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사형수의 마지막 길 (8)
흙먼지와 더불어 책과 종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견고한 철문과 문고리가 구겨지고 부서지며 벽에 이리저리 튕겼다.
공간 중앙을 바라보며 원을 그리며 줄지어 있던 서가가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말 그대로, 대서고는 풍비박산에 이르렀다.
또각. 또각.
폭풍이 지나간 길을 그녀는 구두굽을 울리며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호호, 이거 너무 심했나?”
용사가 대서고를 둘러보며 말했다.
“크윽… 용사, 님?”
목소리를 듣고 폭풍에 휘말린 추기경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서고의 문헌을 유실시킬 셈입니까?!”
“진정하세요, 클루 씨. 저는 합리적으로 지팡이를 사용한 것 뿐이라구요.”
“합리적이라고? 당신 눈엔 혼돈의 바람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분노해봤자 용사는 비웃듯 고혹적인 미소로 흘려넘긴다.
추기경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용사는 지팡이로 대서고를 끝을 가리켰다.
“떠나자마자 방대한 양의 마력을 감지했어요. 하급 탐지 마법밖에 못 쓰는 제가 알아차릴 정도로 아주 거대한 마력을요.”
추기경의 시선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간다.
“그게 클루 씨의 마력은 절대 아닐 테고. 그래서 전 클루 씨가 위험한 것 아닌가 싶어 한걸음 달려왔죠.”
용사와 추기경의 이목이 겹친 그곳엔, 줄라이를 안고 있는 라마슈투가 서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혹시나가 역시나, 망국의 마녀 한 마리가 법국에 기어들어 왔었네요.”
라마슈투는 용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힐끔 줄라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기절한 것은 아니지만, 용사를 보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어, 어떡해, 라마슈투!”
“못 이겨. 도망쳐야 돼.”
“하지만 상대가 용사인데……?”
“…쯧.”
답답함에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하인 탓에 함부로 벽을 허물 수도 없다.
그러나 단 하나뿐인 출구는 용사가 가로막고 있다.
하물며 간신히 대서고를 나간다 한들, 과연 용사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후.”
라마슈투는 심호흡하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천천히 생각하자.
목표는 용사를 따돌리고 멀리 도망치는 것, 하지만 어떻게 따돌릴 것인가.
‘애초에 저년은 왜 나를 단번에 죽이지 않은 걸까?’
호기심?
어느 정도 맞지만. 바람 마법에 사지가 찢기거나 문에 맞아 머리가 깨질 수도 있었는데, 용사는 내가 문까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능력 부족?
절대 아니다.
단순한 바람 마법일 뿐이건만, 넓은 대서고의 서가가 절반이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모종의 이유?
그래. 분명하다.
용사가 함부로 강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호호호.”
반증으로 용사는 함부로 라마슈투를 자극하지 않고 있었다.
“겁먹은 양 같네? 우쭈쭈, 이름이 뭐니?
“꺼져.”
“호호, 생긴 것처럼 귀여운 협박이네.”
남성미 짙은 날카로운 눈매가 용사를 노려보다 말고, 그녀의 뒤편을 향했다.
“도망치려고?”
“할 수 있다면.”
“어쩜 이리도 자신감 넘치는 대답일까? 내 앞에서 도망 가능성을 남겨두다니.”
무작정 도망친다면 바로 뒤가 잡힌다.
우선 용사의 힘을 가늠하면서 기회를 엿봐야 한다.
“잠깐 있어.”
“꺄아아!”
라마슈투는 바람 마법을 통해 손짓만으로 줄라이를 추기경이 있는 곳까지 던졌다.
자연스레 용사는 줄라이를 쳐다보게 되었고.
“이게 무슨 속셈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라마슈투의 계획을 예상할 겸 다시금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어머나.”
없다.
잠깐 시야를 비운 사이에 라마슈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아 있던 것은 공기 중에 흩어진 마력뿐.
“블링크?”
용사는 마력의 잔재를 보고 유추했다.
그렇다면 라마슈투는 어디로 전이했을까, 답은 단순했다.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영창도 없이 쓰는 건 신기하네.”
어느새 용사 머리 위로 공간 이동을 한 라마슈투는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손바닥에 떠오른 마법진, 그 중앙에서 불길이 마치 폭포처럼 용사를 향해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대서고가 불탄다.
“그건, 곤란한데?”
지팡이의 마법석이 발광하며 푸른빛이 대서고를 빼곡히 채운다.
“아쿠아 윌.”
용사가 짧게 주문을 읊자, 지팡이 끝에 물방울이 맺히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두꺼운 수벽이 되어 불길을 막았다.
“읏!”
불과 닿은 물은 빠르게 증발하였고, 뜨거운 수증기가 라마슈투를 덮쳤다.
이를 버티지 못하고 먼저 불을 거둬들인다.
그 순간, 용사가 빈틈을 포착했다.
“아쿠아 스피어.”
공중에 수벽이 출렁이고, 꿈틀거리며 창 형태로 압축한다.
용사가 지팡이를 허공에 약간 휘젓자, 창은 호쾌한 속도로 라마슈투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간다.
그녀는 창끝이 꿰뚤힉 전에 가까스로 블링크를 통해 근처로 전이했다.
“호호, 귀여워라.”
라마슈투는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은 컴퍼스처럼 깨끗한 반원을 그리며 다시 목표를 추적했다.
그것을 피하고자 라마슈투는 공중을 쏘다녔다.
“쯧.”
따라오는 창을 보고 혀를 차며, 라마슈투는 벽을 향해 크게 손짓한다.
그녀가 손짓한 곳에서 흙이 쏟아졌다.
이윽고 흙은 직사각형의 토벽이 되어 창을 막아섰다.
퍽.
수창에 꿰뚫려 허무하게 파괴되는 토벽.
그러나 라마슈투는 포기하지 않고 크게 손짓하며 토벽을 무수히 생성한다.
퍽. 퍽. 퍽.
수차례 토벽을 관통한 창은 차츰 부피와 속도를 잃었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용사.
“비행 놀이는 재밌지만. 에어로 봄.”
영창을 간소화된 주문으로 라마슈투의 앞길에 공기를 압축시켰고.
펑!
터트렸다.
“크윽!”
갑작스러운 충격에 라마슈투는 버티지 못하고 추락했다.
서가에 부딪치며, 책과 종이에 뒤엉키고, 거칠게 땅바닥을 굴렀다.
“라마슈투! 피해!”
여전히 그녀를 추적하는 수창을 보고 줄라이가 외쳤다.
블링크로 피하기엔 늦었다.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위력을 낮춰야 한다.
라마슈투는 창을 향해 손을 뻗어 강풍을 발사한다.
잠깐이나마 창은 주춤했지만, 결국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둘러 머리를 숙여 피한 덕분에 창은 미간이 아닌, 서가에 박혔다.
“……!”
하지만, 어뢰가 폭발하듯 창은 물을 분출했다.
쓰나미에 휩쓸린 것처럼 관절이 이리저리 꺾인 라마슈투는, 표류한 끝에 해변에 덩그러니 떨어진 몰골로 쓰러졌다.
“이런, 홀딱 젖었네. 괜찮니?”
용사는 걱정하는 척 조롱했다.
이에 라마슈투가 힘겹게 고개를 들고 그녀를 노려본다.
마법의 이해도뿐만 아니라, 힘의 차이도 압도적이었다.
“그래도, 발버둥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어.”
“…시끄러워.”
용사의 수창에 의해 대서고는 물에 잠겨있었다.
라마슈투는 그 물을 끌어모아 손바닥에 응축시키고, 아쿠아 스피어를 모방하여 불안전한 수창을 만들어냈다.
“호호, 할 일을 줄여줘서 고마워.”
지켜보고 있던 용사는 그녀를 향해 살며시 지팡이를 내밀었다.
“라이트닝.”
번쩍.
지팡이 끝에서 시작된 벼락이 응축된 물에 떨어졌다.
곧 벼락은 물을 타고 라마슈투를 감전시켰다.
“끄으윽! 으윽……!”
어금니를 깨물어 신음을 참을 수는 있어도, 피부를 송곳으로 후벼 파는 고통은 버틸 수 없었다.
이윽고 벼락은 물과 함께 증발했다.
하지만 라마슈투 입은 대미지는 상당했다.
“괴물… 같은 년…….”
그녀는 가쁘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그건, 너 같은데? 그 정도로 감전 당했으면 보통 사람은 벌써 죽고도 남았거든?”
용사는 눈웃음을 짓는다.
“말해보렴. 도대체 정체가 뭐니?”
하물며 용사조차 마법을 사용할 땐 간소화된 주문을 말하건만, 그녀는 영창은 물론이거니와 그럴듯한 마법 명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게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식한 마력양, 그럴듯한 갑옷과 도구도 없으면서 높은 마법 저항력, 일개 영웅과 비견될만한 체력.
“이 세계에서 너같이 이질적인 존재는 본 적이 없어.”
용사가 그리 말하자, 라마슈투는 헛웃음 뱉었다.
“하, 너만 할까……?”
“호호, 그것도 그러네?”
입을 가리고 조신하게 웃은 용사.
“정말, 말 그대로야.”
그녀는 많은 의미가 담긴 눈웃음을 라마슈투에게 보냈다.
“이제, 대답하렴. 넌 누구니?”
“…말하기 싫어.”
“그래? 그럼, 조금 강압적인 방법을 써볼까?”
용사는 웃음을 멈추고 줄라이를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스톤 핸드.”
“아, 안돼! 꺄아앗!”
주문을 외우자, 줄라이의 발밑에서 골렘의 손이 뻗어나 와 그녀를 거머쥐었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줄라이를 보고 라마슈투가 다급해한다.
“이 애를 으깨서 만든 붉은 과즙을 억지로 마시고 나서야 말할 마음이 생길까?”
“줄라이를 놔줘!”
“이름이 줄라이였구나. 더운 계절에 마시기 좋겠는걸? 호호호.”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싫다면, 말하렴? 너의 모든 걸.”
줄라이가 라마슈투에게 손을 뻗었다.
“안 돼, 라마슈투! 말하면 안 돼!”
“방해하지 말아 줄래?”
골렘 손의 악력이 강해졌다.
줄라이는 비명조차 못 지를 정도로 억눌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마슈투는, 고개를 숙였다.
“…말할게. 모두 말할게.”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러니까, 이름이 라마슈투?”
“안돼… 라마슈투…….”
“나는… 그년에 의해 만들어졌어…….”
“그년? 그게 누구니?”
“…이르칼라, 그년이 나의 주인…….”
라마슈투는 말하다 말고 용사 뒤쪽을 응시한다.
“왜 그러니? 라마슈투……?!”
그녀의 이상 행동에 용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뒤를 돌아봤다.
“뭐, 뭐야?!”
그곳에는 서가 절반이 불에 타고 있었다.
“아쿠아 볼, 아쿠아 볼, 아쿠아 볼!”
용사는 서둘러 물계열의 마법을 연발하며 불을 진압한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보고 라마슈투는 의아했다.
겨우 대서고에 불이 붙은 것 가지고 어째서 당황하는 걸까.
‘모종의 이유. 그래. 이년이 바람과 물만 사용한 것도 전부 대서고 때문에…….’
대서고에 무슨 볼일이 있고, 어째서 지키려는 건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애초에 알 필요도 없다.
라마슈투는 대서고가 용사의 약점이란 것만 이용하면 됐다.
“언제 이렇게…! 아쿠아 볼!”
용사가 불길 진압에 열중하는 틈을 타 라마슈투는 블링크로 줄라이에게 전이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시 블링크를 사용한다.
대서고 입구까지 도망친 라마슈투와 줄라이.
이를 눈치챈 용사가 지팡이를 그녀들에게 뻗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프로즌 웨이브!”
냉기를 내뿜는 얼음 파도가 그녀들을 덮친다.
라마슈투는 겹겹이 쌓인 파도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간단한 마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
프로즌 웨이브를 상쇄시킬 마법이 필요하다.
이딴 건 평생 쓸 일 없을 줄 알았건만, 이리도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이야.
쓰게 웃은 라마슈투는 바로 전에 터득한 스톰 윈드를 사출했다.
낙뢰가 휘몰아치는 태풍이 얼음 파도를 만나자, 사방으로 번개와 고드름이 튀었다.
“스톰 윈드?! 저년이 짜증나게!”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고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장을 카드를 숨기고 있던 라마슈투를 보고 용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스톤 윌!”
용사가 토벽을 세워 낙뢰와 고드름을 막아내는 걸 확인하고, 라마슈투는 줄라이와 함께 대서고를 빠져나갔다.
“두고 봐! 라마슈투! 이번 일은 절대 안 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