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마지막 사냥 (1)
삼목산 던전, 이곳에 온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많은 일이 있었다.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던 내가 즐겁다는 듯 웃게 되고.
타인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던 내가 누군가를 걱정하게 되고.
그것들을 구더기 미만의 것으로 혐오하던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왜 이렇게 됐을까?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해서? 딜문에서 웃으며 같이 지내서?
아니면 그 새끼 때문에?
…모르겠다.
어찌 됐든 더 이상해지기 전에 서둘러 탈출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새끼가 또 일을 벌인 모양인데….
“남타르 님이 용사와 싸우셨다는데? 그것도 덴마우스 한복판에서 말이야. 진짜 대단하지 않아?”
푸른 머리칼의 마족, 리버가 말을 꺼냈다.
그 새끼의 무용담이 마치 제 것인 마냥 신나서 떠든다.
“동감입니다. 그리고 설마 승리까지 이끌어내실 줄은… 실로 존경스럽군요.”
황소 수인, 두오데눔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한다.
무식해 보이는 근육과 안 어울리게 말투가 점잖고 침착했다.
“게다가 그 영웅을 설득했지요. 정말이지 형님의 언변에 혀를 내두릅니다.”
대장장이 드워프, 버오쉬푸가 눈을 반짝이며 칭송을 거든다.
제법 쓸 만한 놈이니까 나쁜 말은 하지 않겠다.
세 마리 짐승들이 하는 말을 주워듣고 난 내게 주어진 임무를 상기시켰다.
‘때가 되면 화약통을 터트려라. 그리고 삼목산의 갱도를 한꺼번에 무너트려라.’
그게 지금일까. 아니면 지켜봐야 할까.
난 도화선에 불을 붙일 시기를 가늠하고 고민했지만, 이윽고 생각을 멈추고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머리를 부여잡고 씨름해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딜문의 눈과 아사쿠 놈의 감시를 피해 자릴 옮겼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달빛을 감상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 아이의 눈동자처럼… 둥그런 보름달이 밀회의 신호다.
먹구름이 달빛을 가리고, 머지않아 다시금 달빛이 잔디를 가득 채웠을 때.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플루토.”
“여전히 건방지군. 창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님을 붙여라.”
“…죄송합니다, 플루토 님.”
난 짧게 고개 숙이고 곧장 삼목산의 정보를 플루토에게 넘겼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지시는 차후에 전달할 테니 넌 평소처럼 기다려라.”
“알겠습…….”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빌어먹을 새끼.
…어차피 곧 여길 떠난다. 그러니 화내지 말자.
용사가 덴마우스에 쳐들어왔고 영지민 들 앞에서 죽었단, 그 표면적 사실은 중요한 사안이다.
이를 이용해 그 새끼는 여느 때처럼 그림자에 숨어 판을 짤 것이다.
머지않았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자유의 몸을 얻는다.
“그래. 머지않았어……!”
릴리프의 잡화점의 2층 방.
난 침대에 걸터앉아 조각칼로 나무판을 깎았다.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 조각했건만 손엔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끝없는 재생력이 이럴 땐 큰 도움이 된다니까.
내가 조각에 열중하고 있던 와중,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런 예의 바른 행동을 동생이나 리스가 할 리 없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겠군.
“들어가도 될까?”
“응.”
허락이 떨어지자 이클립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걸 아직도 붙잡고 있는 거야? 게다가 이만큼 많이 해 먹고… 손재주가 없으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어때?”
바닥에 부러진 조각칼과 파쇄된 나무판을 보고 그녀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울컥하는걸.
“내가 누구 때문에 없는 손재주로 나무를 깎아가며 가면을 만드는지 알기나 해? 전부 너 때문이잖아.”
얼굴이 팔린 나와 이클립스는 공식적으로 은행에 깔려 죽은 걸로 돼 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잠적했으니 시체는 발견 못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죽음은 확실시됐다.
이건 크나큰 제약이다.
그도 그럴 게 사망 처리된 망자가 길거리를 뻔뻔하게 돌아다닐 순 없는 것 아닌가.
물론 나야 삼목산으로 돌아가면 된다지만, 반면에 이클립스는 더 갈 데가 없다.
“케이퍼, 그 똑똑한 녀석이 왜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했겠어. 아사쿠가 지배하는 이곳을 제외하곤 온 지역이 영웅의 손아귀에 있잖아. 그런데 덴마우스에서도 자유롭게 못 돌아다니면 곤란할 거 아니야.”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의 말대로 가면은 만능이 아니다.
이런 걸로 얼굴을 가린다 한들 눈치 빠른 녀석들은 금방 이클립스가 영웅이란 걸 알아볼 것이다.
“그래도 있고 없고는 천지 차야. 이걸 쓰고 목소리만 낮게 깔면 밤엔 특이한 모험가라고 생각할걸.”
조각칼 끝으로 이클립스를 가리켰다.
“하물며 평생 릴리프 가게에 한량처럼 얹혀살 순 없잖아.”
“하, 한량이라니! 난, 나름 용사였거든.”
“듣기 거북하면 밥만 축내지 말고 나가서 돈이라도 구해와. 아니면 집세로 용사님의 금은보화를 내놓던가.”
“그게… 이름을 버릴 때 돈도 같이 왕국에 기부했거든…….”
“땡전 한 푼 없다는 소리잖아. 정말 용사 맞긴 하지?”
면목 없다는 듯 이클립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피한다.
무일푼일 줄 알았지만 설마 전 재산을 왕국에 기부했을 줄이야. 괜히 짜증나는군.
시선에 못 이겨 이클립스는 변명하듯 허둥지둥 양팔을 펼쳤다.
“그래서 괴물의 소재를 얻어주려는 거잖아. 조금이라고 보탬이 되어주려고…….”
릴리프에게 괴물 소재를 찾아주겠다는 말, 그녀 딴엔 사죄가 의미에서 한 말이지만 사실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이다.
애초에 나와 동생은 목숨을 빚지지 않았는가.
이 이상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도움을 구할 순 없다.
하지만 구태여 우리를 위해 몸소 움직여준다.
정말이지 그녀의 성실한 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난 감사 인사를 전하려 입을 열었으나, 예기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 어머, 듣던 것과 달리 갸륵한 용사님이네요.”
벚꽃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사냥꾼, 스킬라가 문틈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스킬라, 여긴 어쩐 일이지?”
“어라 어라, 한 달 만에 얼굴을 봤는데 너무 차가운 반응 아니에요? 물론 그 점이 더 매력적이지만.”
“본론만 말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토라진 티를 낸다.
귀여운 척하는 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그야 남타르 님을 보러 왔죠. 슬슬 우리 사이에 2세 계획도 세워야 하구요.”
“별 볼 일 없는 계획이군. 정말 그것뿐이냐?”
“설마 그럴 리가요. 혹 여유가 되면 일을 거들어 달라고 아사쿠가 불렀어요. 삼목산 주변 괴물은 꼬맹이가 거닐고 훔바바는 반응이 밍밍해서 지루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냉큼 달려왔죠.”
“그 녀석이?”
“네, 귀여운 토끼가 그렇게 말하던데… 못 들으셨나요?”
금시초문이지만, 아사쿠에 텐덜까지 끌어들였다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스킬라를 부를 만큼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괴물 사냥을 도와달라고 부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물론 찜찜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
“사냥이요?”
“여기 있는 용사와 리스가 괴물을 사냥하러 갈 거야.”
스킬라가 이클립스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이클립스가 쓰게 웃었다.
“슬슬 정식으로 소개해 줄래, 남타르?”
“그러고 보니 우리만 얘기했군. 여기는 스킬라, 리스와 같은 사냥꾼이며 던전에 종속된 병사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칼라가 흉부를 과시하며 이클립스에게 다가간다.
“더불어 남타르 님의 2세를 품을 여자랍니다. 알겠죠, 용사님?”
“그, 그렇구나. 잘 부탁해, 스킬라.”
듣기 거북한 사족이 붙였지만 이클립스는 밝게 웃으며 유연하게 넘겼다.
내 주변에 힘깨나 쓰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대화방식이 어긋나 있건만, 그녀는 퍽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드디어 이런 녀석이 곁에 생길 줄이야. 참 감격스럽다.
“그것보다 남타르 님과 여행이라니! 이거 이거,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네요!”
“아니, 난 안 가.”
“네?! 왜요?!”
초를 치듯 냉혹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리스도 없는 마당에 동생은 누가 지켜? 그리고 요즘 케이퍼가…….”
“케이퍼? 걔는 또 누구예요?”
난데없이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스킬라와 이클립스가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말실수를 해버렸군.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난 안 갈 거니까 너희끼리 알아서 처리해.”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그녀들이라면 걱정 없다.
힘 일부를 잃었더라도 용사는 용사다.
거기에 이르칼라에 힘을 받은 사냥꾼과 그럴듯한 힘은 없지만 유능한 사냥꾼이 동행한다.
도적을 만나더라도 우습게 격파하고, 설령 운 나쁘게 영웅과 마주해도 역으로 처리하거나 쉽게 뿌리칠 것이다.
“모처럼 남타르 님과 함께하는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네요. 그리고 또 리스랑 의뢰를 받을 생각하면… 으, 벌써부터 귀가 근질거릴 거 같아.”
“같은 사냥꾼이라 친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이클립스가 순수한 의도로 물었으나, 스킬라는 마음에 안 들었는지 미간이 구겨졌다.
“1등이랑 2등이 같이 다니는 거랑 똑같아요. 겉으론 친한 척 하면서 뒤론 상대를 깎아내리며 단물만 쏙 빼먹죠.”
“조금 비약적인 비유 같은데.”
“사냥꾼의 세계가 얼마나 냉철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스승님 밑에서 같이 자라긴 했지만 인연은 그것뿐이랍니다.”
“그, 그래?”
“무엇보다 그 까탈스러운 년이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어요!”
리스의 뒷담화에 시동을 거는 스킬라.
“스승님을 따라 한답시고 이상하고 배배 꼬인 말투로 옆에서 온종일 쫑알거린다고요! 마음 같아선 퍽퍽한 빵을 처먹여서 닥치게 하고 싶었지만, 고양이 아니랄까 봐 움직임은 또 얼마나 빠른지 번번이 실패했다니까요?!”
“이런, 고양이가 굼벵이 마음을 너무 몰라줬나 봐.”
“누가 굼벵이야?! …어라, 리스?”
어느새 리스가 문에 기대고 서서 스킬라를 비웃고 있었다.
나야 시선이 문에 있어서 진즉 눈치챘지만, 그녀들은 전혀 몰랐는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거 놀라운걸, 굼벵이가 누군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인 걸 알아차리다니. 손은 느리지만 뇌 회전은 빠른가 보네.”
“윽, 하여튼 날쌘 밤 고양이 같으니라고…….”
보잘것없는 조롱을 리스는 코웃음 치며 넘겨버렸다.
그게 더 스킬라의 신경을 돋웠다.
“그것보다 아사쿠가 찾고 있어. 이야기 끝났으면 내려와.”
거두절미하고 리스가 내게 용건을 말했다.
아사쿠가 올라오지 않고 구태여 나를 부르는 건, 이야기를 듣는 방해꾼이 없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