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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190화 (190/384)

190화

이무기 (6)

땀과 애액투성이로 엔릴을 만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호수지형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옷을 챙겨 입은 뒤 딜문으로 향했다.

여러 막사 중에서 텐덜이 말해준 곳으로 찾아가자, 엔릴이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다리를 꼰 채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걸고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그녀를 노려보는 인안나.

자세도 표정도 완벽하게 동네 불량배와 일치했다.

하지만 험악한 분위기에 비해 엔릴은 손녀를 바라보듯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재자 없이 담소 나눌 정도로 둘이 그렇게 친한 줄은 몰랐는데.”

그녀들의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고자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인안나가 헛웃음을 뱉었다.

“암, 친하고말고. 서로 머리채 잡고 싸우다가 다음날 술 한잔하면 없던 우정도 생기는 법 아니겠냐. 그렇지, 썅년아? 언제 술이나 한잔하자?”

“얼굴만큼 하는 말도 정말 예쁘게 하는구나. 맞는 말이란다, 지난날의 악연은 잊고 할미와 함께 새로이 인연을 맞이하자꾸나.”

“…나 맥이는 거 맞지? 빙빙 돌려서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거 맞지?”

빙빙 돌려서 맥이는 건 먼저 했으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엔릴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와주러 돌아왔다는 건, 산하의 병사들 설득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동맹 관계에 대한 확답을 받으려고 물었으나, 엔릴은 대답 없이 쓴 미소를 보냈다.

보아하니 잘 안 풀렸나 보군.

그녀의 입술이 비련하게 떨리는 걸 보고 인안나가 폭소를 터트렸다.

“아이고, 그럼 그렇지. 마왕군도 아닌 년이 나댈 때부터 알아봤다. 힘이 있으면 뭐 해 권위가 없는데. 넌 그렇게 덩치가 크면서 코딱지만 한 부하들도 다스리지 못하냐?”

“아가의 말이 백번 맞단다. 어리석은 할미의 그림자를 걷기에 초목 뱀 아이들은 너무도 현명하더구나.”

“그렇겠지. 애초에 산골짝이 노인네가 마왕군의 규율을…….”

“하지만 아가야, 이것만을 알아주렴. 할미는 그 아이들의 앞을 걸으며 화살받이가 돼줄지언정, 머리 위에 서서 실을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빛을 잃고 탁한 안개가 내려앉은 눈동자로 엔릴은 강인한 의지를 표출했다.

이를 보고 인안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더니.

“웬 노인네가 연민에 휩쓸려 마왕군을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이내 활짝 웃었다.

“…그것뿐만은 아니었나 보네.”

분노를 유도하면서 엔릴을 시험했던 건가.

인안나도 여전하구만.

“그래서 엔릴 님한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 인안나?”

“우리 문제에서 손 떼고 노인네는 산에서 약초나 캐라고 하려 했지.”

“좋은 제안이군, 초목 뱀 던전의 병력을 이양받을 수 있는.”

“뭐, 그건 안 될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인안나는 테이블에 두 발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삼목산과 초목 뱀이 손을 잡았다지만, 동맹 세력을 늘리는 건 물론이고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가는 어찌 그리 생각하니. 할미는 검을 부딪치는 것보단 악수로 화합을 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단다.”

“팔 부러트린 년이 잘도 말하네…. 각국에선 이미 던전의 존재를 어렴풋 눈치챈 상태야. 짧은 몇 달, 길면 일이 년 내로 대규모 병사를 파견할 테고 힘없는 던전은 속수무책으로 격파당하겠지.”

“우리 육신에 흐르는 피는 다른 종족과는 차원이 다르단다.”

“내가 말했던 것도 용사나 영웅이 안 움직였을 때 이야기야. 우리들이 컬랩스를 한번 뒤집어 놔서 그 새끼들이 쫄아가지고 수도에 짱박혀 있는 거지, 이판사판으로 쳐들어온다면 순혈들도 장담 못 해.”

왕국의 영웅, 운드와 수차례 전투를 치렀던 인안나는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으리라.

순혈을 중심으로 규합한 마왕군이 던전에 숨어 반항한들, 그들의 힘과 국가의 병력이 합을 맞춰 공격한다면 전멸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으려는 것이다.

“그녀 말이 맞습니다. 송판마냥 한 장씩 깨질 바에 차라리 한 곳에 겹겹이 쌓아 버티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엔릴 님도 저희를 힘으로 설득하러 온 것 아닙니까.”

“할미는 그저 목소리를 모아 평화를 주장하려…….”

“그럼 이제 그딴 건 불가능했다는 걸 알게 되셨군요.”

일부로 탓하듯 엔릴을 다그쳤다.

그러자 납득했는지 그녀도 고개를 떨궜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들었으니, 이참에 하던 이야기를 끝내 둬야겠다.

“전에 듣기론 순혈들은 마왕이 되기 위해 던전을 구축했다고 하던데, 정확히 어떻게 마왕이 되는 거야?”

인안나에게 묻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장난스럽게 놀리던 발을 땅에 떨어트렸다.

“성물한테 인정받으면 돼.”

“…무척이나 추상적인 대답이군.”

“그게 사실이니까. 더 자세히 말하자면, 보옥이란 성물을 다스릴 수만 있으면 누구든지 마왕이 될 수 있어.”

“성물? 그러면 보옥은 동굴에 있는 성배와 똑같은 건가?”

인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이어간다.

“먼 옛날 신이 창조한 무기를 손에 넣으면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흔히 있는 레퍼토리잖아. 그로 인해 성녀도, 마왕도… 그리고 영웅도 탄생할 수 있던 거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겠군. 순혈 정도는 돼야 그 힘을 다스릴 수 있을 테지.”

“아니. 초대 마왕이 무식하게 강해서 가능했던 거지, 웬만한 순혈은 손에 쥐면 육체가 터지거나 정신이 무너질 거야.”

문득 인안나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언니가 차기 마왕으로 손꼽히는 거고.”

“이르칼라가?”

“그래. 평범한 인간은 가까이 있기만 해도 머리가 헤까닥 하는 성배를 동굴로 가져온 걸 너도 봤잖아. 게다가 우리가 미치지 않도록 봉인까지 해줬고.”

그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봉인이었던 건가.

하긴 성녀의 끔찍한 기행을 따져봤을 때 성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소문만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와해되지는 않았을 텐데…….”

사약을 마시듯 인안나는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르칼라의 소문이라,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마음을 고치고 곧장 입을 닫았다.

정확히 모르지만 성물을 다스릴 정도의 힘이 있음에도 마왕군이 기피할 정도면 소문이 더없이 나쁘다는 건 알 수 있다.

“어찌 됐건 마왕군을 모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 말하자 그녀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찾아가도 그 새끼들은 콧방귀 뀌면서 쫓아냈어.”

“그렇단다, 아가. 할미도 갖은 노력을 다했건만 돌아오는 건 비난과 거절이더구나.”

그녀들답지 않게 반포기 상태로군.

아무래도 대화로 해결하는 데 실패해서 무력해진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겠지.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걸.

“말이 안 통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야겠지.”

“…힘으로 굴복시키겠다?”

인안나가 탐탁지 않게 물었다.

엔릴도 말은 안 하지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동족에게 송곳니를 들이대기 싫을 테고, 마왕군에게 발톱을 뻗는 게 꺼림칙할 테지.

그렇다고 더는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힘이라면 그들 앞에서 증명하면 돼. 누가 왕좌에 앉을 권리가 있는지를. 원시적이지만 또 이만한 것도 없지.”

인안나는 이빨로 입술을 뜯더니, 갑작스레 나를 빤히 노려봤다.

“언니를 마왕으로 만들 속셈이야?”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르칼라만 한 적임자는 없어.”

“지금도 나 몰라라 하는데 과연 마족 책임지려고 할까?”

“그러니까 설득해야지. 마왕이 되어달라고, 또 마족을 이끌어달라고.”

“누가? 네가? 나도 마음을 못 돌렸는데 할 수 있겠어?”

나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걱정 마. 그보다, 던전의 위치를 준비해줘. 덴마우스 건만 정리하고 내가 직접 설득하러… 아니지, 증명하러 갈게.”

인안나는 대답 없이 한참을 쳐다봤다.

그리고 포기하듯 고개를 떨궜다.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혼자 결정하는 건 용납 못 해. 적어도 아사쿠랑 사냥꾼을 데려와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자고.”

언뜻 나의 독단적인 행동을 견제하는 걸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홀로 짐을 떠안는 걸 걱정하는 것이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불현듯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라마슈투, 그 막무가내를 설득해줘.”

갑작스럽게 화두로 떠오른 라마슈투.

하나, 구태여 듣지 않아도 인안나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그녀와 끝장을 보려고 했다.

나는 말없이 엔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와 엔릴은 덴마우스를 찾아갔다.

은행으로 향하는 하수구 비밀통로를 벗어날 때쯤, 불현듯 그녀가 내 옷깃을 잡고 멈춰 세웠다.

“잠깐 지상을 둘러봐도 괜찮겠니?”

나는 거절하려 했다.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덕분에 마족의 뿔은 가렸지만 눈에 띄는 미모는 숨기지 못했다.

게다가 아사쿠와 리스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담은 목소리를 듣고 어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여자에게 약하단 소리를 한 그 녀석의 조롱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광장으로 가 근처 벤치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랜 시간 광장에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엔릴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여아가의 손길이 닿은 것치곤 무척이나 평화롭구나.”

동감한다.

괴물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고양감이 덴마우스에 활기를 가져온 것도 있지만, 이르칼라의 수하가 지배하는 도시치고는 이질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사쿠는 빌어먹을 자식이지만, 상회 놈들보단 훨씬 나은 녀석이거든요.”

“…그렇구나. 하나, 아가의 친우가 그린 아름다운 그림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구나.”

“시대가 이러니까요.”

엔릴의 하소연대로 평화로운 덴마우스엔 마족의 존재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가 동굴에서 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마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힘이라면 누군가는 증명해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할미는 속으로 몇을 고뇌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더구나.”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평화주의자니까요.”

그녀는 얌전히 두 손을 무릎에 올렸다.

“할미는 이런 부질없는 목소리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말씀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우리와의 동맹을 파기하겠다는 겁니까?”

“우르타란 아이는 당장 여아가의 목을 거두라 말했지만… 할미는 오히려 아가들을 가까이 두고, 노인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관철하고 싶구나.”

“대단하시군요.”

엔릴은 벤치를 두드리며 앉으란 제스처를 취했다.

거절할 필요 없기에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약속하마. 만약 아가들의 뜻이 옳았고 노인의 옹고집이 틀렸다면, 할미는 여아가의 종이 되겠다. 그뿐만 아니라 남타르의 손과 발, 검이 되어 움직이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방법이 없지 않니. 평화를 이룩하는데 목소리가 아니라 피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어주겠다.”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리셨군요.”

“이곳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어쩌면 할미가 보았던 과거를, 이곳에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며 엔릴은 손바닥을 펼치고 따스한 햇볕을 만끽했다.

“부디 보여주렴. 선악을 떠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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