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꼭짓점 (5)
영롱한 황금 빛깔의 액체.
입술을 타고 넘어온 탄산이 혀를 따갑게 쪼며 미각을 적셨으니, 곧 청량감이 몸속에 화사하게 퍼졌다.
또한 얕게 풍기는 보리 향이 위장에 중첩될수록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취기가 코끝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묵직하고 파괴적인 포도주에서 느낄 수 없는 맑고 시원한 맛이야.
기회가 되면 동생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을 정도군.
마족만 이런 걸 마셨다니 내심 부러운걸.
그리고 맛과 더불어 맥주 자체의 가치가 계속해서 흥미를 자극했다.
맛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치 발굴을 기다리는 심층에 숨은 보석처럼 맥주는 일확천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거래 자원이 될 수 있다.
제조 방법이야 닌카시와 몇 안 되는 병사들만 알고 있을 테니 제조법을 독식한 셈이다.
유출되지 않는다면 제법 짭짤하게 벌 수 있을 테지.
그렇게 계산하던 와중 나는 문득 쓰게 웃었다.
벌써부터 성공 이후를 내다보는군, 아직 닌카시를 설득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뭘 혼자 실실 쪼개고 있어?!”
갑자기 인안나가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그녀의 입술뿐만 아니라 살갗에서도 술 냄새가 진동했다.
거하게 취하셨네.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면 말을 하라고, 새끼야! 맨날 꼭꼭 숨기고 다니고… 그럴 때마다 네 새끼 면상 패고 싶은 욕구 참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기나 하냐?!”
“불쾌했다면 미안해.”
“사과하지 말라고! 맨날 자기 혼자 멋있는 척은 다 하는 게, 어, 그게 문제라고. 존나게 재수 없는 새끼야!”
역시나 주정뱅이에게 사과해도 돌아오는 건 부질없는 하소연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는 것밖에 없다.
여기서 나까지 속에 품고 있던 불만을 토로한다면 말다툼으로 변질할 테니까.
“캬하하하, 꼬맹이 취했네!”
“그래! 나 진짜 취했다, 도마뱀 년아! 그래서 불만 있냐고!”
“불만이라니! 오히려 미친년처럼 구는 게 엄청 보기 좋다고! 자, 더 마시고 계속 미쳐보자고!”
닌카시가 술잔에 맥주를 채워 우리에게 나눠준다.
그러나 마지막 잔을 테이블에 밀려던 찰나, 라마슈투를 보고 흥이 식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쟤는 겨우 이거 마시고 나자빠진 거야?”
닌카시의 말 그대로 라마슈투는 술에 취한 채 테이블에 이마를 찍고 엎드려있었다.
맥주가 반쯤 남은 술잔을 손에 쥐고 있는 게 맡은 소임을 다하고 전사한 병사 같다.
물론 라마슈투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닌카시의 병사들도 술에 취해 누워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녀치고는 오래 버틴 거고, 닌카시와 인안나가 이상하리만큼 잘 버티는 거다.
물론 나는 논외라 치고.
“이제야 슬슬 재밌어지려고 했는데, 벌써 한 명 탈락했네.”
“내가 마지막까지 어울려줄 테니 걱정 마.”
“캬하하하, 이거 오랜만에 술 마실 맛 나는걸. 확실히 큰소리 떵떵 치던 도전자 중에서 제일이야.”
인안나가 맥주가 아깝게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왜 난 쏙 빼놓고 얘기해?!”
“여전히 목소리 높은 건 보기 좋네. 근데 까마귀의 좁쌀만 한 간도 슬슬 한계가 오지 않았어?”
“나를 뭐로 보고! 아직 끄떡없어! 뭐해?! 짠해, 짠!”
도발에 응하듯 그녀는 작은 몸집을 앞세우고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쓰게 웃으며, 닌카시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것처럼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마족에게 영광스러운 죽음을! 우리에게 좆같은 묘비를! 내 무덤엔 침을!”
잔이 깨지라 충돌하고 넘실거리던 하얀 거품이 요동치며 인안나의 입으로 들어간다.
강한 척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한 번에 들이켜다간 쓰러질 텐데.
쨍그랑.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며 술잔을 떨어트렸다.
“…하늘이 이렇게 낮았던가?”
뜬금없이 의문을 뱉고는, 건물 기둥이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쓰러진다.
이런 데서 인안나의 머리가 깨지는 건 보기 싫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아 의자에 앉혔다.
그러자 닌카시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웃었다.
“캬하하하, 이거 완전히 갔네 갔어. 그래도 예전보다 오래 버텼네.”
“원래 고생한 만큼 술배도 늘어나는 법 아니겠어.”
인안나를 안전하게 테이블로 엎드리게 한 뒤, 나와 닌카시는 마저 술잔을 비웠다.
촛불에 반사하던 황금빛 물결이 위장에 가라앉았고, 텅 빈 술잔은 테이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하얀 거품이 유리잔을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퍽 이상한 건배사던데.”
“그래도 보여도 나름 유서 깊은 건배사야. 별의별 녀석이 다 있는 마족에게, 피는 다르더라도 우리는 동족임을 마음속에 새기는 이른바 주문 같은 거지.”
“그런가. 의도는 좋지만, 전체적으론 안일하군.”
그 말을 듣고 닌카시는 미소 지었으나, 눈엔 불쾌함이 담겨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반쪽짜리 마족. 지금 마족의 결의가 우습다는 거야?”
“오해하지 마. 오히려 고결하다고 생각해. 각의각색의 마족을 한데 묶어주는 주문이니까.”
“그럼 왜 안일하단 건데? 시비 거는 거잖아.”
나는 빈 술잔을 닌카시에게 밀었다.
“그저 답답하단 거야. 그런 문구가 마족의 단합력을 키울 수 있을지언정,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할 테니까.”
“하, 고립이라니. 저들이 우리를 이렇게…….”
내 말에 반박하려던 닌카시도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잡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가로젓고 맥주를 따른 뒤 술잔을 내게 밀었다.
“한때 인간이었다며. 그러면 고귀한 왕국의 고결한 건배사라도 알고 있으니 우리를 비웃나 봐?”
“나 같은 하층민은 건배사 같은 거 외울 여유 없어. 그냥 마시고 말지.”
“캬하, 꿈도 목적도 없는 놈 주제 우리를 모욕했네. 야, 이르칼라 님과 인안나가 뒤를 봐준다고 나한테까지 기어오르지 마. 게다가 네가 대접받는 걸 이해 못 하는 녀석들은 많거든? 까불다간 호되게 당할 거다.”
피가 끓어오르는 협박을 내게 쏟아낸다.
술에 미쳤지만, 취기에 마족의 존엄성을 잃지는 않았군. 마치 인안나처럼.
한편으론 다행이다. 그녀에게 이런 친구가 있어서.
“사과할게. 기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어. 단지…….”
맥주가 가득한 술잔을 반대편에 있는 그녀에게 들어 올렸다.
“기왕이면 모든 종족의 화합을 바라면 좋잖아. 세상에 마족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헛웃음을 내쉬며 똑같이 잔을 들어 올리는 닌카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우리는 함께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고.
동시에 테이블에 내려놨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둘 중 하나야. 마족이 멸족하거나, 저 새끼들이 뒤지거나. 아, 하나 더 있네. 네 말대로 사이좋게 손잡고 모든 종족의 유구한 역사를 끝맺음하든가.”
“반대로 묻지,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되겠냐. 판세를 뒤집을 마왕이 부활하지 않는 이상, 마족은 전부 땅속의 거름이 될걸.”
“그걸 알면서 이러고 있나?”
나는 다시 잔을 밀었다.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건 이르칼라뿐이야. 인안나와 친하니 알고 있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왕의 왕좌는 앉으려면 힘만으로는 안 돼. 마족 전체를 이끌어줄 리더십, 포용력, 그리고 자비가 있어야 하지. 그런데 이르칼라… 그년한테 하나라도 가진 게 있기는 해?”
닌카시가 내게 술잔을 밀었다.
“놀라울 정도로 해당 사항이 없군.”
“거봐라. 그러면서 이르칼라한테 마족의 명을 맡기자고?”
“발등에 붙은 불은 꺼야 하잖아. 전멸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죽고 싶진 않을 것 아니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명예롭게…….”
“명예가 복수를 이뤄주진 않아.”
닌카시가 술잔에서 손을 떨어트리는 걸 보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복수는 아름다운 게 아니야. 검이 심장을 후벼 파도 나아가야 할 만큼 처절하고, 오물이 범벅이 된 채 적과 뒤엉켜야 할 만큼 추악해야 돼. 그뿐만이 아니야. 방금까지 곁에서 싸우던 동료를 잃어도, 나 자신을 희생할 상황이 오더라도, 각오를 다지고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야 한다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닌카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구태여 말했다.
복수의 추잡함을, 반드시 이뤄야 하는 소명을,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말은 번지르르하네.”
“그런가. 미안하게 됐군, 그런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니야. 잊었던 걸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재밌는 얘기였어. …캬하하하, 인안나와 이르칼라 님이 너를 곁에 두는 이유를 알 거 같아.”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처럼, 술잔에 맺힌 물방울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이르칼라 님의 밑으로 들어가면 이룰 수 있을까, 그 복수를?”
“나야 모르지. 한낱 반쪽짜리 마족이 미래를 어떻게 보겠어.”
“캬하하하, 마음에 두고 있었어?! 생긴 것보다 쪼잔하네!”
나와 닌카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술잔을 비웠다.
길게 숨을 토해 취기를 뱉으며, 혀끝에 감도는 청량감을 연호하듯 감탄음을 뱉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녀에게 빈 술잔을 밀었다.
“네 목숨이나, 마족의 복수 따위나. 무엇하나 보장할 수 없어. 그래도 단 하나 약속할 수 있지.”
“그 약속이 뭔지 들어나 볼까.”
나는 비웃듯 미소 지었다.
“적어도 상대방의 목 가죽은 너덜너덜해질 거야.”
닌카시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더니.
점차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지며, 호쾌하게 웃음소리를 뱉었다.
“캬하하하! 아하하! 그거 끝내주네! 캬하하하하!”
그녀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좋아. 이르칼라한테 가볼게. 대신 이것만 알아둬.”
그리고 분노를 담아 노려본다.
“난 절대 인정하지 않아……!”
목소리가 허무하게 떨어졌지만, 취기에 숨어 있던 진심은 뼈가 시릴 정도로 잘 느껴졌다.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군. 어차피 지금 생각해봤자 소용없나.
나는 중지로 테이블을 노크했다.
“우리의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두고. 술이나 마시지.”
“캬하하하, 강한걸.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한 녀석은 마왕 이후로 처음이야.”
“영광이로군.”
“그런데 나도 더 마시고 싶지만, 술이 떨어졌어.”
닌카시가 빈 술통을 들고 벽에 내던졌다.
거대한 술통이 부서지는 소리가 던전에 메아리쳤고, 잠자고 있던 병사들과 인안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저, 적이야?! 기습이야?!”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와 닌카시를 번갈아 쳐다보던 인안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턱에 묻은 침을 닦았다.
그나저나 인안나의 고함과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라마슈투는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군.
하는 수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마슈투를 등에 업었다.
“이야기 끝났어. 다음 던전으로 가지, 인안나.”
“어, 으, 응…. 근데 누가 이겼…….”
내가 말없이 등을 돌리자 인안나는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는 닌카시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 걸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서둘러 따라왔다.
“야, 가,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