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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191화 (191/384)

191화

이무기 (7)

간단히 산책을 끝내고 은행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쪽 상황이 상당히 기묘했다.

아사쿠와 릴리프가 테이블에 쌓인 괴물 재료를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고, 그 광경을 새드너스가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보고 있다.

리스와 스킬라는 자리에 없군.

괴물 문제로 아직도 씨름하는 건가.

내가 그녀들의 부재를 신경 쓰고 있더니, 아사쿠는 뒤늦게 나를 눈치채고 벌떡 일어섰다.

“오, 이게 누구신가. 내가 존경해 마다치 않는 둘째 아니신가.”

“집어치워.”

아사쿠가 건넨 악수를 쳐냈다.

“그리고 그딴 말투는 너한테 안 어울려.”

“이런 아쉽네. 나름 과거의 둘째를 따라 해본 건데, 하하하.”

그는 손등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릴리프 양에게 들었어. 제법 만족스러운 휴가였던 것 같던데.”

“내겐 과분할 정도였지. 그리고 소득도 있었고.”

“소득이라면, 이단 심문관의 도끼를 말하는 거야?”

“아니, 괭이질 쥐는 법도 다시 배웠어.”

“하하하, 그거 다행이네.”

소소하게 재회를 끝내고 아사쿠는 뒤에 있는 엔릴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엔릴 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엔릴이란다. 차림새만큼이나 예의 바른 아이구나.”

“과찬이십니다.”

그에겐 정말로 과찬이다.

겉으론 예의를 표하고 있으나 속으론 이용 가치를 판가름하고 있겠지.

능글맞게 중지로 안경을 치켜올리는 그를 놔두고 나는 동생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이상한 짓은 안 했어?”

“이상한 짓이라니, 오히려 무척 친절하게 맞이해주셨어. 오빠가 했던 악담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상하시던데.”

“얼굴에 철판 까는 게 저 자식 특기거든. 아무튼 너무 믿지는 마라. …근데 이것들은 뭐야?”

나는 눈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엔 우리가 가져온 사마귀 눈알뿐만 아니라, 새하얀 털이 수북한 다리라던가, 선홍빛이 남아있는 장기들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비위가 약한 녀석이면 기겁을 하고 도망쳤겠군.

“사마귀 눈 같은 몸에 좋은 걸 가져다 달라고 리스 님한테 부탁했어.”

“걔가 순순히 가져다줬다고? …아사쿠가 같이 설득해 줬나. 그런데 왜 모은 건데? 설마 너도 이상한 취미 같은 게 생긴 거냐?”

“아니거든. 난 그저 오빠를 생각해서 몸에 좋은 약을 달여주려던 것뿐이야.”

“릴리프, 제발 내가 잘못 들었다고 해주라.”

“오빠, 제대로 들었어.”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마귀 눈알에 있던 엑기스도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겼건만, 이번엔 괴물 파편으로 만든 잡탕을 마시라니… 마음은 고맙지만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다.

“릴리프 양은 천재야, 둘째.”

짜증을 유발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아사쿠.

“그녀는 약사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어. 사람의 육체가 받아들이기 힘든 괴물의 영양소를 갖은 방법을 통해 섭취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거야. 아직 이론 단계에 그치지만 그녀의 센스와 연구에 필수 불가결인 시간만 주어진다면 필시 게헨나 대륙을 뒤흔들 대발견을…….”

“쉽게 말해서 영양제를 만들었다는 건가.”

“하하하, 그보단 약물이라고 해야겠지.”

약? 약이라…….

그러고 보니 컬랩스를 빠져나올 때, 어느 용사에게 물약이란 걸 받았었지.

임시방편이었지만 릴리프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것 덕분이었다.

“혹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약을 고안한 거야?”

릴리프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걸 내 손으로 만들 수만 있게 된다면, 분명 오빠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혹시 괜한 짓 한 걸까?”

불안하게 묻는 릴리프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게 보탬이 되고자 물약이란 걸 떠올렸을 텐데 어찌 동생을 탓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기특하고 장하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일 벌여봐.”

나에겐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만들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금전적인 부분은 아사쿠가, 괴물에 관해서는 리스가 도와줄 것이다.

“고마워, 열심히 할게.”

“넌 내 동생이니까 뭘 해도 잘할 거야.”

진심을 다해 릴리프를 응원했다.

하나, 제일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하지만 그 몸으론 무리야. 우선 네 명줄을 붙잡고 흔들던 병마를 떼어내야 돼.”

“당연히 없애고 싶지만 우린 계속 실패했잖아. 그래서 괴물 시체를 먹으면서 버티는 거고…….”

“괜찮아. 아직 마지막 방법이 있어.”

릴리프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삼목산으로 돌아가 이르칼라에게 부탁할 거야, 너를 고쳐달라고.”

“오빠가 말했던, 그분한테…? 하지만 그분은…….”

“두려운 것도 이해해. 분명 치료도 지옥을 나뒹굴 듯 고통스러울 거야. 그래도 꼭 받아야 돼. 그런 몸으론 뭘 해보기도 전에 쓰러질 테니까.”

걸작들처럼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원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 앞길에 방해되지 않도록 병마와 결착을 내란 소리다.

내 뜻이 전해졌는지 릴리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치료받을게. 그리고 버틸게.”

결심이 느껴지는 눈동자.

언뜻 나와 엇비슷해 보이지만,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인했다.

불현듯 우리를 지켜보던 아사쿠가 손뼉을 쳤다.

“남매의 감동적인 결의에 눈물이 날 것 같아.”

“비꼬지 마.”

“하하하, 진심이야. 그나저나, 둘째의 용건은 릴리프 양뿐만이 아닐 텐데?”

아사쿠의 재촉에 못 이겨 나는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너와 리스는 나와 같이 딜문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회의가 있나 보네. 그런데 덴마우스를 놔두고 갈 수는 없어.”

“네가 동굴보다 덴마우스를 우선시할 줄은 몰랐는데.”

“중요 요충지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는 쓰게 웃으며 변명했다.

이 녀석도 나름 이곳에 정이 많이 들었나 보군.

“마음은 이해하지만 돌아가야 돼. 게다가 너, 괴물을 막을 때 쥐를 대부분 잃었잖아. 눈에 의지하는 녀석이 시야를 잃었으니, 이곳에 남아봤자 얼마나 힘을 쓰겠어.”

“하하하, 뼈아픈 지적이네.”

쥐를 잃은 아사쿠는 내가 덴마우스에 도착한 지도, 또 집무실까지 들어온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무방비한 상황에서 그를 홀로 둘 수는 없다.

적어도 쥐를 모을 때까지만 동굴에 숨어있는 게 낫다.

“괴물 문제는 엔릴 님과 스킬라가 처리해 줄 거야.”

“그러면 일단 안심이네. 알았어, 둘째 말대로 잠시 동굴에 몸을 숨기도록 할게. 그럼 덴마우스가 나 없이 작동하는지 확인할 겸, 남은 문제는 새드너스와 랫더미에게 맡겨볼까.”

그의 말에 나는 새드너스를 힐끔 확인했다.

노려본 것도 아닌데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시선을 피했다.

“아직도 낯을 가리는 건가. 조금 나아질 줄 알았건만.”

“한번 찢어진 마음은 쉽게 고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래도 걱정할 것 없어.”

아사쿠는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을 이어간다.

“새드너스는 잘할 거야.”

괴물의 동태를 정찰하러 갔던 리스와 스킬라가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삼목산으로 돌아가려 했다.

은행 관리는 새드너스에게 부탁하고, 덴마우스 내정은 랫더미에게 맡기는 걸로 합의하고 복귀 준비를 끝마쳤다.

스킬라가 치근거리는 걸 간신히 떼어내고 마차에 오를 때쯤, 문득 엔릴의 시선이 발목을 잡았다.

“아가, 할미의 조언을 부디 잊지 마려무나.”

“알겠습니다. 라마슈투에겐 제가 잘 말해두죠.”

덴마우스로 오면서 들었던 엔릴의 조언을 되새기며 마부석에 앉았다.

그렇게 아사쿠와 리스, 릴리프와 나는 삼목산 딜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음 단단히 먹어.”

“…응.”

나는 릴리프를 이르칼라에게 데리고 갔다.

뒤에서 리스가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애써 외면하며 발걸음을 내디딘 끝에 주인의 방에 다다랐다.

내가 돌아왔을 당시엔 피로 얼룩진 쓰레기장이었건만, 텐덜이 그새 정리를 끝냈는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서 와. 웬일로 빨리 돌아왔네.”

그 청결하고 불온한 어둠 속에서 이르칼라는 침대 앉아 고혹적인 사악함을 풍기며 우리를 맞이했다.

“그 애가 남타르 동생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릴리프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남타르가 내 얘기를 해줬다구? 그 진득하고 끈적한 로맨틱 스토리를? 어머나, 부끄러워라.”

“…네, 네.”

뺨은 첫날밤 연인처럼 새빨갛게 달구고 입으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내뱉는 이르칼라를 보고 순간 릴리프가 벙쪘지만,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간신히 대답했다.

말했잖냐, 대단히 미친년이라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동생을 데리고 왜 나를 찾아왔어? 상견례라도 하려구? 남타르의 애처를 드디어 가족에 소개하려는 거지?”

“그럴 리 있겠냐.”

“칫, 그럼 왜 데리고 왔냐구.”

나는 이르칼라에게 한 발짝 내디뎠다.

“릴리프는 지병을 앓고 있어. 그걸 고쳐줬으면 해.”

“아, 그런 거구나. 나를 이용해서 어여쁜 동생의 생명을 연장하겠다?”

이르칼라는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그런 건 부탁할 필요도 없어. 그냥 하라고 명령만 하면 남타르바라기인 나는 별말 않고 바로 해줬을 거야.”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는군.”

“자비로운 내가 어찌 남타르의 소중한 가족을 외면할 수 있겠어.”

침대에서 일어난 이르칼라는 릴리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등으로 뺨을 한번 훑더니, 코끝으로 목덜미의 냄새를 향유했다.

“예전 생각나네. 나에게 물들기 전의 남타르도 너처럼 귀엽게 떨고 있었지. 역시 가족은 가족인가 봐.”

갑작스럽고 기이한 행동에 의젓하던 릴리프의 표정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공포가 떠올랐다.

“적당히 해. 무서워하잖아.”

나는 이르칼라의 손짓이 성추행으로 바뀌기 전에 재빨리 낚아챘다.

“말이 너무 심한걸. 난 그저 귀여워해 주려는 건데. 그렇지, 남타르 여동생아?”

“…네. 오빠, 나는 괜찮아…. 이,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릴리프를 보며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떻게 만들어 줄까? 같은 핏줄이니까 남타르처럼 불사로 만들어줘?”

“그런 건 필요 없어. 릴리프는 평범한 인간이면 충분해.”

이르칼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재미없네. 알았어. 남타르의 바람대로 아주 평범하고, 아주 건강한 육체로 만들어 줄게.”

추악하게 침을 흘리며 건반 치듯 동생의 어깨를 두드린다.

“일단 어디가 아픈지 구석구석 진찰해야 하니까, 혈육이 박히는… 이 아니라 남사스러운 모습을 보기 싫을 테니 남타르는 자리를…….”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장난질을 멈추기 위해 나는 그녀를 다그쳤다.

“네년 피는 넣지 마.”

그 말을 듣고 이르칼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어느덧 마족의 얼굴에 장난기가 전부 사라졌을 때쯤, 녹슨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고개를 삐걱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걸 어디서? …엔릴, 그년이 말해줬구나?”

“그래, 너와 걸작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족쇄에서 해방되는 조건까지 알려줬어.”

“빌어먹을 년….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니었나.”

이르칼라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뱉었다.

“비밀을 어둠에 잘 묻어놨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걸 맹인 년이 찾아낼 줄이야. 이거 방심했네.”

“고대 마족이 현세 마족의 술수를 모를 리 없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싫다면?”

“그땐 너도나도 끝이다.”

각오가 서린 경고를 듣고 이르칼라는 슬픈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릴리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넌, 정말로 소중한 존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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