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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81화 (81/384)

081화

다짐한 열망 (6)

그녀는 창조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억이 삭제되고 새롭게 재건축된 뇌는 마왕군이란 개념은 잃었지만, 마족을 멸하겠다는 신념이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염소의 뿔과 눈동자에 마족을 존속하겠단 이념이 깃들어 있다.

이윽고 신념과 이념이 격돌하여 탄생한 것은 혼란이었으니.

“나는 도대체…….”

혼란을 외면하고자 그녀는 정처 없이 동굴을 걸었다.

내딛는 발걸음은 목적지를 찾지 못해 방황했고, 가슴을 덮고 있는 두 손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

“…나가자.”

우선 탈출을 결심했다.

이르칼라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연결돼있는 자신의 몸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대로 목적 없이 동굴을 떠돌다간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번쩍.

섬광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덩어리의 빛이 그녀의 망막에 맺혔다.

어두컴컴한 동굴을 헤매던 그녀에게 찬란한 빛은 너무나 눈부셨고, 또 아름다웠다.

저 빛은 필시 바깥세상을 향한 지표일 것이다.

주광성을 가진 나방이 모닥불로 날아가듯 라마슈투는 빛에 홀려 무작정 쫓았다.

한걸음, 또 한걸음.

그녀의 의지가 몸을 회복시켰을까, 단순히 이르칼라의 육체가 호전되어서일까.

무너져 가던 다리는 복구되어 정상적인 걸음걸이를 되찾았다.

육체를 보호하던 두 손은 어느새 앞을 향해 뻗어 있었다.

호기롭게 빛나는 구슬에 도착한 라마슈투.

그녀는 그곳에서 허무를 마주했다.

“겨우 마법이었나.”

마력이 발광하는 구슬을 보고 탈출에 부풀었던 기대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혼란이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착각에 눈이 멀어 하급 마법 따위에 희망을 보았다.

진실을 알게 된 라마슈투는 공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신은, 신?”

라이트 아래에서 절박한 음성이 들린다.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옮긴 라마슈투는 시체 더미 속에서 법국의 여신관을 보게 된다.

공기 중에 흩어진 마나가 그녀가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했던 게 틀림없었다.

“왜 마력 덩어리를 쏘아 올렸지?”

“신께서 저를 찾을 수 있…….”

불현듯 말을 끊고 여신관이 피를 토한다.

자세히 보니 옆구리가 꼬챙이에 꿰뚫렸다.

말은커녕 숨도 쉬기도 힘들 터.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라마슈투는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중력을 잃은 꼬챙이와 사체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여신관은 감사 인사도 없이 서둘러 찬가를 고통에 물든 목소리로 부른다.

손끝에서 맺힌 빛을 배에 가져가 상처를 봉합한다.

오직 법국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치유 마법 힐이었다.

“…너무 늦어.”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 출혈이 빨랐다.

치료하기에 그녀의 힐은 위력이 부족했다.

의식이 희미해져 갈수록 자신의 나약함을 체감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젊은 마음이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무엇을 그리도 갈망하기에…….”

눈앞의 여성은 절박하게 생존을 갈구하고 있다.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에 비해 라마슈투는 뚜렷한 삶의 목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못 목표가 있는 여신관이 부러웠다.

“살고 싶어?”

어둠에 사묻힐 정도로 공허한 질문이 여신관에게 날아든다.

“저는…….”

어두운 환경 때문에 질문을 던진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토록 믿고 섬겼던 신이 말씀하시는 것일지 모른다.

이내 지나온 마경을 떠올리며, 상대의 정체가 신이 아닌 악마라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답해주세요. 당신은 신인가요? 아니면 악마인가요?”

“나는 신이 아니야. 하지만 악마도 아닐 거야.”

“그러면, 당신은 누군가요?”

“몰라. 하지만 정체가 무슨 상관이 있겠어.”

라마슈투는 여신관의 턱 끝을 잡고 살며시 들어 올렸다.

“나는 너를 살려줄지도 모르는 유일한 존재잖아.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죠.”

악마를 상징하는 염소의 뿔, 선혈처럼 붉은 머리카락.

동굴의 어둠처럼 공허한 눈빛.

라이트의 역광에 비친 실루엣은 불온하기 짝이 없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저는 신의 인도를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이지, 악마와 계약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설령 당신이 악마일지라도 감사 인사는 해야겠네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꼴사나운 모습으로 신님을 뵙는 걸 면했어요.”

“신이란 녀석을 맹신하는구나. 그래도 한 가지만 대답해줘. 넌 무슨 목적으로 생존을 바라는 거야?”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이해가 안 됐으나, 여신관은 대답한다.

“삶을 바라는데, 어디 이유가 있을까요.”

“무슨 의미야? 어째서 삶을 바라는데? 뭐 때문에 살고 싶은 건데? 대답해 줘. 제발, 대답해 줘.”

“죄송해요. 이젠 안 될 것 같…….”

생기 잃은 여신관은 두 눈을 감고 기절한다.

라마슈투는 그녀가 지면에 부닥치지 않게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말한다.

“나는 대답을 듣지 못했어.”

한순간 여신관의 손끝에 맺혔던 빛의 형상.

그 형상의 룬 문자를 떠올리며 라마슈투는 남은 손을 그녀의 상처 부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떠오른다.

여신관이 사용했던 힐이었지만, 광도와 위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고 흉터 없이 깨끗한 피부가 돋아났다.

“반드시 너를 살려서 대답을 들을 거야. 나의 존재 가치, 삶의 목적에 대해.”

직접 구원한 목숨에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라마슈투는 그녀와 함께 탈출하겠다 다짐했다.

“다 끝났냐?”

그러나 인안나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부터 보고 있었어?”

“그래, 변덕쟁이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간다.

“언니는 어떻게 했어?”

“그게 누구지?”

“이르칼라. 네 주인.”

“반쯤 죽여놨어.”

“멍청한 년.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예견했던 결말을 듣고 인안나는 한심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딴 길로 새지 마. 네가 있을 곳은 여기야.”

“나를 막을 셈이구나. 몸 상태가 온전치 않아서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살려주려고 했는데.”

“하. 어지간히도 만만히 보였나 봐? 네가 살리고 말고를 따질 정도면.”

손을 괴조의 발톱으로 변형시키면서 전투 의지를 보여줬지만, 그녀는 이미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갓 태어나 힘이 정갈돼 있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라마슈투의 무력이 자신을 월등히 상회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굳이 죽고 싶다면야.”

라마슈투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마법진을 소환한다.

원형 마법진 정중앙에서 손바닥만 한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마법은 딱 질색인데.”

발톱을 앞세워 달려갔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화염구가 직격했다.

허공에 흩날리는 불길.

최악.

그 속에서 그을린 날개를 펄럭이며 인안나가 발톱을 휘둘렀다.

“우스워.”

기세 좋게 달려드는 발톱을 향해 라마슈투가 가볍게 손짓한다.

그러자 강풍이 들이닥치면서 인안나가 동굴 내벽으로 던져졌다.

“아파 죽겠네.”

“엄살 피우지 마.”

날개가 조금 그을렸으나 치명상은 아니다.

거친 벽면에 부딪혔지만 육체엔 그렇다 할 상처도 없다.

라마슈투는 처음부터 죽일 각오로 마법을 사용하게 아니었다.

첫발의 화염구는 그녀의 힘을 탐색하는 의미에서, 두 번째 강풍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물론 이를 알고 있던 인안나.

“여유가 넘치시나 봐? 같잖은 년이.”

그녀는 다시금 도전을 다짐한다.

한 번의 합으로 힘의 우위를 확인한 라마슈투는 표정을 찡그렸다.

“그렇게 약하면서 왜 내 앞을 막는 거야?”

“네가 필요하니까.”

돌아온 대답은 의문만 가중한다.

“아, 오해하지 마. 정확히는 네년의 그 힘이 필요한 거야.”

“그러면 왜 나의 힘을 탐내는 거지?”

인안나는 짧게 고개를 떨궜다.

라이트에 의해 그늘진 낯빛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녀석처럼 진심을 담아 말해볼까.”

씁쓸히 미소 짓는다.

“마왕군의 재건을 위해. 그리고 재건을 위해선 동굴의 그 자체가 필요해. 특히 성물에 필적하는 네 힘을 원해.”

강대한 마법을 그것도 영창도 없이 다를 수 있는 라마슈투.

그녀의 존재라면 신의 권능이라 불리는 ‘성물’을 보유한 각국과 인류를 초월한 용사를 타도할 수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라마슈투가 인안나를 따른다는 전제 조건이 붙었다.

“마왕군? 성물?”

“마왕군이나, 성물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근차근 알려줄게. 엄청 복잡한 내용은 아니야. 오히려 간단해서 너무 쉬워서 김빠질걸.”

“그딴 건 관심 없어.”

“그래? 괜히 섭섭하네.”

라마슈투는 다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각각 다른 색상을 띤 세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나는 더러운 냄새가 풍기는 네년의 꼭두각시가 되기 싫어.”

“냄새? 아직도 그놈 정액 냄새가… 야, 잠깐만!”

룬문자가 발광하며 마법이 발사될 조짐을 보인다.

인안나는 서둘러 날개로 방어하려 했으나.

“그 날개, 거슬려.”

두 장의 날개는 강풍을 받고 벽에 부착된다.

비행 능력을 갖춘 거대한 날개가 독이 되었다.

“죽어.”

라마슈투가 한 개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윽고 법진 앞으로 공기를 찢고 가르는 고전류가 생성됐다.

까마귀를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 우레는 준비됐다.

그녀는 손을 크게 펼치며 거리낌 없이 발사하려 했다.

“……?”

마법진이 작동되지 않는다.

마법이 사출되지 않는다.

결국 손끝에서 감돌던 우레는 마력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실수에 비롯된 착오다.

그녀는 방금 상황을 잊고 남은 두 개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유리가 깨지듯 마법진이 산산조각 났고, 곤혹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너희는 죽어서도 멍청한 나를 따라주는구나. 정말로 고마워.”

현 상황을 꿰뚫어 본 인안나가 중얼거린다.

그녀가 불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 걸까, 라마슈투가 탓하듯 묻는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마법도 쓸 줄 모르는데 내가 뭘 어쩌겠냐.”

인안나는 쓰게 미소 짓는다.

“단지, 마족 혐오증을 가진 단 한 명의 쓰레기 년보다, 마녀 여섯 명의 소망이 더 원대했을 뿐이지.”

몸에 남아 있는 마녀들의 무의식이 공격을 거부하고,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여 마법을 불발시킨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망자의 발버둥에 굴복했다는 사실에 라마슈투는 눈을 부릅뜬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너는 그 아이들로 만들어졌으니까.”

“겨우 그깟 이유로?! 웃기지 마. 이건 내 몸이야. 내 거라고!”

“글쎄, 언니의 손에 태어난 순간부터 네게 자유는 없… 자, 잠까아아안!”

더 이상의 설전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라마슈투가 손을 거칠게 휘둘러 인안나를 동굴 깊숙한 곳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곧장 상당한 높이와 넓이를 가진 거대한 푸른 장막을 세웠다.

실드를 장벽 형식으로 전개하여 길을 막아 추적을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시전자가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면 유지되지 못하는 마법이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여신관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틀거리는 아까와 달리 지금의 다리는 당당하게 앞으로 걷고 있다.

자신을 보호하던 손은 여신관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다.

“나는…….”

영웅의 인격에 마족을 증오하는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이르칼라를 혐오하고, 증오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이르칼라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목숨마저 주인에게 헌신해야만 하는 존재다.

두 개의 사실이 결합되어 하나의 모순점이 되었다.

그리고 모순을 짊어진 채 동굴을 떠난다.

“자유롭게 내 운명을 살 거야.”

어느덧 그녀의 눈동자에는.

삶을 수복하겠단 목표는 자유를 열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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