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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216화 (216/384)

216화

피아식별 (3)

나는 팔짱을 끼고 곧 순혈들이 들이닥칠 길목을 쳐다봤다.

그곳엔 마치 밀밭처럼 화약이 가득 담겨있는 나무통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저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건가. 이거 꽤 볼 만한 구경거리겠네.

“형님, 준비 끝났습니다.”

“고생했다.”

마지막 화약통을 나르고 돌아온 버오쉬푸가 준비 완료를 알렸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나저나 내가 없었던 동안 화약 연구를 끝내고 복제까지 할 수 있게 됐다니, 네 실력과 열정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

“아뇨, 저 혼자만으론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사쿠 님의 전폭적인 지원과 리스 님의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화약이 들어가는 무기 설계는 아사쿠도, 하물며 리스도 하지 못한다.”

뒤편에서 머스킷이란 총을 들고 있는 병사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손에 반쯤 구겨진 원본으로 여기까지 일궈낸 건 오로지 너만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

아사쿠의 지능과 리스의 노하우만으론 화약이란 위험한 가루를 이용하는 세밀한 무기는 꿈도 꾸지 못한다.

하물며 무기 제조공정에 있어 제일 중요한 주형틀은 아무나 만들 수 없을 뿐더러, 만들더라도 안정화하기 힘들다.

그걸 불과 2년 만에 이룩했으니 버오쉬푸는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과, 과찬이십니다. 제가 형님과 의형제로 남기 위해선 이 정도는 거뜬히 해내야지요.”

의형제를 맺은 기억은 없는데.

어찌 됐건 그의 열정에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나.

“그런데 그 녀석이면 몰라도, 그녀까지 돕다니 퍽 의외로군.”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냥꾼으로서 저를 인정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버오쉬푸는 말과 달리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펼쳤다.

“사실 리스 님이 제 망치질하는 모습을 보시곤 사냥에 도움이 될만한 도구를 만들어달라고 하시더군요. 게다가 그 까다롭기로 소문난 사냥꾼이 무기 손질을 전적으로 맡기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확실한 거지요.”

즉 슨 버오쉬푸의 이용 가치를 인정하고 써먹을 속셈인 건가.

그는 좋다고 떠들고 있으나,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나는 차마 축하해줄 수 없었다.

대장장이로서 능력은 출중하지만 눈치는 없군.

소소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무렵, 해골과 괴물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왔나 보군.”

우리에게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바로 딜문까지 쳐들어올 줄 알았건만 상당히 늦게 왔군, 고맙기도 해라.

아마도 안전을 확보하며 던전을 공략할 생각인 것 같은데, 도리어 습격을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된 꼴이 됐다.

“버오쉬푸, 작전대로 신호를 기다려라.”

“정말 괜찮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살점을 잃게 될 겁니다.”

“위험한 건 알고 있다. 하나, 순혈이 한 명도 아니고 무리를 지어 오고 있다. 감수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애초에 저를 믿고 이번 작전을 결정하셨겠지요. 소인 버오쉬푸, 실수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도끼를 건네는 버오쉬푸.

일전에 이단 심문관 대장에게서 빼앗은 양날 도끼엔 밧줄이 묶여있었다.

나는 그가 내민 도끼를 받고 당겨봤다.

그러자 천장에 매달린 화약통 사이로 보이는 작은 바퀴가 돌아가며 도낏자루에 달린 밧줄이 팽팽해지고 늘어졌다.

그리고 바퀴에 걸쳐 있는 반대쪽 밧줄이 발치에서 화약통 쪽으로 끌려간다.

“준비는 완벽한 거 같군. 그럼 잘 부탁한다.”

“예. 자, 다들 준비합시다! 형님의 생존이 걸린 일이니 다들 긴장하십시오!”

버오쉬푸의 지시에 딜문 병사는 들고 있던 총을 등에 짊어지고 줄다리기하듯 밧줄을 잡았다.

그들 얼굴엔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묻어 있다.

절로 안심이 되는군. 이들의 실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나는 살며시 미소 짓고 등에 짊어지고 있던 대검을 꺼내며, 화약통과 이어진 도화선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작전은 불사의 육체를 지닌 내가 죽을지도 모를 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을 각오 없이는 순혈 다섯 명을 막을 수는 없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반드시 여기서 막아주마.

결심을 되새기며 화약통 더미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괴물들이 입을 벌리고 거칠게 포효했다.

그리고 괴물과 경쟁하는 것처럼 해골 병사들도 발을 구르며 적을 위축시키려 애썼다.

정말이지 많이도 끌고 왔군. 화약통에 앉아 대강 머릿수를 세어봤지만 그 숫자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속으로 한탄하며 기다리고 있자 그들이 나타났다.

반으로 갈라진 병력 사이로 다급한 잰걸음을 이어가던 그들은 나를 확인하곤 위협의 눈초리를 보냈다.

“늦었군.”

순혈의 눈빛에 굴하지 않고 나는 여유롭게 대응했다.

그 도발이 통했는지 닌카시의 표정이 더욱 구겼다.

“어쭈, 뭐? 늦었군? 호되게 당하기 전에 적당히 까불라고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냐?”

“평화로운 대화를 바라고 초대했건만, 무례하게 적의를 가지고 온 너희의 기분 맞춰줄 용의는 없다.”

“괜찮겠냐. 행동과 말투 여하에 따라, 네가 죽고 살지가 결정될 텐데.”

“그 말은, 이르칼라가 투항하면 백골과 괴물들의 진격을 멈추겠단 건가?”

“너랑 머리싸움할 생각 없거든. 그러니 설득하지 마, 이미 이르칼라를 처단하는 건 확정됐어.”

“그런가. 애석하게 됐다.”

나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이르칼라가 처단당하면 나를 포함한 걸작들은 죽는다.

그렇다면 물러설 곳이 없지 않은가.

“여기서 너희를 처리할 수밖에 없겠군.”

투항을 거절하는 한마디에 샤마쉬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대, 시야를 넓히고 주위를 둘러보라. 나의 연인과 라하르의 정예병이 빼곡히 자네를 에워싸고 있건만, 어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장담하건대 그깟 뼈와 괴물들론 생채기도 못 낼 거다.”

“애써 강한 척하는 그대의 모습이 보기 힘들 정도로 마음 아프구나.”

손끝에 지휘봉이 분노에 떨린다.

자신의 해골 병사가 무시당하는 건 못 참는 모양이다.

“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데.”

한발 앞장서는 헤기르.

“항상 저런 걸 바랐어. 무릇 무리의 통솔자라면, 귀찮게 앞뒤 재지 않고 적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여줄 용기가 있어야지.”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냥 항복하지 그래. 전에 약속했던 달콤한 숙면을 바치면 내가 앞에 나서서 지켜줄게.”

“이르칼라보다 나태하고 게으른 녀석 밑으로 들어갈 바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

“아깝네. 재밌는 놈이라 죽이기 싫었는데.”

반쯤 닫혀있던 눈이 차츰 벌어지더니, 그녀의 눈동자가 살기를 반사하며 빛났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어느덧 그녀를 에워싸던 느긋한 졸음기는 증발하고, 대신 숨통을 틀어막는 살의가 요동쳤다.

그 분위기는 빠르게 주위에 전파되고 순혈들은 내게 전의를 겨눴다.

슬슬 덤비려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아직인가.

시간을 좀 더 벌어야겠군.

나는 힐끔 라하르를 쳐다봤다.

“인안나에게 들었다. 라하르, 아주 재밌는 능력을 갖추고 있더군.”

“…역시 선생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욱이 의문이더군. 왜 모른 체했지?”

물음에 아무 말도 못 하는 라하르, 나는 그를 몰아세운다.

“예상했던 대로 너는 그들과 다른 목적이 있었군.”

“…라하르, 지금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른 목적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대화에서 기묘함을 느낀 닌카시가 캐묻듯 라하르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대답 없이 검은 모자로 시선을 차단했다.

그 행동은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걸 증명했기에 그녀는 초조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배신한 거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닌카시. 저는 항상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럼 왜…. 왜 말을 못 하는 거야?”

“그건…….”

닌카시가 답답한 감정을 이빨을 갈며 해소한다.

“됐어. 뭘 숨기고 있든 간에 이르칼라를 처단하고 나중에 얘기해. 그리고 남타르, 비겁하게 이간질하지 마.”

삿대질하는 그녀의 뒤편을 슬쩍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활발하게 꿈틀거리는 촉수.

도착했군.

“비겁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그만 떠들도록 하겠다.”

“갑자기 뭐야. 왜 순순히 굴어?”

“시간 벌이가 끝났기 때문이다.”

“…시간 벌이?”

라하르는 번뜩 뒤편을 쳐다봤다.

이제야 눈치챈 건가, 내가 뭣 때문에 부질없는 대화를 이어가려 했던 건지.

나의 희미한 미소 너머로.

키에에엑!

멍청한 찹쌀떡 괴물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퍼뜩 뒤를 돌아보는 그들, 그리고 닌카시.

“이, 이 소리는?!”

“구전으로 들었던 훔바바입니다.”

“알고 있어! 그런데 그 녀석이 왜 딜문에 없고 뒤쪽에서 나타난 거야?! 분명 우리가 꼼꼼히 확인하면서 왔…….”

닌카시는 말을 이어가던 혀를 멈추고 불현듯 허탈하게 입을 벌렸다.

마치 내가 제스터에게 배신당했던 것처럼, 허무와 분노가 뒤섞인 눈빛으로 라하르를 노려본다.

“너, 알고 있었어? 그래, 너, 천장을 뚫어지라 쳐다봤던 이유가…….”

“죄송합니다, 닌카시.”

“비밀이란 게, 목적이란 게 겨우 이런 거였어? 나를, 우리를 배신하려던 거였냐고. …뭐라고 설명 좀 해봐!”

그녀가 허튼짓하기 전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의 목적은 그것만은 아닐 거다.”

“크윽, 이젠 못 참아! 당장 그 주둥아리를 찢어발겨 주마!”

조롱을 듣고 내게 달려들려는 닌카시를 이슘이 막았다.

“도발에 넘어가면 안 돼요! 일단 사면초가의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요!”

“으윽…….”

그웨에에엑!

또 다른 괴물, 아사쿠가 만들고 키우는 거대 쥐의 울음소리가 그들의 조바심을 자극했다.

이에 순혈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높은 닌카시는 혀를 차고 곧장 지휘에 나섰다.

“빌어먹을! 일단 병력을 둘로 나눈다. 나와 헤기르는 앞을 뚫을 테니까, 샤마쉬와 이슘은 뒤를 맡아. 양쪽으로 잡아먹히는 구도만큼은 피해야 해. 그리고…….”

배신자로 낙인찍힌 라하르를 흘겨보는 닌카시.

“너도 뒤에서 검은 태양 형제를 도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입발림 소리 그만하고 빨리 내 눈앞에서 꺼져!”

그는 두툼한 뱃살을 유연하게 접으며 고개 숙였다.

그리고 형제를 따라 후미를 방어하러 떠났다.

“넌, 내가 죽인다.”

닌카시의 선언이 떨어지자, 미동도 없던 해골과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괴물이 발을 놀리기 시작한다.

수상한 나무통을 무시하고 대군은 점차 거리를 좁혔다.

아무리 나라도 저것들을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단 도망쳐야겠지.

나는 밧줄이 묶여있는 도끼를 세 번 당겼다.

그 신호는 천장으로 팽팽하게 이어져 있는 밧줄을 타고 버오쉬푸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리자 해골 병사가 휘두르는 수십 개의 검날이 나를 도륙내기 전.

“뭐야?!”

밧줄을 매단 도끼를 타고 날아올랐다.

예상치도 못한 도주 방법을 보고 닌카시는 순간 당황한다.

“빌어먹을 자식이, 천장으로 도망치다니!”

“저래서 도끼에 밧줄이 묶여있었구나. 똑똑한걸.”

“그래도 피해봤자야! 오히려 그 선택이 네 목을 조르게 될 거다!”

승리를 장담하듯 큰소리치는 닌카시.

그럴 만하겠지.

내가 끝없는 천장으로 도망친들 언젠간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그 방면에 발밑에서 해골과 괴물이 탑을 쌓고 손을 뻗으며 추적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다.

불붙은 도화선은 이미 화약통까지 도착했거든.

“…저 녀석 왜 웃는 거야?”

“잠깐만. 뭔가 이상…….”

헤기르는 기묘함을 눈치채고 대응하려 했으나, 이미 한참 늦었다.

도화선에 붙은 불꽃은 가파르게 화약통에 다다랐으니.

펑!!!

화약통이 폭발한 순간.

해골과 괴물 무더기 밑에서 일어나 화마가 그것들을 집어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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