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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185화 (185/384)

185화

이무기 (1)

콰직.

메뚜기 더듬이를 잡아 고정하고 대검을 내려찍었다.

차츰 뇌 신경이 끊어지면서 내 머리를 노리고 도약하기 위해 꿈틀거리던 뒷다리가 이내 축 늘어졌다.

그런데 불현듯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살기를 숨길 생각을 안 하는군. 괴물은 이래서 상대하기 편하다.

곧장 몸을 회전하며 메뚜기 시체를 던졌다.

그러자 기습을 엿보던 애벌레 괴물의 연한 표피에 처박히고 살점이 터졌다.

컨디션이 좋은걸. 나는 자랑하듯 가볍게 어깨를 풀며 주위를 둘러봤다.

발밑엔 괴물의 시체와 피가 널브러져 있고, 주변 나무엔 그것들의 파편이 걸려있다.

그리고 어두운 하늘 아래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 아수라장에서 나는 성벽을 뒤로한 채, 나를 기점으로 반원을 그리며 퍼져있는 괴물들을 노려봤다.

이상하군. 갑자기 덤빌 생각을 안 한다.

처음엔 미친 듯이 달려들기 바쁘더니만, 지금은 땅 밑에 스며들 정도로 울음소리를 낮게 깔며 노려보고만 있다.

“이제 와서 겁먹은 건가.”

괴물의 다리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는 걸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뒤늦게 굶주린 허기를 잊고 생존을 갈구하는 본능이 깨어난 건가.

이것들은 날카로운 이빨로 뼈를 깨물어 부수고, 예리한 턱과 앞다리로 살점을 베어 갈랐으며, 각기 다른 괴물들이 한 몸이 되어 나를 덮쳤다.

그랬건만,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지 않는가.

불사를 표방하는 육체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성벽을 올려다봤다.

시체더미를 디딤돌 삼아 기어 올라가던 괴물들도 정리가 끝난 상태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겁을 줄 요령으로 주변에 굴러다니던 모기 괴물의 머리를 발로 찼다.

머리는 녹색 피가 묻은 잔디밭을 구르며 괴물 무리 앞에 멈췄고, 그것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괴물들은 농지를 지르밟으며 황급히 도망쳤다.

쫓으려면 쫓을 수는 있지만 힘 낭비에 시간 낭비다.

아직 처리한 괴물보다 살아 있는 괴물이 훨씬 많다.

“나중에 시간을 들여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결론짓고 대검을 어깨에 올렸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들린다.

저쪽에서도 사태가 정리된 걸 파악한 것 같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삼목산 인근에 괴물이 대거 출몰한다고 리스가 말해줘서 보이는 데로 무작정 처리했지만, 어쩌다가 덴마우스가 표적이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궁금증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마침 그녀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녀들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수고했어요, 남타르 님.”

“어, 너도 고생했어.”

“어라 어라, 말투가……?”

“그 얘기는 됐고. 우선 나한테 말해줄 게 있는 것 같은데.”

괴물의 시체로 난장판이 된 주위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요구했다.

스킬라는 멋쩍게 뺨을 긁으며 눈을 피했다.

분위기를 보아 아는 게 없어 보인다.

그럼 리스가 알고 있다는 건데, 그녀는 고뇌하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있는 전부를 말해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해.”

“네가 초조해질 정도라면, 예삿일이 아닌가 보군.”

“그럴 수밖에. …웬 불한당에게 삼목산이 통째로 흡수되게 생겼으니.”

보기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다.

무슨 일이 됐건 서둘러 움직이는 편이 좋겠다.

“간단하게 설명 부탁한다.”

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이름을 꺼냈다.

“엔릴, 그 자가 악마의 목에 송곳니를 내밀었어.”

“…엔릴이?”

“그래. 즉 자네의 과거 인연이, 자네의 발목을 붙잡으러 왔다는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귀찮아졌군.

* * *

눈송이 내리듯 동굴 천장 검은 깃털 한 개가 허공에 흔들거리며 떨어진다.

이내 공기가 폭발한 것처럼 깃털 수십 개가 흩날렸고, 그 중심에서 괴조가 날개를 거세게 휘저으며 발톱으로 초목 뱀의 비늘을 찢었다.

초목 뱀은 독을 품은 송곳니를 앞세워 추적하지만 괴조가 금세 어둠으로 숨어드는 탓에 닿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인안나가 치고 빠지고 엔릴은 방어에 열중했으니, 고대 초목 뱀과 마왕군 괴조의 전투는 일개 병사들이 보기에 언뜻 전투는 대등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특히 인안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초목 뱀의 독은 만물을 부식시키는 산성이다.

닿는 순간 살점은 물론이거니와 뼈도 형체도 남기지 않고 녹아내릴 터.

방어를 고수하는 엔릴이 공격 기회가 많았음에도 함부로 인안나를 물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날카로운 부리로 비늘을 쪼아댄들, 매섭게 추적하는 뱀 머리를 피해야 하는 탓에 어중간한 자세로는 제대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결국은 엔릴이 인안나를 봐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까아아악!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인안나가 이판사판으로 부리를 앞세워 돌격했다.

이른 아침 운무가 산꼭대기에 머물 듯 엔릴의 시야는 탁했으니, 필시 자신을 쫓지 못할 것이다.

판단이 끝난 인안나는 날개를 접어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고 속도를 높였다.

―끝이로구나.

하나, 엔릴은 오히려 일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곳 같은 부리를 몸을 비틀어 피하고, 순식간에 괴조의 몸을 옭아매며 똬리를 틀었다.

까아악! 까악!

서둘러 비늘에 갇힌 날개를 퍼덕이며 저항해봤으나, 두꺼운 뱀의 근육을 이겨낼 수 없었다.

―움직이면 아가만 다친단다. 이제 그만 포기해주련.

까아악. 까아윽.

날개가 안 되면 발톱이라도, 발톱도 안 되면 머리라도.

초목 뱀의 자비에 인안나는 온몸을 비틀어 반항했다.

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엔릴은 포식자의 눈을 감았다.

―아가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조금 아플 테니 참으려무나.

검은 형상의 괴조는 초목 뱀의 거대한 몸집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내 똬리를 조이자 살점이 짓뭉개진다. 비늘에 파묻힐수록 뼈가 뒤틀린다.

시야의 빛이 사라지며 숨통이 틀어막힌다.

이윽고 엔릴의 품에서 발버둥 치던 인안나는 죽은 듯 잠잠해졌다.

―고생했구나. 아가의 노력은 할미에게 충분히 전해졌단다.

뱀이 똬리를 풀자, 그 속에서 괴조가 날갯짓 한번 못하고 추락했다.

쓰러진 채 인간 형상으로 돌아가는 인안나.

“장군님!”

딜문 병사들이 달려가 그녀를 챙겼다.

“괜찮으세요?!”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텐덜의 물음에 인안나는 반대로 뒤틀린 팔을 가리켰다.

“일단 뼈를 맞출게요. 조금 아프시더라도 참아주세요.”

“끄윽… 치료받을 시간 없어…. 당장 저 년을…….”

“장군님. 아니, 인안나 님… 일단 치료를 받아주세요.”

슬픔을 억누른 부하의 부탁에 인안나는 일어서다 말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할미의 청을 받아줄 마음이 생겼니?”

나체로 허탈하게 앉아 있는 그녀와 달리, 엔릴은 어느새 옷을 입고 단추까지 채운 상태였다.

“이제 여아가를 불러주겠니? 그리고 부디 이번엔 몸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 아이까지 다치면 할미는 물론이고, 삼목산 아가들도 슬플 것 아니니.”

“…짜증나는 년.”

우아한 손짓과 고고한 자태, 자애로운 제안과 여유로운 목소리에 인안나는 패배를 깨닫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막무가내로 버티면 이번엔 자신이 아닌 부하가 다칠 것이다.

나머진 언니에게 맡기는 수밖에.

엔릴과 이르칼라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으나, 부디 마족의 자멸만큼은 피하기를 기도하며 인안나는 길을 열어 주기로 했다.

“언니는 안에 있…….”

“웬 놈이냐!”

하지만 인안나의 허락이 떨어지려던 찰나, 초목 뱀 던전의 소란에 묻혔다.

“정체를 밝혀라! 웬 놈… 끄으악!”

딜문의 존재하는 시선이 우르타에 비명으로 쏠린다.

우르타의 팔목을 비틀고 제압하고 있는 존재.

남타르를 확인하곤 인안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새끼, 늦지 않게 오라니까.”

* * *

간단하게 무슨 상황인지만 듣고 최대한 빠르게 뛰어왔건만, 이미 초목 뱀 던전은 딜문에 도착한 상태였다.

열댓 명밖에 안 되는 딜문 병력과 비교해 초목 뱀 던전은 족히 300명은 넘어 보였다.

뭐 이렇게 많아.

“…쟤는 누구야?”

어느 병사가 발소리를 듣고 내 존재를 눈치챘다.

그의 한마디 의문을 시작으로 초목 뱀 병사들이 하나둘씩 나를 쳐다본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이것들이 멋대로 쳐들어와 놓고선 정체를 밝히라니 무례하기 짝이 없다.

물론 나를 모르고 한 소리겠지만.

어찌 됐건 이들을 돌파하고 서둘러 딜문으로 가야 한다.

“나는 남타르, 이르칼라의 두 번째 걸작이다.”

정체를 밝히며 한 발짝 내디딘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그녀의 이름을 듣고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본다.

내 목적지가 딜문인 이상, 진실과 거짓은 금방 밝혀진다.

이를 깨달은 병사들은 황급히 겨누고 있던 무기를 거뒀다.

“기, 길을 열어라.”

후방에서 시작된 명령이 부대에 전달된다.

대화가 안 통하면 무력행사로 돌파하려 했는데 그들이 현명해서 다행이다.

나는 초목 뱀 부대 사이를 거닐며 딜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이마에 흉터가 있는 녀석이 나를 보곤 얼굴을 구겼다.

“웬 놈이냐!”

다짜고짜 목에 검을 들이미는 마족.

척 봐도 말 많은 녀석이다. 그냥 제압하는 편이 빠르겠군.

“정체를 밝혀라! 웬 놈… 끄으악!”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쥐고 있던 검은 떨어지고, 검날 앞으로 그가 무릎을 꿇었다.

“엔릴 님을 생각해서 죽이진 않으마. 대신 그 버릇은 고쳐라.”

그에게 조언을 남기며 손을 놔줬다.

검 끝이 향한 곳이 나니까 봐주는 거다.

훔바바, 혹은 라마슈투였으면 문답무용으로 척추가 끊어지거나 머리가 불탔을 것이다.

“크으윽…….”

손목을 감싸 쥐고 쓰라린 신음을 삼키며 나를 노려봤다.

나는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들에게 향했다.

“…새끼, 늦지 않게 오라니까.”

인안나가 쓴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팔이 완전히 돌아갔군. 엔릴과 싸웠지만 패배한 건가.

물론 그 무식하게 거대한 뱀과 싸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게다가 내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준 것 아닌가.

그녀에겐 감사할 따름이다.

“미안, 덴마우스에 있는 괴물들을 처리하느라 늦었어.”

“아, 그래서 늦었냐. 그럼 빨리 와줘서 고맙다고 해야겠네, 하하.”

팔이 돌아갔건만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인안나는 나를 바라보며 멋들어지게 웃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 곁에 있던 텐덜에게 시선을 던졌다.

“텐덜, 치료를 부탁해.”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넋이 나간 듯 나를 멀뚱히 쳐다보던 텐덜은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인안나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다행히 인안나 말고는 다친 녀석들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그녀는 텐덜에게 맡기기로 하고.

“분위기가 많이 바뀌셨습니다, 엔릴 님.”

나는 엔릴을 상대하면 된다.

“그건 할미가 하고 싶은 말이란다,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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