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사형수의 마지막 길 (3)
황제는 그의 권위뿐만 아니라, 대장장이의 망치까지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짐의 그릇은 신하와 백성을 품기엔 몹시나 작고, 그 때문에 권력에 산물인 왕좌에 앉을 때마다 두려움이 나를 옥죄어 왔으니… 항상 근엄한 말투로 신하와 백성을 다스려 하는 직책에, 짐은 이제 신물이 나는구나.”
모루에 손을 올리고 걸어온 나날을 회상하는 황제.
“짐의 핏줄에 용광로의 쇳물이 아닌, 황제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실로 원망스럽구나.”
“형님…….”
나지막하게 황제를 부른 버오쉬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프게 쳐다볼 뿐이었다.
황제는 그를 마주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아우는 기억하는가. 대장간의 단조 소리를, 아우들과의 떠들썩한 소란을, 짐의 기쁨에 찬 미소를.”
“그럼요! 기억하고말고요!”
“주어진 운명을 걷기 전, 아우들과 함께 대장간에서 단조를 하던 그때가 짐이 바라던 삶이었다.”
황제는 허심탄회하게 바람과 후회를 늘어놓았다.
물론 나도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아름답던 과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삶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리 말하자, 황제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오래, 그리고 더욱 압박받는 인생을 황제는 살아왔다.
그러니 한낱 인간은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단 사실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반푼이여, 그대가 짐에게 물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황제는 다시 망치를 손에 쥐었다.
“당연히 아니다. 짐은 제국을 위해서라면, 마족의 목숨 따위 몇 번이고 바칠 용의가 있다.”
지극히 악인으로서의 주장을 뻔뻔하게 내세웠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래. 나도 복수를 위해서라면, 남들이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생각을 품은 자가 반역에 기꺼이 목숨을 내줄 수 있다는 건가?”
“죽음이 짐의 마지막 본분이기 때문이다.”
반역에 목숨을 잃는 것이 황제의 본분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 표정을 확인한 황제.
“반푼이여, 짐의 말을 허투루 들은 게로구나.”
그는 뚜렷하게 목적을 밝힌다.
“황제랍시고 앉은 자가 바로 짐이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의욕을 상실하고, 내세울 건 망치질과 왕가의 핏줄밖에 없는 어리석은 짐이란 말이다.”
“설마… 형님, 그래서 반역을 눈감고 계셨던 겁니까?”
“그렇다, 아우여. 짐의 심장이 굳게 잠긴 제국의 새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짐의 소명, 황제의 본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즉, 덜떨어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목숨을 바쳐 새 시대를 열고, 황제로서 제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단 뜻인가.
그것 참 웃음도 안 나오는.
“쓰레기 같은 생각이로군.”
감상평을 들려주자, 버오쉬푸는 눈치를 보고 황제는 불쾌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내게 망치를 겨눈다.
“반푼이여, 짐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을 우롱하는 건가?”
“그래. 우롱하고 있다.”
황제는 수염을 꿈틀거리며 입을 연다.
“네놈…….”
그러나 당당한 내 눈빛을 보고, 도리어 황제는 반론을 삼켰다.
“아무리 남타르님이라도 형님을 깎아내리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버오쉬푸가 노려보며 말했다.
이해한다.
호영호재하던 형님이 모욕을 당했으니, 이유야 어찌 됐건 제법 기분 나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일 뿐이다.
그는 황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버오쉬푸, 네게 묻겠다. 황제란 녀석이 한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남타르님은 모르시겠습니까? 형님은 지금 제국을 위해서 목숨을 희생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녕 그리 받아들였나.”
질책하는 한마디에 버오쉬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나는 황제를 올려보았다.
“황제란 직책이 네게 고단했던 것도, 그리고 과분했던 것도 알겠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반역의 명분과 뜻을 높여주려는 것 또한 잘 알겠다.”
하지만 알고 있지 않은가.
“이는 운명에서 도망치려는 겁쟁이의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 말하자 황제는 망치를 높이 쳐들었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떠있던 망치는, 이윽고 잔상을 남기며 재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깡!
차오른 분노를 해소하는 단조 소리는 멀리 울려 퍼졌다.
“짐이 기필코 외면했던 사실을… 반푼이여, 네놈은 잘도 말하는구나.”
“자기 합리화는 제삼자의 눈으로 볼수록 뻔히 보인다.”
서로 노려보는 나와 황제.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그럼… 남타르님이 했던 말이……!”
버오쉬푸의 물음에 황제는 말을 아꼈다.
하기야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을 테지.
나는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제국이나 황제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를 타계하고자 황제는 부단히 노력했을 거다. 하지만 실패했고, 결국은 좌절했다.”
황제의 처소, 그곳의 탁상에 올려져 있던 양피지에 반역에 따른 득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득실을 따져봤을 때 자신이 죽는 것이 새 시대의 밑거름이 된다면, 그는 훌륭한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따른 예상은 정반대였다.
“말해주십시오, 남타르님. 도대체 무엇이 형님을 이리도 괴롭게 한다는 겁니까!”
“아직도 모르겠나. 그럼 묻지, 포로가 되기 전 네 마지막 임무는 뭐였지?”
“상회의 무역을 저지하고, 무엇이 오가는지… 확인을…….”
“그래. 황제는 최측근인 너에게 그런 위험한 명령을 내렸다.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안 그런가, 황제?”
바른대로 이유를 털어놓으라는 눈초리에 황제는 속으로 신음하며 고민한다.
머지않아 생각을 마친 황제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마족에 대한 혐오가 짙어지기 이전… 그러니까, 왕국이 용사를 소환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출몰한 상회가 제국에게 무역 권한을 신청해왔었다. 짐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허락했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 상회는 소소하게 무역을 이어나갔다. 하나, 상회는 어느 순간부터 공격적인 무역 활동을 감행하였고, 그것은 날로 심해졌다. 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짐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고…….”
“그리고 결국 상회가 잠식한 건가.”
“그렇다, 반푼이여. 결국, 제국의 경제는 어느덧 상회의 무역품에 의지하기에 이르렀다.”
상회한테 당했다, 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제국은 상회에 휘둘리기에 불 보듯 뻔하여, 이를 짐은 걷잡으려 했으나… 감언이설에 넘어간 신하들이 짐의 뜻을 저지하였다.”
“신하에게 밀려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황제라, 비루한 왕이로군.”
“반푼이여, 황제는 천하를 가졌으나 그 뜻은 신화와 백성을 품은 왕이란 것이고, 짐은 신하를 존중하는 제국의 법도를 따랐을 뿐이다. 법도를 어기는 황제는 폭군이나 다름없다.”
말이야 어찌 됐건 힘없는 황제는 제국이 통째로 상회에 팔리는 걸 막지 못했다.
미연에 방지하는 데도 실패.
신하의 뜻을 돌리는 데도 실패.
아우를 시켜 상회를 저지를 시도했지만 실패.
“제국에 상회가 깊이 뿌리박았고, 상회의 악의가 신하를 조종하였으니, 짐은 외세의 침략을 몇 백 년이나 방어해온 요새에 갇힌 채 패배하였다.”
실패로 얼룩진 황제는, 이윽고 포기하였다.
“괜한 피해만 발생시키는 황제 따위, 차라리 없는 것이 제국에 이로울 것이다. …짐은 그리 생각하였다.”
황제는 나를 쳐다본다.
“반푼이여, 짐을 비겁한 겁쟁이라 불러도 좋다.”
황제는 버오쉬푸를 바라본다.
“아우여, 짐을 어리석은 왕이라 손가락질해도 좋다.”
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떨군다.
“이제 짐은 상회로부터 제국을 구한다는 과업을 이루기 벅차다.”
쓸쓸한 중얼거림에 나는 숨을 죽였다.
방면에 버오쉬푸는 팔을 치켜들고 눈물을 닦았다.
“형님…! 제길…! 제게 힘이 있었다면… 크흑!”
속뜻을 알게 된 버오쉬푸는 눈물을 훔쳤다.
참으로 감성이 풍부한 녀석이다.
그렇다면, 짜증을 느끼는 나도 그와 똑같다 할 수 있을까.
“포기를 자랑스럽게 떠들지 마라, 우매한 왕이여.”
내색은 안 하려 했건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다못해 결국 표출했다.
그가 어떠한 심정으로 포기했고 어떠한 각오로 희생을 결심했던, 내가 알 필요 없다.
벼랑 끝에 내몰려도 싸워야 하며,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지를 굽히지 않아야 한다.
그게 황제의 업이다.
“짐에 대한 모욕을 허락한다, 반푼이여. 하나, 그대는 다른 눈높이에 서 있는 자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네가 막중한 직책을 떠안고 살아가는 건 알고 있다.”
나는 황제를 노려보며 말한다.
“하지만 패배는 저승에 가서 되새겨라. 살아 있는 한, 끝까지 발버둥쳐라.”
그리 말하자 황제는 씁쓸히 웃었다.
“짐이 놓친 묘수를, 그대는 알고 있는 듯 말하는구나.”
“왕좌의 자리에서 통찰을 깨우친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네게 묘수는 될 수 있다.”
“…무슨 뜻인지 짐에게 털어놓거라.”
말 그대로다.
나는 짧은 시간 만에 제국에 잠식한 상회를 뿌리 뽑을 방법까지는 고안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초 작업의 들어가기 전, 땅속 깊이 숨은 상회의 뿌리를 밝혀줄 수 있다.
“내가 속해있는 삼목산의 동굴은, 왕국의 중심부에 있는 상회 본부를 공격할 거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황제.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순간이며, 내가 처음으로 표정을 읽은 순간이기도 했다.
“그 말이 사실인고?”
“버오쉬푸가 증인이다.”
황제는 재빨리 버오쉬푸에게 눈을 돌렸다.
긴장했는지 그는 다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타르님의 말은 전부 사실이고… 형님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물론 너는 성공 가능성 따위는 차치하고, 오로지 그 시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패국의 마왕군이 힘을 모아 상회 본부를 타격하는 얼토당토않은 계획.
꼴사납고, 희망도 없고, 우습게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패배를 결단한 황제에겐 영광스러운 행보로 보일 것이다.
“…지금 짐에게 마족의 생사가 걸린 부질없는 공격을 도우란 건가.”
“필요 없다. 그저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공격적인 말투에 버오쉬푸가 당황한다.
“남타르님, 말씀이 지나친…….”
그러나.
“…크흐흐.”
황제는 손으로 이마를 치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 이런 멍청이들을 보았나! 실로 어리석구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대장간을 가득 메꿨다.
근엄하던 모습이 흐트러졌으나, 나는 황제의 이런 일면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암! 짐이 그대들을 도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황제가 말하길.
“마귀의 꾀에 넘어간 신하를 일깨우고, 제국을 통치하여야 하는데! 크하하하, 그렇고말고!”
“…형님! 그 말씀은!”
“지난날의 나약한 모습은 잊거라, 아우여!”
마치 핏줄에 용광로의 뜨거운 쇳물이 흐르는 듯 황제는 생기가 깃든 목소리로 선포한다.
“짐이 아우에게 약조한다, 제국을 구하기로. 짐이 반푼이에게 약속한다, 제국을 포기하지 않기로.”
복수를 통찰한 황제.
그거면 충분하다.
네놈은 마족이 상회 본부를 박살내는 가능성을 믿어라.
나 또한 외부로부터 상회에 타격을 줄 가능성을 믿겠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던 나와 황제는 구태여 입 밖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가능성에 믿음을 걸었다.
“우선 내일 있을 어전회의를 넘겨야겠군. 반란 제압을 돕겠다. 황제.”
“정말이십니까, 남타르님?!”
“그래. 그 편이 이득이다.”
그렇게 결정하자, 황제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나를 삿대질했다.
“반푼이여, 미리 말해두겠다. 짐과 제국은 마족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차피 자선사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크하하하! 꽤 마음에 드는 멍청이구나, 반푼이여!”
호탕하게 웃은 황제는 불현듯 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제 와서 무엇을 만들 속셈인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황제는 버오쉬푸의 어깨에 거칠게 손을 올렸다.
“아우여, 오랜만에 짐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좋습니다, 형님! 그런데 무엇을 만들 겁니까?”
“짐이 자결하려 했던 단검…….”
황제는 나를 보며 미소를 그린다.
“그러나 지금은 저 반푼이가 쓸 무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