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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259화 (259/384)

259화

여유와 속도 (2)

고요함이 감도는 딜문, 원탁에 놓인 던전 지도를 확인하고 팔짱을 꼈다.

지도엔 적들이 탐사한 범위를 나타내는 깃발이 중간쯤에 세워져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한 달 정도 지났어요.”

내가 묻자, 텐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이라, 제법 주도면밀하게 치고 들어오는군.”

“오히려 너무 느린 것 아니에요? 전 곧바로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요.”

“하긴 던전이 아무리 거대한들 넓이엔 한계가 있지. 아마 저들이 삼목산을 건널 수 있는 체력만 믿고 무식하게 전진했으면 하루 만에 딜문까지 도착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동굴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등산과 목숨이 걸려있는 던전 공략은 차원이 다르다.

“어둠으로 뒤덮인 던전 안에 적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걸 알아낸 이상, 함정과 기습을 대비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장기전을 바라보며 최대한 안전한 게 정보를 수집해야 돼.”

“방심하지 않고 차근차근 갉아먹겠다…. 던전 공략의 베테랑들 같네요.”

“그럴 거야. 그도 그럴 게 마족을 팔아치우는 걸로 연명하는 이단 심문관이 포함돼 있으니까.”

비단 이단 심문관뿐만이 아니다.

타지에서 보급로를 만들기엔 쉽지 않았을 터.

저들이 한 달 동안 고민 없이 던전 공략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용병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숨통을 조르는 던전의 어둠을 가로지르며 적의 기습을 대비하는 건 극심한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이를 특이한 환경에 적응해온 모험가가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기사단이나, 장군들보다 훨씬 까다롭네요.”

텐덜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불안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던전에서 수성하고 있기에 우리가 아직 무사할 수 있지만, 수세에 몰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걱정하지 마. 시간은 우리 편이고, 조급한 건 저쪽이니까.”

“우리 편이라뇨? 새드너스가 지원을 거절하고 있어서요?”

“그래, 보급로를 뚫어봤자 정작 지원해줄 기관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영주에게 어느 정도 지원금을 받았지만, 슬슬 한계에 맞닥뜨렸겠지.”

난 미소 짓고 그녀를 슬며시 바라봤다.

“반면에 우린 텐덜이 노력해준 덕분에 식량과 자원이 여유롭잖아.”

“가, 갑자기 칭찬하시면… 괜히 부끄럽네요…….”

“듣자 하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던전에 자원을 축적하려고 고군분투했다면서. 던전에 한 달 동안 갇혀있어도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전부 네 덕분이야.”

“그만 하세요…. 남타르 님에 비해 전 기본적인 것밖에 못 했거든요…….”

말을 그렇게 하지만, 더 칭찬 해달라는 듯 몸이 배배 꼬인 채 꿈틀거렸다.

여전히 성실하면서 귀여운 녀석이다.

하나, 식량과 자원이 아직 널널하다고 해도 막연하게 수성만 할 수는 없다.

머지않아 턴은 우리에게 넘어올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때마침 정보를 가져온 리스가 천장에서 지상으로 안착했다.

“움직이기 시작했어. 시기도, 규모도 전부 자네 말대로야. …이 정도면 자네한테 예지 능력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인데.”

“제풀에 지쳐서 돌격을 결심하려는 거야. 그 정도 심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어. 그것보단 저들이 이 정도로 오래 버틴 게 놀라운걸.”

“아, 그래? 그렇게 잘난 자네도 잘난 척이 병이란 건 모르나 보네?”

리스의 조롱에 난 쓰게 웃고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이제 우리 차례다.”

그리 말하며, 지도의 길목에 그려져 있는 점선을 손끝으로 그었다.

* * *

백 명 가량의 인원이 오와 열을 맞추고 던전을 이동하고 있었다.

선두는 교전을 중심으로 한 이단 심문관, 후미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비할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쉰 명이 넘는 부대에 사이에 끼어있는 열 명가량의 약소한 모험가 부대.

좋게 말해 중간에서 앞뒤를 지원하는 보조 부대였고, 나쁘게 말하면 짐꾼 역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남성 모험가가 슬쩍 켓비스를 보고 혀를 찼다.

“쯧, 부대장을 잘못 만나서 허드렛일만 떠맡았구먼.”

“그러니까 말이야. 아부도 못 하고, 잘 싸울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여자만 밝히고.”

켓비스에게 매번 추파를 받았던 여성 모험가가 코웃음 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인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본다.

“저런 놈이 그 느긋한 홍차 파티의 리더라고?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은 아닐걸. 그 밀티크랑 가슈가 옆이 있잖아.”

대화를 듣고 있던 남성 모험가가 불현듯 그들을 비웃었다.

“폭풍우를 부르는 거대 골렘을 쓰러트리고, 깊은 해저에서 메갈로돈과 혈투를 벌였으며, 사막 한가운데서 전설의 진주를 발견한 모험가, 느긋한 홍차 파티. …아직도 믿기지 않는걸.”

“믿기지 않는다니, 뭐가?”

수인 모험가의 물음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험가 사이에서 소문에 거품이 끼는 건 으레 있는 일이잖아.”

“…그것도 그렇네.”

부대원의 의심과 비난이 부대장을 향해 쏟아진다.

마치 들으란 듯이 떠는 목소리를 켓비스는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있었으나, 쓴웃음은 미처 지우지 못했다.

“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마. 우리가 부러워서 하는 소리야.”

“맞아요.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일만 하죠.”

가슈와 밀티크도 그를 다독여준다.

“전 괜찮아요. …그래도 모험이 부정당하는 건 조금 마음 아프네요.”

그 말을 듣고 가슈가 험상궂은 얼굴로 뒷담화를 내뱉는 부대원을 노려봤다.

“하긴 나도 그건 열받아. 그냥 한마디하고 올까?”

“안 돼요, 가슈. 다른 부대도 아니고 같이 편끼리 시비 걸어서 어쩌려고요. 적진 한복판에서 싸울 작정이에요?”

밀티크의 지적에 켓비스도 고개를 끄덕인다.

“스승님 말씀이 맞아요. 이렇게 된 거 차라리 결과로 보여주자고요, 형.”

“그건 그렇지만…….”

가슈는 신음하며 반박을 삼켰다.

신뢰가 없는 지휘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 차라리 군기를 앞세워 위험한 변수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괜찮아요, 형. 부정적인 여론을 반전시키면 저들도 믿어줄 거예요.”

그러나 자유로운 모험가에게 강압적인 방식은 통할 리 없다는 걸 켓비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젠 말대로 결과로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곧장 행동하기로 한다.

“스승님, 탐지 마법은 어때요? 감지되는 게 있나요?”

“마법 지뢰 같은 강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데 옅은 마력이 사방에서 느껴지고 있어요.”

“옅은 마력이요? 마법을 사용하고 남은 마력의 잔재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워낙 옅은 마력이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음, 마치 벽에 막이 껴있는 듯한 느낌이네요.”

애매모호한 비유에도 불구하고 켓비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이 고민했다.

지뢰가 없다는 건 호재였다.

강한 위력을 품고 있는 마력 지뢰는 해제하기도 까다롭다.

다만, 마법에 잔뼈가 굵은 엘프조차 처음 보는 형태의 마력은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수성하는 입장에서 함정을 설치 안 했을 리 없을 텐데….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똑같은 생각이야. 소규모 도적단 놈들도 그럴듯한 함정, 암구호를 만드는데 마족이 대비를 안 해뒀을 리 없지.”

“그러면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하단 소리네요.”

가슈는 그렇게 말하며 뒤편에 용병부대를 흘깃 눈짓했다.

“옅은 마력이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쟤들도 어렴풋 눈치챘을걸.”

“그러고 보니 용병부대도 마법사가 포진돼있었죠. 그럼에도 무시하고 강행군 한다는 건 위협이 안 된다고 판단한 걸까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를걸. 용병부대가 구태여 후미를 맡은 이류를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설령 함정이더라도 우리를 방패막이 삼으면 된다, 그거겠죠?”

가슈는 침묵으로 긍정한다.

그러자 켓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동료 의식이 전혀 없네요.”

“말해두지만 용병이 전부가 저렇진 않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형이 같이 다니는 거잖아요.”

켓비스는 고민을 끝내고 발걸음을 빨리한다.

“어쨌든 수상한 마력은 방관할 수 없어요. 당장 부대장들과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가 서둘러 부대장을 모으려던 찰나.

“…잠깐만요. 뭔가 이상해요.”

불현듯 밀티크가 켓비스를 황급히 붙잡았다.

지팡이 끝이 발광하면서 밀티크의 다급한 표정을 비춘다.

여지까지 보지 못했었던 그녀의 모습에 켓비스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러세요, 스승님? 혹시 뭐라도 감지됐나요?”

“…방금까지 흐르던 마력이 사라졌어요.”

“네? 마력이 사라졌다고요?”

함정이라 예상한 마력이 증폭된 것도 아니고 사라졌다.

그 기묘한 상황에 빠지기도 전에, 갑자기 가슈가 켓비스를 툭 건드렸다.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그런데… 원래 저기에 길이 있었냐?”

그는 서둘러 가슈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방금까지 시야엔 횃불과 라이트 마법의 불빛이 거친 벽면을 밝히고 있었다.

하나, 잠시 한눈판 사이에 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암흑에 물든 길목이 드러났다.

“뭐, 뭐야?”

뒤편에 있던 남성 모험가가 허공에 물음을 던지자, 의문은 순식간에 토벌대로 퍼졌다.

던전의 갑작스러운 변형에 던전이 떠나갈 정도로 소란스러워진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평정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추리하고 있는 켓비스.

“옅은 마력… 사라진 벽… 얇은 막……?”

그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경악한다.

“처음부터 길목을 숨긴 건가……?”

그때.

쿵.

묵중한 덩어리가 떨어진다.

쿵. 쿵.

앞뒤로 연달아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쿵. 쿵. 쿵.

그 소리와 격동치는 맥박음이 맞물리는 순간, 켓비스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검을 뽑았다.

“다들 방어 진형으로 모여요! 당장!!”

그리 말하며 빠르게 주문을 읊고 하늘로 떠오른다.

한 손에 화염구를 만들고, 바람 마법을 타고 날아오른 그는 언뜻 보이는 형체를 향해 검 끝을 찔러넣었다.

“─지옥마의 말발굽처럼 거세게 타올라 적을 삼켜라!”

검을 뽑아내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살점 사이로 화염구를 발사한다.

펑!

폭발음과 동시에 검은 형체는 산산조각이 난다.

동시에 폭주처럼 터진 불길이 순간 던전을 밝혔으니.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괴물의 모습이 빼곡히 드러났다.

그것을 보고 남성 모험가가 소리친다.

“저, 적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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