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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197화 (197/384)

197화

꼭짓점 (4)

헤기르와의 거래를 마치고 우리는 다음 던전, 양조장으로 향했다.

고산을 넘어 북서쪽으로 향하면 보이는 왕국과 제국의 국경선에 부근에 있는 초원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창공을 주파한 끝에 어느덧 푸른 평원이 보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제국과 왕국의 병사들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마족과 전쟁 중이라 국경선 쪽은 한적했다지만, 혈투가 끝난 지금은 필시 국토 경쟁을 위해 서로를 견제하느라 병사들이 몰려있을 걸로 예상했건만.

타협점이라도 발견한 걸까, 아니면 서로가 국경을 포기한 걸까.

국경을 구분 짓는 양국의 막사조차 보이지 않았음에 나는 기이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봤자 제대로 된 답을 낼 수는 없겠지.

일단 양조장 던전의 보스, 닌카시를 설득하는 데 집중하자.

인안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평야에 착지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여기 옷.”

“오냐, 고맙다!”

내가 옷을 건네자, 소풍을 앞두고 상기된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날개가 걸리는지도 모르고 재빨리 옷을 입었다.

“좋아! 빨리 들어가자고!”

묘하게 들떠있는 목소리로 우리를 안내하는 인안나.

신날 수밖에 없겠지. 그도 그럴 게 닌카시는 제일 친한 친구라고 했으니까.

그뿐만이랴, 수십 차례 전장에서 등을 맡겼던 든든한 전우라고도 그녀를 치켜세웠다.

인안나가 하늘에서 적들의 머리를 쪼아댈 때 닌카시가 지상에서 적군의 육체를 집어삼키는, 일종의 우정으로 다져진 타 부대 간의 협력관계라고 할 수 있다.

“던전은커녕 입구조차 안 보여. 잘못 온 거 아니야?”

라마슈투가 광활한 초원을 둘러보며 묻자, 인안나는 콧대를 한껏 들어 올렸다.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닌카시가 날라리처럼 생겼어도 의외로 똑똑하고 세심한 녀석이니까. 분명 라마슈투뿐만 아니라 적군도 여기에 던전이 있다는 건 절대 모를걸.”

“그 마족도 예뻐?”

“당연하지, 좀 무섭게 생겼지만.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먹으려고.”

“…어째 너도 남타르랑 비슷해지는 것 같다.”

괜히 내가 욕을 먹는군.

하물며 나는 라마슈투처럼 여자를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이 갖은 목적을 가지고 내게 접근한 거지.

“그래서 어딨는데?”

성격 급한 라마슈투가 재촉하듯 물었다.

하나, 인안나는 친구 만날 생각에 발걸음을 놀리기 바빴으니 하는 수없이 내가 대신 답해주기로 했다.

“밑이야.”

“…밑?”

나무도 바위도 없는 보는 이가 시원해질 정도로 탁 트인 초원이다.

이런 곳에 건물을 지어 방어한다면 금방 눈에 띄고 금세 격파당한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깨끗한 들판을 이용한다면 사람들은 마족이 숨어 있다고 의심조차 못 할 것이다.

정확히는, 들판 밑의 땅굴에 숨는다면 말이다.

쿵!

불현듯 거대한 금속이 내려앉는 소리가 앞쪽에서 들렸다.

우리가 앞장섰던 인안나에게 다다를 때쯤, 어느새 문이 열린 것처럼 지하로 통하는 들판이 열려있었다.

숨어 있던 던전이 개방되고, 그곳에서 병사들이 몰려나와 길을 표시하듯 양옆으로 줄지어 섰다.

그리고 유유히 그사이를 걸어 나오는 그녀.

금은보화를 연상케 하는 윤기 넘치는 금발, 파충류의 눈동자처럼 주홍빛 보석 사이의 날카로운 동공, 땅에 맞닿아 있는 허리 뒤의 붉은색 꼬리, 중요 부위만 가린 자유분방하고 노출도 높은 가죽옷.

마치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을 했다면 바로 그녀, 닌카시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인안나를 노려보다니, 이내 입술을 활짝 벌리고 상어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이게 누구야?! 쪼그맣고 건방진 까마귀 아니야?!”

“잘 지냈냐?! 술독에 빠진 빌어 처먹을 도마뱀 년아!”

오랜만의 재회에 기쁜 나머지 인안나가 달려가서 닌카시를 껴안았다.

그러자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인안나를 들어 올린다.

“캬하하하,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네?!”

“내가 뒤지길 바랐냐, 망할 년아!”

“그건 그렇고 여전히 작구만! 키 좀 크라고, 꼬맹아!”

“네 기다란 다리를 잘라다가 이어 붙이면 되겠네!”

마음의 벽이 없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녀들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웃으며 서로를 모욕했다.

아무리 애증의 사이라도 저렇게 증오가 서린 말은 안 하지 않나. 알다가도 모르겠군.

닌카시는 인안나를 내려주고 어깨에 팔을 걸쳐 친근감을 표현했다.

“오랜만에 한판 뜰까? 때마침 어제 발효가 끝났거든.”

“발효가 끝났다니, 설마 드디어 완성된 거야?”

“그렇고말고, 아주 맛있는 녀석으로 만들었지. 그 쪼끄만 콧구멍으로 어떻게 술 냄새를 맡았는지, 넌 운도 좋다니까.”

“날 제대로 골랐네! 칭찬할 게 양조 재주밖에 없는 네 술을 내와 봐. 잘 만들었는지 맛봐줄게.”

닌카시는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웃다가, 드디어 나와 라마슈투를 눈치채고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들이 걔들이냐?”

“맞다, 정식으로 소개해줘야지.”

드디어 인안나는 당초의 목적을 떠올리고 그녀를 우리에게 데려왔다.

“여기는 닌카시, 딜문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빌어먹을 친구 년이야.”

“잘 부탁한다, 꼬맹이의 빌어먹을 친구 년이야.”

인사말보다 별명이 더 길군.

“그리고 여기는 남타르와 라마슈투, 전에 말했던 내 동료.”

“남타르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다.”

내가 악수를 건네자, 그녀는 곧장 손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무척이나 터프하군.

“네가 말로만 듣던 이르칼라 님의 오른손이구나! 잘 부탁한다, 마왕군 제2보병 부대 대장 닌카시야. 그리고 이쪽이…….”

그녀는 손을 거두고 라마슈투에게 뻗었지만, 채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허공에 맴돌았다.

“윽, 정말 운드 그년을 빼다 박았네…….”

“난 운드가 아니야.”

“알고 있어. 그런데 얼굴만 봐도 그년한테 박혔던 옆구리가 시린 걸 어떡하냐.”

그녀는 고통을 억누르듯 오른쪽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달랬다.

“어쨌든 잘 부탁한다, 라마슈투.”

“응. …너도 먹을 만하네.”

“어? 먹을 만하다니?”

라마슈투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그녀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네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혹시 시간 되나?”

“…아, 그것 때문에 인안나가 너희를 데리고 찾아왔구나.”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진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 우리의 목적을 눈치챈 것 같다.

이야기 진도가 빨리 지겠군.

“당장 얘기를 나누고 싶다만.”

“캬하하하, 싫거든.”

“바로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인안나는 네가 말이 통하는 녀석이라고 했건만 착각이었나?”

“물론 다른 녀석에 비하면 나 정도는 양반이지. 그래도 나와 동등한 시선에서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위치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 쉬워서 다행이야.”

대화하기에 앞서 힘을 증명하는 일은 강자들 사이에서 으레 있는 일 아닌가.

라마슈투도 똑같이 예상했는지 각오를 다지고 전투를 준비했다.

“캬하하하, 그런 거 아니니까 주먹에서 힘 빼.”

갑작스레 닌카시가 우리의 어깨를 때리며 특이한 웃음소리로 맴돌던 긴장감을 풀었다.

그리고 인안나도 그녀와 같이 웃었다.

“닌카시는 술이 없으면 이야기 안 해. 증명이란 것도 술을 어느 정도 마시는 건지 묻는 거야. 그야말로 술에 미친년이지.”

“캬하하하, 인안나 말이 맞아. 그런 지루한 이야기를 어떻게 술 없이 버틸 수 있겠어.”

나는 안심하고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니, 보기와는 다르게 풍류를 추구하는군.”

“뭐라는 거야. 풍류라고? 캬하하하, 내가 그런 쓰잘머리 없는 낭만을 바랄 것 같냐. 난 말이야, 상대방을 찢어 죽이는 추잡하고 난폭한 술 파티 아니면 자리에 앉지 않아.”

“그 말인즉슨, 술 대결인가.”

“바로 그거야!”

닌카시는 주먹을 번쩍 들었다.

“술통에 코 박고 다 같이 죽는 거야!”

그녀의 선포에 대기하고 있던 목석같은 병사들이 동시에 함성을 내질렀다.

광활한 초원이 요동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닌카시가 검지를 치켜들어 나를 삿대질한다.

“이르칼라 님의 오른팔로서, 그리고 인안나의 동료로서 깜냥이 있는지 내가 시험해주마.”

나는 내심 던전 이름을 왜 하필 양조장으로 정했는지 의아했었다.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던전 안을 확인하자 부질없는 의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닌카시의 던전은 말 그대로 양조장 그 자체였다.

여러 크기의 술통이 일렬로 줄지어 서 있고, 그 중앙엔 강철로 만들어진 양조 기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로군. 아마도 저기서 술을 만들겠지.

그런데 양조장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포도향 대신, 오히려 익숙하면서 친근한 보리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포도주가 아닌 다른 술을 만드는 건가.

“인마, 너 계 탄 줄 알아. 닌카시 술은 인기가 많아서 금방 떨어지거든, 옛날엔 나도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얻어 마셨다니까.”

“네가 그 정도로 칭찬하다니 기대되는걸.”

“끝내줘. 전부 내 덕인 줄 알아.”

기대에 찬 인안나는 오랜만에 본다.

포도주가 아닌데 그 정도로 맛있을까, 마셔보면 알겠지.

우리는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던전 중앙 테이블에 앉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자연스럽게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이 던전 안쪽에서 술통을 테이블마다 배달했다.

“던전이라고 믿을 수 없는 곳이네. 분위기가 주점이나 다름없어.”

나는 주변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던전 안쪽에서 오크 덩치에 족히 세배는 되는 거대한 술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다.

“술에 죽고 술에 사는 게 내 좌우명이거든.”

그녀는 병사들이 가져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술통을 내려놓으며 당당히 밝혔다.

그다지 자랑거리는 아닌 것 같지만.

“…정말 마시는 거야?”

거대한 술통을 보고 라마슈투가 조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눈가가 떨리고 있다.

설마 그 라마슈투가 술을 보고 겁먹은 건가.

그러고 보니 그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 없군.

술 취하면 어떤 느낌일까.

닌카시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의아한 듯 쳐다봤다.

“뭐야, 영웅의 얼굴을 하고도 술을 무서워하는 거냐?”

“나는 그 여자와 아무런 상관도… 어쨌든 술은 취향에 안 맞아.”

“세게 생겨선 의외네. 약한 소리 한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그녀는 테이블 밑에 있던 잔을 꺼냈다.

그리고 술통에 달린 수도꼭지에 유리잔을 내밀고 술을 받는다.

“준비됐겠지? 어디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자고!”

수도꼭지를 틀자 새하얀 거품이 유리잔에 쏟아졌다.

이윽고 서서히 거품이 걷히면서 주홍빛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 빛깔은 호박석이 액체가 되어 유리잔 속에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남타르, 미안하지만 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인안나가 술잔을 보며 쓰게 웃었다.

“마시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가?”

“나도 그렇고, 저년을 술대결로 이길 녀석은 별로 없어. 그러니까 미리 뒷일 부탁하는 거야.”

나와의 술 대결에서 매번 패배했지만, 되지도 않는 자신감만큼은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인안나가 시작도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술잔을 받는 라마슈투도 머뭇거리는 걸 보아 자신이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닌카시와 싸울 자는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닌카시가 밀어 테이블을 매끄럽게 타고 오는 술잔을 받고 내용물을 관찰했다.

“보아하니 포도주는 아닌 것 같은데, 이름이 뭐야?”

탕.

텅 빈 유리잔이 테이블에 떨어졌다.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건만 닌카시는 혼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닦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한껏 드러냈다.

“저녁노을 도마뱀, 바로 닌카시표 맥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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