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낱알 (5)
망루에서 검을 하늘로 뻗는 랫더미.
땀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 잠시나마 턱수염에 맺혀 머물렀다.
이윽고 그가 검을 휘두르니 고여있던 땀이 공중에 흩어진다.
“쏴라!”
그의 우렁찬 지시가 떨어지자, 성벽 밑으로 화살을 겨누고 있던 사병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활대의 탄성과 중력을 등에 업은 화살은 쏘는 족족 성벽을 타고 오르는 괴물에게 박혔다.
운 좋게 미간에 적중한 화살을 맞고 떨어지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연한 살집에 처박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 오는 괴물도 있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차츰 대미지를 쌓아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오히려 괴물들은 도망갈 생각도 안 하고 끝도 없이 기어올랐다.
게다가 개중에는 날개를 보유한 괴물도 있었다.
“크윽, 괴물 주제에!”
강철 따위 가볍게 찌그러트리는 집게와 망치로 수백 번 내려쳐도 부서지지 않는 사슴벌레 괴물.
그것이 날아들어 사병의 목을 향해 집게를 좁혀온다.
“제, 제기랄!”
놔두면 목이 끊어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평범한 화살이나 검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결국 사병은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려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퍽!
그러나 부러졌어야 할 목뼈는 온전히 남아 뇌에 공기를 공급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두 눈을 부릅뜬 그의 눈동자가 리스의 등을 보고 희망으로 물든다.
“사냥꾼……!”
리스가 대검으로 사슴벌레 머리를 밑에서 위로 올려쳤다.
그대로 공중에서 뒤로 엎어지는 괴물이 완전히 드러눕기 전에 장검으로 갑옷과 같은 표피 사이로 찔러 넣는다.
촤아악.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구불거리는 표피 이음매를 매끄럽고 손쉽게 베어버렸다.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묽은 액체를 뒤집어쓴 리스는 눈가를 닦아내고 사병의 빈손을 노려봤다.
“활을 놓지 마. 다음엔 괴물이 뿔이 아닌 내 검에 목이 잘릴 테니까.”
발등에 활을 걸고 그에게 던져준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성벽을 기어오르는 괴물의 약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 알겠습니다.”
홀로 허망하게 대답을 읊조린 사병은 괴물의 울음소리에 퍼뜩 제정신을 되찾고 재빠르게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저기 저기.”
“어, 엇, 예?!”
불현듯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사병은 깜짝 놀라 화살을 떨어트린다.
그의 간이 콩알만 해지든 말든 스킬라는 화살을 주워주며 말을 이어간다.
“활 잘 쏘던데, 우선 왼쪽에 있는 껍질이 연한 애들을 먼저 쏴줘. 바로 밑에 있는 녀석들은 올라오는 게 늦거든.”
“애벌레 같은 놈들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해.”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는 스킬라.
밧줄을 매단 갈고리를 성벽로에 걸고 성벽 밑으로 뛰어내린다.
성벽 중간쯤 떨어졌을 때 허리춤에 매단 줄은 팽팽해졌고, 그녀는 밧줄에 의지한 채 유유히 성벽을 뛰어다니며 괴물의 머리를 베었다.
힘과 지혜, 거기에 사냥꾼의 노하우까지 덴마우스를 돕고 있었으니 사병은 희망에서 비롯된 고양감에 활시위를 더욱 강하게 당겼다.
하나, 정작 사냥꾼들의 마음은 점점 절망감에 무거워진다.
콰득!
성벽 위로 머리를 들이미는 자이언트 로커스트, 메뚜기 괴물을 대검으로 내려찍는다.
하지만 검날이 얕게 박힌 탓일까, 머리가 절반이 베였음에도 괴물은 리스를 향해 도약하기 위해 뒷다리를 꿈틀거렸다.
“쯧.”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곡예 부리듯 허공에 돌려 역수로 쥐고, 검등을 대검 위로 겹쳤다.
촤아악.
그대로 힘을 실어 찍었다.
반으로 갈라진 괴물 머리에서 짙은 녹색의 피가 흠뻑 덮쳤다.
“빌어먹을.”
리스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두 눈에 한껏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봤다.
녹색 피로 샤워를 한들 이미 괴물의 혈액으로 피 칠갑이 돼 있는 터라 그러려니 했다.
이르칼라에게 받은 능력과 힘 덕분에 괴물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냥꾼의 미간을 찌푸리게 한 것은 따로 있다.
“거의 한계야…….”
마치 줄다리기하듯 괴물이 기어오르고, 이를 막는 성벽 위에서 병사들.
처음에는 활과 화살, 뜨거운 기름으로 어떻게든 성벽 밑으로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괴물의 시체더미가 발판이 되고, 또 시체가 쌓일수록 괴물이 기어 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덧 턱 끝까지 치고 들어온 상태.
“성벽로를 점거당하면 끝이야! 손가락 지문이 없어져라 화살을 쏴! 괴물의 식탁에 오르고 싶지 않으면!”
리스의 지시에 병사들은 손끝이 찢어져도, 팔 힘줄이 끊어질 것 같아도 생존을 갈망하는 본능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자네도 그만 올라와! 더는 위험해!”
“네가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였거든!”
성벽을 뛰어다니며 괴물을 베던 스킬라는 검을 납도 하고 밧줄을 쥔다.
도망치려는 먹잇감을 괴물들은 피라냐 떼처럼 도약해 쫓았으나, 공이 튕기듯 날쌔게 올라가는 그녀에겐 닿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날개를 달고 있는 괴물은 구태여 쫓을 필요 없다.
기회를 엿보다가 낚아채기만 하면 된다.
“자네, 뒤에!”
노블레스 모스키토, 성인 남성 두 배 크기의 모기 괴물이 스킬라를 향해 돌진한다.
가녀린 목이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모기의 입술 침이 그녀의 목을 향해 사복 검처럼 뻗어나갔다.
“피해!”
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알렸지만.
“읏……!”
그녀는 막 성벽로에 오른 터라 자세를 가다듬던 중이었다.
“제기랄!”
서둘러 리스는 투창 자세를 하고 역수로 쥐고 있던 장검을 투척한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닿기 전.
촤악.
붉은 핏줄기가 새하얀 구름을 적셨다.
* * *
아사쿠가 데스크 앉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린다.
하수구에 숨겨뒀던 쥐 떼를 총동원해 열세를 뒤집을 방법을 찾고 있지만, 폭우처럼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말해주듯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적어도 목숨은 건져야 한다.
아사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새드너스, 준비하세요.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하, 하지만…….”
그를 신봉하기로 마음먹었던 새드너스가 머뭇거렸다.
“걱정하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괴물 무리가 성벽 중간까지 밀고 들어온 상태예요.”
애초에 일개 병사가 괴물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원거리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제 끝이다.
수성이란 이점이 사라지는 순간, 괴물의 불리함은 사라지고 병사의 무력함은 떠오를 것이다.
“곧 병사들은 활 대신 검을 뽑을 테고,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죽을 겁니다.”
“…그분들은, 리스 님과 랫더미 님은요? 영지민 분들은요?!”
“리스 양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 쉽게 죽을 분이 아닙니다.”
“그럼 다른 분들은…….”
“저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창 전선을 지휘하는 랫더미는 돌아올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가면 괴물의 눈에 띌 수 있다.
결국 도망치는 인원은 단 둘, 랫더미와 새드너스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그녀도 어렴풋 깨닫고 고개를 떨궜다.
“중요한 물품만 챙기고 떠날 겁니다. 준비해주세요.”
“…네.”
혼자 이기적으로 살아남는 죄책감을 뒤로하고 새드너스는 그를 따랐다.
그때, 집무실 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누구십니까?”
불현듯 찾아온 손님.
평상시라면 진작에 눈치챘겠지만, 눈이 되어주던 쥐를 모두 전선에 보낸 터라 은행에 누가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마을 사람이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라면,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냉혹하게 쳐내야 한다.
아사쿠는 입술 끝에 검지를 세워 새드너스에게 침묵을 명령하고, 데스크 밑에 숨겨뒀던 검을 꺼냈다.
“저기, 오빠가 보내서 왔는데요.”
벌어진 문틈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흙투성이 신발이 들어왔다.
“아사쿠라는 분을 찾는데 혹시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그리고, 릴리프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당신은… 릴리프?”
“저를 아시나요?”
아사쿠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껏 뽑았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을 구출하기 위해 판을 짰던 제가 모를 리가 없죠.”
릴리프의 얼굴이 밝아진다.
“혹시 아사쿠 님이세요?”
“하하하, 맞습니다. 릴리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해요. 그럼 옆에 계신 검은 머리칼의 엘프 님이 새드너스 님이겠네요.”
“네? 아, 네, 마, 맞아요…….”
심하게 낯을 가리는 새드너스가 아사쿠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손바닥을 펼치고 릴리프를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저분의 성함은 릴리프. 둘째의 혈육이죠.”
“둘째라면, 그 남타르 님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새드너스는 숨을 삼키며 놀란다.
“그럼, 드디어…….”
“네, 맞습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쓰게 웃는다.
“그의 길고 길었던 휴가가 드디어 끝났다는 거죠.”
* * *
리스가 투척한 검이 모기 괴물의 입술 침을 베어 가르기 전에.
촤악!
내가 던진 도끼가 먼저 괴물의 머리에 처박혔다.
그리고 리스가 던진 장검이 성벽 밖으로 떨어지기 전에 한 손으로 낚아챘다.
사냥꾼의 소중한 무기인데 잃어버리면 아깝지.
그나저나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스킬라는 이용 가치가 있으니 여기서 잃어선 안 된다.
“나, 남타르 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절망에 빠졌던 스칼라가 나를 보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녀를 구출한 것이 지극히 계산적인 행동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스킬라는 달려와 의심 없이 나를 껴안았다.
“떨어져라. 징그럽다.”
“아잉, 오랜만에 봤는데 튕기지 마시구요!”
“전투 중이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 줘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아름다운 근육과 거기서 나오는 꿀처럼 달콤한 남타르 님의 땀 냄새를 향유…….”
“시끄럽다.”
징그럽게 달라붙는 그녀를 시야에서 치웠다.
때마침 리스가 내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녀는 친구를 살려줬음에 고마워하기는커녕, 마치 원수를 본 것처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거 알아? 자네 모습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망령이 묘지에서 기어 나온 꼴이란 걸.”
“지상에 한이 남아 있었다.”
“묘지 위는 지상이 아니라, 악마가 다스리는 지옥인데도?”
“지상인지 지옥인지, 그건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자네는 평범하게 살아갈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어.”
“걱정 마라.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눈싸움을 벌이는 나와 리스.
그 사이로 스킬라가 얼굴을 들이민다.
“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멍청한 놈은 구해줘봤자다,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
그녀에 물음에 리스가 어금니를 깨물고 대답하며 내게 대검을 던졌다.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장검을 던져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렇게 스킬라 앞뒤를 스쳐 지난 검 두 자루는 온전히 주인에게 돌아갔다.
“너희는 병사를 지켜라.”
대검을 되찾았으니 이제 괴물만 처리하면 된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성벽로의 타구에 올라섰다.
리스는 금방 이해하고 뒤돌아선다.
하지만 스킬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쩌려구요?”
말해 뭐 하는가.
부질없는 질문에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앗, 자, 잠깐, 남타르 님!”
타구에서 도약하고 그대로 성벽 밑으로 떨어지자, 성벽 밑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괴물들은 웬 떡인가 하고 입을 벌렸다.
콰득.
나는 그 아둔한 허기에 대검을 내려찍었다.
외골격이 파괴되는 소리에 괴물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됐다.
소름 끼치는 눈동자 속에서 내게 주어질 고통이 충분히 예상됐다.
그런데 어쩌겠어.
이게 내 역할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