분을 구할 테니, 신관은 그를 치료합시오.”

“네.”

군관의 어깨를 헤집어 놓은 상처에 여신관이 손을 올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주문을 몇 마디 외우자 손바닥에 희미한 빛이 발광한다.

그녀가 그를 치료하는 사이 주교는 집사에게로 향했다.

“젠장, 흉상이 너무 깊어…….”

치유 마법 힐은 상처의 정도에 비례해 시간과 마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집사에게, 하물며 주교에게 그런 여유로운 시간이 있기야 하겠나.

탈출을 꾀하는 병력을 막는 데 급급한 괴조.

그녀는 머지않아 그들을 정리하고 흉포한 발톱을 자신에게 들이밀 것이다.

우선 괴조에게 벗어나야 한다.

주교는 집사를 둘러메고 군관에게 돌아갔다.

“이제 됐어요. 하지만 그냥 힐이 아닌, 패스트 힐이라 출혈을 막은 정도밖에 안 돼요.”

“시답지 않은 진료 내용은 됐어!”

여신관의 손길을 제지하고 군관은 재빨리 일어선다.

그에게 주교가 묻는다.

“군관, 이제 저희는 어찌합니까?”

“어쩌긴 뭘 어째?! 도망쳐야지!”

“어디로요?”

군관은 괴조의 반대 방향, 동굴을 깊은 곳으로 향해 눈길을 돌렸다.

“…젠장!”

* * *

파훼된 중대를 동굴 깊숙한 곳으로 내쫓는 데 성공했다.

괴조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동굴 바닥과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밟으며 다급히 달렸다.

거대한 날개와 몸집이 축소되고, 발톱은 사람의 다리로, 새가슴은 빈약한 가슴으로, 붉은 눈동자가 점차 녹색으로 바뀐다.

이윽고 유익인으로 변화한 인안나가 쓰러져 있는 남타르를 들어올렸다.

“야! 야! 왜 그러는데 갑자기?!”

창백한 얼굴에 손을 짚어 체온을 확인하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심장의 고동도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리게 작동했다.

아무리 몸이 파손되더라도 항상 불사를 주장했던 남타르가 싸늘한 시체처럼 죽어가고 있다.

비단 남타르뿐만 아니었다.

훔바바 또한 휘두르던 촉수를 지면으로 떨어트리고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토록 미래로 밀어뒀던 죽음이 왜 이제 와서 그의 목숨을 거두려는 걸까.

인안나는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인안나.”

보라색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남타르는 뿌옇게 안개 낀 동공을 인안나에게 고정하고, 꺼져가는 불씨처럼 나약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가 살아 있음에 인안나는 안도하면서도, 죽어가는 목소리에 슬퍼하며 대답한다.

“그래, 나 여기 있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이냐고?!”

“주인……. 주인에게 가야 한다. 지금 주인이 위험하다.”

“언니? 내 언니가?! 그럴 리가!”

남타르의 주인, 이르칼라는 덩굴 깊은 곳에서 숨어 있다.

인안나는 다가오는 위협도 막아냈을 뿐더러, 만에 하나 생존자가 이르칼라에게 도달했더라도 그녀가 당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르칼라와 연결되어 있는 남타르가 그녀의 위험을 알리고 있다.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인에게 가라. 당장.”

“아, 알았어.”

조심히 남타르를 지면에 내려둔 인안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절대 뒤지지 마! 알겠지?!”

“…알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타르에게 생존을 부탁하고, 재빠르게 비행하여 동굴 깊숙한 곳으로 비행한다.

* * *

가녀린 손바닥의 굳은살 위로 라이트가 떠오른다.

드넓은 동굴에 비해 광원은 미약했으니 불과 발 앞까지만 비추는 데 그쳤다.

하지만 집사의 상처를 살피는 데 그 정도면 충분했다.

등 근육을 파헤쳐놓은 발톱 자국은 그 흉터만 남긴 채 전부 치료되어 있었다.

“곧 눈을 뜰 겁니다.”

주교의 확신은 실현되어 닫혀있던 집사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죽음과 연명을 오가던 그는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렸다.

“…저는 아직 죽지 않았군요.”

“살아나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아슬아슬했습니다. 조금만 지체됐어도 영영 눈을 뜨지 못했을 겁니다.”

흐릿한 눈동자로 군관을 쳐다본다.

“저를 왜……?”

“착각하지 마, 부하 관리도 못하는 장님을 뭐가 예쁘다고 구하겠어. 네놈은 이놈이 구한 거야.”

두껍고 짤막한 엄지손가락으로 주교를 가리킨다.

이에 주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또한 신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의 목숨은 그녀가 인도했습니다.”

노장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여신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여 예절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아니에요. 단지 저는 신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에요.”

감사 인사를 마치고 집사는 주위를 둘러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절망이 녹아든 시선만으로 그는 현재 상황을 쉽게 유추했다.

“한데, 탈출은 고사하고 벼랑 끝에 내몰린 듯하군요.”

그의 한마디는 긍정의 침묵을 불러일으켰다.

“정녕 방법이 없는 건가요?”

불온한 침묵을 없애고자 여신관이 용기 내어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희망이 깃들어 있다.

그 희망은 너무나 눈부시기에 지휘관들은 씁쓸하기만 했다.

누가 그녀에게 확정된 운명을 설명해줘야 하나, 각국의 지휘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전가하기 바빴다.

이내 집사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아까의 괴조. 그녀는 마왕군의 장군입니다.”

“아까 그 괴물새가 마왕군의 장군이라고요? 그보다 인안나는 누구죠?”

“모르시는군요.”

영웅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인안나.

마왕군을 상대하는 국가의 병사가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집사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주교에게 묻듯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재능은 출중하나,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신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있죠.”

법국의 성직자들은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병사, 혹은 의무병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신앙심은 전쟁 통에서 쉽사리 변질됐다.

신의 말씀은 그저 복무신조로, 신의 존재는 목숨을 구걸하는 데 쓰였다.

“갓 입대한 신참이라면 모를 만하지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간다.

“인안나의 존재는 동굴에 깊은 곳에 마왕군이, 아니면 그녀를 돕는 자가 있음을 뜻합니다. 혹은 그보다 더한 존재가 있을 수도 있지요.”

“높은 확률이라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군관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확실하다, 꼬마야. 아까 그 반쪽짜리 마족놈을 봤잖아. 게다가 촉수 괴물 있는 거로 보아하니, 이 자의 말대로 마왕군보다 더한 녀석들이 있을 거다.”

“인안나와 맞서 싸우는 건 어때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괴물들도 쓰러졌잖아요.”

주교가 쓰게 웃었다.

“아시다시피 저희의 병력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영웅과 필적하는 인안나와 싸워봤자 결과는 뻔하죠.”

“…그럼 저희는 어떡하죠?”

동굴 깊숙한 곳으로 도망칠수록 죽음으로 발걸음을 놀리는 것과 같다.

탈출구를 지키고 있는 괴조와 싸울 병력도, 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를 타개할 명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과의 정면 승부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순간에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할 수 있어요. 저희는 이 고난을 넘어설 수 있다고요!”

각국의 장수들이 예견한 죽음을 여신관이 부정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발버둥일 뿐이다.

“넘어서겠다고?”

그녀의 질문에 모든 이의 심장이 출렁였다.

탁.

드높은 어둠 속에서 인안나가 그들 앞으로 착륙했다.

그리고 불온한 주황빛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여신관을 노려본다.

“어디 다시 한번 지껄여봐. 감히 나를 넘어서겠다고?”

“이, 인안나…….”

“그런 건방진 희망은 내가 짓밟아 줄게.”

손을 괴조의 발톱으로 변형시키며 여신관에게 다가간다.

그때 각국의 지휘관들이 여신관을 보호하기 위해 길을 가로막는다.

“저희가 막아볼 테니 당신은 최대한 멀리 도망치십시오.”

집사가 누군가가 떨어트린 검을 주우며 말했다.

곁에서 그의 전의에 동조한 군관과 주교도 각자 무기를 주워들었다.

“다들 이견은 없지요?”

“그래. 어차피 죽을 거 싸우다 죽어야지.”

“젊은이 대신 저희 같은 노쇠한자가 죽어야 마땅하죠.”

이를 같잖은 반항으로 받아들인 인안나가 코웃음 친다.

“마음 같아선 네놈들을 그냥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 녀석이 신신당부한 것도 있으니 딱 반만 죽여줄게. 되도록 빨리.”

그녀의 육체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검은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괴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휘관들이 딱 잘라 말했듯 승산이 없는 전투였다.

그저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보잘것없는 희생이었다.

그렇기에 여신관은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저도 싸울게요.”

“아니요. 당신은 최대한 멀리 도망치십시오.”

여신관이 가세하려 하자 집사가 제지한다.

“동굴의 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분명 출구로 연결된 길 또한 존재할 터. 제가 입구 쪽에 횃불을 걸어 놓았으니, 운만 따라준다면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찮은 변명에 불과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에서 운만으로 동굴 입구를 찾는 건 극악의 확률이었다.

하지만 그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여신관이 도망칠 이유가 생긴다.

“…꼭 탈출해서 구원 병력을 이끌고 돌아올게요!”

“부탁드리지요.”

여신관은 눈을 질끈 감고 도망쳤다.

그들을 구조하겠다는, 불가능한 동기를 부여잡고 뛰어갔다.

더욱 깊은 어둠으로.

어둠조차 집어삼키는 심연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동굴 깊은 곳으로.

다시 빛을 보기 위해.

끼이익.

그 끝내, 그녀는.

털썩.

넘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일까.

아니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녀는 라이트로 발치를 밝혔다.

“히이익!”

시체였다.

삼나무를 가다듬어 만든 꼬챙이가 머리에 박혀 죽어 있었다.

그녀는 빛에 기대어 주변을 둘러봤고 그와 동일 수단으로 죽은 시체들을 목도했다.

“신이시여, 제게 구원의 빛을…….”

그녀는 팔꿈치를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행동은 명을 재촉했다.

툭.

어깨가 미세한 실을 건들더니.

날카로운 꼬챙이가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꺄아아악!”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면적을 최소화했으나.

촘촘하게 설계되고 배치된 함정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푹.

꼬챙이가 살점을 꿰뚫고 폐를 관통한다.

그녀는 바로 피를 토하며 고통에 신음했다.

죽는구나.

이렇게, 결국.

이런 곳에서.

어둠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서 여신관은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하다못해…….”

신께서 헤매지 않도록.

자신의 영혼을 가져갈 수 있도록.

뿐만 아니라 흩뿌려진 전사자들의 영혼을 온전히 거둘 수 있도록.

그런 일념으로 손을 드높이 올리고, 그 끝에 마력을 집중한다.

마법 라이트.

그것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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