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꼭짓점 (3)
열약하지만 그래도 던전은 던전이고, 보스는 보스답게 동굴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엔 탁한 물이 얼어붙어 뿌연 색의 얼음 장판이 깔려있고, 그 위로 한기를 막기 위해 짚 더미를 깔고 있었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짚 더미에 대짜로 누워있는 헤기르.
새하얗던 장발은 흙투성이였고, 입에서 흘러나온 침은 냉기에 얼어붙으며, 우리가 온 것도 모르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열약한 건 비단 던전의 환경만이 아닌 것 같군.
나도 꽤 많은 마족을 봤었지만 그녀만큼 방만한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르칼라도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청결을 신경 쓰건만.
“일어나, 잠탱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결국 인안나가 발끝으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싫어…….”
헤기르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기상을 거부했다.
마치 숙취에 찌든 주정뱅이가 아침을 맞이하는 꼴이다.
“일어나라고 했다. 애들 앞에서 마왕군 쪽팔리게 하지 말라고.”
더 격하게 흔들자 그녀도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눈곱 낀 눈꺼풀이 차츰 벌어지며 잠기운 섞여 있는 흑안이 우리를 확인한다.
“오지 말랬…….”
하품을 한번 내쉬고.
“…말랬잖아, 인안나. 나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분명 다시 온다고 말했었거든. 이제 와서 개무시하지 말라고.”
“겨울잠 자는 사람 깨우는 건 무시하는 게 아니야?”
“빡치기 일보 직전이니까 말대답하지 마.”
“여전히 독선적이네, 인안나는.”
“그리고 너, 애들 시켜서 날 공격하라고 했냐?”
“응. 귀찮아지기 전에 내쫓으라고 했지.”
“전 동료한테 잘도 그런 명령을…….”
“어차피 그 정도에 당할 애도 아니잖아.”
헤기르는 훤히 드러난 배를 긁으며 배시시 웃었다.
강함에서 비롯된 자심에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걸까, 아니면 천부적인 성격이 그런 걸까.
폭발 직전의 인안나를 앞두고 그녀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김이 피어오르는 인안나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다른 녀석들을 안 봐서 그래. 하나같이 권위적이고 냉혈한 녀석들이라고.”
“이르칼라같이?”
“…당연히 언니만큼은 아니지.”
“그럼 다행이군.”
“어쨌든 그 녀석들보단, 여기 있는 꼴통이 훨씬 나아. 게다가 웬만한 녀석들보다 훨씬 세기도 하고.”
그 말을 듣고 헤기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칭찬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부끄러워라.”
“비듬 떨어지거든. 그리고 침도 닦아, 백수 년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런데 문득 라마슈투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턱에 손을 짚고 헤기르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씻으면 먹을 만할 거 같아.”
분명 식인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성적인 뉘앙스로 먹는다는 말이겠지.
이 와중에 그런 걸 생각하는 라마슈투를 보고 나는 아이러니하게 웃었다.
“뭐, 본판은 좋아 보이니까.”
빗질로 까치집을 누르고 곳곳에 묻은 흙과 침을 닦은 뒤, 게슴츠레한 눈만 제대로 뜬다면 볼만 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본 여성 중에 흉부가 가장 거대했다.
아마 라마슈투도 저걸 보고 고민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랴.
우리는 그녀의 육체가 아닌, 힘을 원해서 찾아왔다.
나는 인안나와 교대하듯 그녀를 대신해 헤기르 앞에 앞장섰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다만. 괜찮겠나, 헤기르?”
그녀는 옆으로 누우며 머리를 괸다.
“마음대로 해, 남타르.”
“나를 이미 알고 있나 보군.”
“물론이지. 모르나 본데 남타르란 이름은 마족 사이에서 엄청 유명해. 이런 고산까지 이름이 들렸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소문으로 들은 나는 어떻던가?”
“솔직히 처음엔 관심 없었는데 듣다 보니 흥미로웠어. 컬랩스에 기습을 주도한 이르칼라의 심복, 그리고 그 여자의 첫 번째 성공작이잖아.”
“…그런가. 나를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편해지겠네.”
성공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지만 구태여 묻지 않기로 했다.
대화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을뿐더러, 헤기르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수 있으니까.
“지체할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좋아, 빨리 끝내 버리자.”
“헤기르, 삼목산으로 들어와라. 우리는 너의 힘이 필요하다.”
“싫어. 됐지? 잘 가.”
들어볼 생각도 없었나 보군.
헤기르는 겉으론 느긋해 보이지만, 그 안은 고산에 내려앉은 눈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이런 종류는 설득한다는 시도 자체가 귀찮다.
그래도 힘으로 굴복하는 것만큼은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둬야 한다.
한번 살살 자극해볼까.
“인안나에게 듣자하니, 너는 마왕군 중에서도 가장 특이했다고 하던데.”
“그랬었나? 워낙 예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는걸.”
“보병 부대에 속했지만 대부분 홀로 행동했다고 들었어. 실력에 자신이 있었나 봐?”
“마왕이 하도 부탁하길래 이름만 올려둔 거야. 실제로 마음 내킬 때만 나갔는걸.”
“출전 횟수가 과도하게 적긴 하지만, 네가 전장에 한번 발을 들이면 반드시 양손에 적장의 머리와 피비린내 나는 승전보를 들고 왔다고 했지. 이를 미뤄보아 비장의 카드 같은 느낌으로 움직인 것 아닌가.”
“그러면 뭐 해. 이미 마왕은 죽고 결국 마족은 패배했잖아. 다 끝났겠다, 그냥 여기서 잠이나 잘래.”
“마왕군의 사명을 어기는 건가?”
“사명? 마왕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원래 그런 귀찮은 거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혼돈의 중심지인 삼목산에 속하는 건 절대 사절이야.”
나는 팔짱을 끼고 헤기르를 지긋이 쳐다봤다.
거래의 서문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도록 그야말로 원천봉쇄를 하는군.
“이야기 끝난 것 같은데 다들 나가줄래? 난 이만 꿈나라로 가고 싶거든.”
헤기르가 졸리다는 듯 하품을 하면서 우리를 내쫓으려 했지만, 도리어 라마슈투는 그 말을 듣고 한 발짝 내디뎠다.
나는 등 뒤로 손을 내밀어 라마슈투를 멈추라고 지시했다.
무력행사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누누이 말했건만.
“아니면… 직접 입구까지 안내해 줄까?”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 속에 전의가 담겨있었다.
그녀도 라마슈투의 표정을 봤나 보군.
벌써 적대감을 가지면 곤란하다.
나는 서둘러 짧게 고개를 숙였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협박할 생각은 없었어.”
“그러면 됐어~”
금세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실 풀린 것처럼 웃었다.
힘으로 내쫓을 생각은 없다. 그것만 알면 충분하지.
“인안나, 라마슈투. 헤기르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어?”
“상관없지만… 괜찮겠냐?”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무용담은 너한테 지긋지긋하게 들어서 아니까.”
“알겠어. 가자, 라마슈투.”
인안나는 나를 믿고 곧장 대화의 장을 터주기로 했다.
그렇게 납득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라마슈투의 등을 떠밀며 그녀들이 떠나고, 나는 헤기르 앞에 앉았다.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 같은데, 정작 난 허락한 적 없는데?”
“그 정도는 이해해라. 나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아직도 설득이 먹힐 것 같아?”
“설득할 마음 없어. 그저 제안하려는 거지.”
얼음장에서 피어오르는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뇌를 적셨다.
“아무리 짚더미를 깔았다지만, 이런 곳에서 잘도 자는군.”
“의외로 시원한 게 좋거든.”
“그래도 안락한 잠자리를 원하지 않나?”
“에이, 설마 유치하게 삼목산이 더 따뜻하고 좋다 같은 말은 하지 않겠지?”
“잠이 쏟아지는 눈매와 달리, 혀는 총명하기 그지없네. 그래도 제안을 듣고 판단하는 게 어때?”
“…한번 해봐. 들어줄게.”
태평하게 허락하는 헤기르를 보고 나는 쓰게 웃었다.
인안나의 무용담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우리를 던전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우리를 시험하려는 것이겠지.
어디 나를 설득해 보라고, 아니면 힘으로 찍어 눌러보라고, 그리 말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주먹을 휘두를 생각 없다.
서로에게 검을 들이미는 순간 불필요한 피를 흘리고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까.
하물며 그녀 같은 종류를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네게 제안하마──.”
차근차근 헤기르에게 거래를 제시했다.
무관심했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검은 동공이 얼음장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해주는 거야?”
역시나 그녀는 넘어왔다.
애초에 헤기르는 이르칼라와 비슷하다.
겉으로는 장난스럽지만, 속으론 만물을 냉철하게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본능과 욕망을 중시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갈게. 가게 해줘.”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다.”
손을 내밀자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잡았다.
그리고 협박성 눈빛을 내게 던진다.
“대신 약속 지켜야 돼. 안 그러면 난리 피울 거야?”
“걱정하지 마. 너를 이용하려 드는 걸작과 인안나는 내가 사전에 제지할 거니까.”
“그거 좋네. 좋네 좋아.”
나는 헤기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이젠 던전도 아니라 그냥 동굴이겠군.
서리 곰이 겨울잠을 보냈던 동굴.
“어땠어? 잘 끝났냐? 오겠대?”
동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안나는 나를 보고 부리나케 달려와 물었다.
“뺀질거리는 혓바닥을 세차게 놀렸지.”
“그 말은, 성공했구나?!”
“주변 정리를 끝낸 후에 삼목산으로 오겠다고 했어.”
“장하다, 뺀질이 새끼야!”
인안나가 도약해서 목에 팔을 걸었다.
기뻐하는 건 좋은데 제대로 칭찬해주면 안 되냐.
“어떻게 한 거야? 가슴 마족… 그년도 한 고집하던 것 같던데.”
라마슈투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속세를 피해서 홀로 느긋한 삶을 보내고 싶다는 걸 내가 도와주기로 했어.”
…뭐, 일단은 그렇게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욕망에 충실하되, 어리석은 자는 결코 아니다.
이렇게 결코 쉽게 풀릴 리는 없다.
* * *
“삼목산으로 가시겠다니 그 말이 사실입니까, 헤기르 님?!”
창을 던졌던 병사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짚 더미에 머리를 파묻은 채 엎드리고 있던 헤기르는 얼굴만 들어올렸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입 주변에 달라붙은 짚을 치우고, 그곳에 새하얀 미소를 그렸다.
“응.”
“어째서요? 이제 귀찮은 곳엔 쳐다도 보지 않는다면서요. 설마… 본격적으로……?”
“양털 침대 준다고 했거든.”
“…예? 침대요?”
“그래! 구름 위에 누운 듯한 폭신폭신한 양털 침대! 거기에 잔잔한 물살이 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비단 이불에 베개까지 준댔어. 그리고 기분 좋은 숙면을 위해 아로마 향도 피워주고, 이부자리도 매일 교체해주면서 몸도 씻겨준다잖아. 상상만 해도 완전 지상낙원이야.”
게으름에 전력을 쏟아붓는 헤기르를 향해 병사들은 일동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약속은 어떻게 할 겁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배신자로 낙인찍혀 더없이 귀찮아질 겁니다.”
헤기르는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약속을 지킬 거야. 근데, 전력을 다하라고는 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짚 더미에서 일어서더니,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스리슬쩍 귀찮은 일을 정리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