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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286화 (286/384)

286화

겁쟁이 (4)

땅속에 개미굴을 단면으로 자른 듯, 절벽 단면에 빼곡히 수 놓인 창문과 황소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성문.

왕국과 법국이 땅바닥부터 벽돌을 쌓아 올린 반면에 제국의 성은 땅과 융화하듯 검붉은 절벽을 그대로 사용했었다.

그 특색있는 제국의 성을 웨르는 미간을 좁히고 멀리서 비스듬히 올려다본다.

“성 꼭대기 층에 그을림이 보여. 루페는 저곳에서 우릴 저격했나 보군.”

그 말을 듣고 닌카시가 다가가 폐가 문틈으로 성을 올려다봤다.

“넌 저게 보이냐? 난 아무리 노려봐도 도무지 안 보이는데.”

“아서. 순혈의 눈이 아무리 뛰어나도 활쟁이의 깊은 시야는 못 따라오거든. 그러니까 주름 생기기 전에 미간 풀어.”

“재수 없기는. 어쨌든 용사 새끼는 성에 있다는 건가.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막막하군. 작전이 벌써 틀어진데다가 남타르와 리스란 걸작과도 헤어졌으니, 서둘러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내야겠어.”

“…그나저나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냐, 사냥꾼?”

엄지손톱을 앞니로 깨물고 잰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걷고 있는 스킬라를 보며 말한다.

초조함을 여과 없이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던 그녀는 밀려오는 짜증에 물고 있던 손톱을 뜯었다.

“귀 아프게 울리던 포격 소리가 갑자기 멈췄어. 혹시 용사의 저격에 리스가…….”

“걱정은 접어둬. 설마 이르칼라의 사냥꾼이 그 정도도 못 피하겠어.”

“걔라면 눈감고도 피하겠지. 하지만 쓸모없는 토끼 수인이랑 다리 짧은 드워프와 같이 갔잖아. 그 연놈들을 발목을 붙잡거나, 리스가 바보같이 지켜주려다가 당했으면 어떡해?”

“남타르 녀석이 같이 있는데 설마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겠냐.”

“남타르…. 그것도 그렇지…….”

“알았으면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지 말고, 이제 어떻게 할지 너도 생각해봐.”

스킬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궜다.

“자꾸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솔직히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봤자 소용없잖아.”

패색이 섞인 말투에 웨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방관만 할 순 없지 않나.”

“뭐 해보겠다고 싸돌아다니다가 머리가 터지는 것보단 낫거든. 차라리 남타르가 움직일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게 나아.”

“그자를 못 믿는 건 아니야, 사냥꾼. 내 말은 용사가 가만히 놔두겠느냐는 거지.”

당장 돌격이라도 할 것처럼 닌카시가 도낏자루를 어깨에 올리고 스킬라를 쳐다본다.

“웨르 말이 맞아. 우리가 코앞에 숨어 있는데 용사가 가만히 있겠냐. 병사를 보내든, 요란한 빛덩이를 쏴대든, 아니면 상상을 뛰어넘는 개짓거리를 하든 어떤 액션을 취할 거야.”

“그전에 우리도 움직여야 돼. 속도전에서 뒤처지면 금세 용사의 화살이 등까지 따라올걸.”

용사의 다음 행동이 예상이 안 되는 상황에 사태가 해결되길 기다리고만 있는 건 죽음을 방목하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먼저 움직이자는 다수결의 의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스킬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억지로 작전을 진행 하자구?”

그녀의 물음에 웨르는 다시금 제국 성을 올려다본다.

“제국의 성 꼭대기 층을 확보한다. 쉽지 않은 작전이지만 할 수밖에 없겠지.”

“용사가 떡하니 지키고 있는 곳에 쳐들어간다니 그게 되겠어? 게다가 제국 병사가 우글우글할 텐데?”

“대장장이가 설득에 성공했으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이미 물 건너간 걸 떠올려봐야 아쉬움만 짙어지겠지. 어떻게든 우리끼리 돌파해 보자고.”

실속 없는 토의에 스킬라는 허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악어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안전하겠네.”

“죽을지 살지는 운명에 맡겨봐, 사냥꾼.”

“그래 그래, 결과가 어찌 되든 리스가 다치는 것보단 낫겠지.”

작전이 정해지고 웨르와 스킬라는 폐가를 나서려 한다.

그때, 닌카시가 손을 들어 조용히 멈추란 수신호를 보냈다.

“밖 상황이 이상해.”

눈발이 나부끼는 제국은 방금까지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한데 찬바람과 사이로 조악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오더니, 이윽고 서서히 증폭되기 시작한다.

“제국 병사가 추격해 온 거야?”

“벌써 활시위를 당기게 될 줄이야.”

그들의 예상에 닌카시는 표정을 찌푸렸다.

“달라. 목소리에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잖아.”

그리 말하며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제국 병사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면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을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폐가 앞을 쏘다니는 드워프는 벼린 무기와 반짝이는 갑옷 대신, 누더기 같은 옷과 텅 빈 맥주잔,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껴안은 여성이었다.

웨르는 폐가 밖으로 나가 드워프들의 발자국을 눈으로 좇는다.

“제국 시민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가고 있군. 그것도 상당히 급하게.”

키가 큰 외지인이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드워프는 눈길도 주지 않고 뜀박질을 이어갔다.

제국 시민을 지켜보던 닌카시는 스킬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땅딸보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 우리가 오기 전에 지리를 정찰해 놨을 거 아니야.”

“아마 메인 스트리트에 중앙 광장인 거 같아.”

“중앙 광장? 갑자기 거긴 왜?”

“난들 알겠어.”

그녀들이 얘기하는 사이에 웨르가 먼저 드워프를 따라간다.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어봤자 답이 나오진 않겠군.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자고.”

서둘러 그를 뒤쫓는 닌카시.

“기다려, 웨르. 함정일지도 몰라.”

“혹은 남타르가 우릴 부르는 걸 수도 있지 않나.”

“이렇게 요란하게? …그 녀석이라면 그럴 만도 하네.”

남타르의 무모함과 대담함을 떠올린 닌카시는 쓰게 웃으며 이해했다.

그들은 드워프를 따라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제국 시민은 얼굴에 활기를 띄우는 자가 있었으면, 불안함에 미간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으며, 희망을 본 듯 기대감에 차오른 자도 더러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제국 국민의 마음속에 오만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그들은 궁금증을 품고 중앙 광장에 도착한다.

“…황제의 단 하나뿐인 아우, 나 버오쉬푸가 네놈의 패악질을 멈춰주마!”

아니나 다를까, 그의 정체는 버오쉬푸.

그리고 또 한 명.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남타르였다.

* * *

제국의 메인 스트리트를 걸으며 난 슬며시 버오쉬푸를 확인했다.

두꺼운 팔뚝이 파문이 일어나는 수면처럼 떨리고, 발걸음은 실에 매달린 목각인형이 무대 위를 걷듯 어색했다.

“그렇게 긴장돼?”

“기, 긴장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 그저 제국에서의 찬바람이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애써 강한 척하는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얼어 죽진 마.”

“물론이지요. 소인 버오쉬푸, 설령 죽을지라도 형님의 내리신 임무는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죽으면 안 된다니까.”

“아, 그, 그렇지요. 끝까지 살아남아서 제국을 이끌겠습니다!”

“그래.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설령…….”

내가 죽을지라도 말이다.

최악의 경우를 고심하고 있을 때, 불현듯 버오쉬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정말로 용사가 공격하지 않는군요.”

“원거리 저격으론 우릴 죽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으니 괜히 힘 빼진 않겠지.”

“리스님과 텐덜님은 괜찮을까요?”

“싸우지 않을까 걱정스럽긴 해. 예전엔 이런 걱정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건만.”

“마음속으로 그분들의 앞날에 무운이 있기를 수십 번 빌어도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군요.”

“그래도 믿고 기다려봐야지.”

그렇게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메인 스트리트를 걸어갔다.

그러자, 비관적인 현실에 억눌린 듯 시선을 땅에 두고 걷던 드워프들이 하나둘씩 버오쉬푸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놀라움에 입을 틀어막은 것도 잠시.

서둘러 자택과 술집, 주변에 있던 드워프의 옷깃을 잡고 죽은 줄 알았던 버오쉬푸의 생존을 널리 퍼트렸다.

그 진실은 삽시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졌고,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하던 일을 뿌리치고 달려왔다.

어느덧 우리가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땐 운그라드에 시민 대부분이 모였다.

이제 밑 준비는 끝났다.

“준비됐어?”

“부족합니다. 하지만, 해내겠습니다.”

“부탁한다.”

버오쉬푸는 고개를 끄덕이고 중앙 광장, 제국 성 앞에 우뚝 섰다.

제국의 땅처럼 드넓은 어깨, 대장장이의 무구처럼 올곧은 눈빛.

“용사여, 들어라!”

황제 드로데드가 반역 진압을 알렸던 선포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

“네놈은 드워프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형제들의 피와 땀을 허무히 증발시켰다! 당장 앞으로 나와 드워프 영혼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죄, 그리고 오만함으로 황제의 왕좌를 우롱 벌을 달게 받아라!”

버오쉬푸의 등에서 어렴풋이 황제의 위엄이 떠오른다.

“황제의 단 하나뿐인 아우, 나 버오쉬푸가 네놈의 패악질을 멈춰주마!”

너나 나나 멋있는 형제를 뒀군, 드로데드.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제국 성을 올려다봤다.

우렁찬 목소리가 닿았는지 그 또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드워프의 심장처럼 검붉은 제국의 절벽 성에서 마치 이단자처럼 바이올렛 머리칼을 휘날리며 등장한 용사, 루페.

그는 꼭대기 층에서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우릴 내려다본다.

저자가 쏘았던 화살은 수차례 보았으나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귀와 고고한 콧대를 지닌 엘프.

그리고 처음 보는 형태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공격할 기미가 안 보이는군요, 형님. 국민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요?”

“그깟 이유로 멈출 녀석이 아니야.”

“하면, 기다리고 있군요.”

루페는 활시위를 당기기는커녕 활을 잡지도 않았다.

그저 우릴 내려다볼 뿐이다.

“마음엔 안 들지만…….”

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루페도 성안으로 사라진다.

“버오쉬푸, 시민들을 물려라. 그들에게 용건은 끝났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짧게 끄덕이고 굳게 닫힌 성문에 다다랐다.

황소의 뿔이 새겨진 거대한 석문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양손을 올리고 억지로 열었다.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성으로 들어가자 문이 저절로 닫힌다.

제국 심장부엔 제국 병사가 수십 명이 무기를 겨눈 채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 돌연 그들은 무기를 내리고 길을 텄다.

유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전, 황제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문틈으로 불온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내가 문을 열자, 극 빛은 더욱 강렬해지며 시야를 강타한다.

“…드디어 왔구나.”

맹렬한 붉은 빛에서 루페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든다.

난 미간을 좁히고 음성을 쫓아 그의 위치를 확인했다.

황제의 왕좌에 앉아 있는 엘프, 용사 루페는 환영한다는 듯 허공에 손을 건넸다.

“환영한다, 나의 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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