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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289화 (289/384)

289화

겁쟁이 (7)

닌카시가 입을 크게 벌리자 상어 이빨이 드러난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으니.

“좀 봐달라고!”

좁은 나선 계단에서 제국 병사들에게 목청껏 호소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작은 몸집을 밀착시키고, 도낏자루를 앞으로 내밀어 막고 있던 그녀를 압사시킬 듯 더욱 밀어붙였다.

“기세는 어디로 갔냐, 마족?!”

“내 수제 도끼로 네년이 몸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창녀!”

“옷 입은 꼬락서니를 보라지!”

드워프의 조롱에 닌카시는 어금니를 깨물고 노려본다.

“뭐라고, 새끼들아?!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확 그냥 단체로 씹어먹을 줄까?!”

물론 닌카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개 제국 병사 따위 단번에 제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의도가 있든 없든 제국 병사의 목숨은 무사치 못한다.

당장 당면한 분노보다, 남타르의 지시가 우선이었던 그녀는 함부로 전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위험하면 죽여도 된다며! 그거 지금 아니야?! 땀 냄새 때문에 토하기 전에 후딱 죽여버리자구!”

도검 두 자루로 계단 밑에서 치고 들어오는 창날 받아내던 스킬라도 참다못해 불만을 내뱉었다.

그녀도 똑같은 입장이었으나, 사냥꾼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닌카시보다 인내심이 한계에 내몰린 상태였다.

“진정해, 사냥꾼. 고지가 얼마 안 남았어.”

그녀들 사이에서 호위를 받고 있던 웨르가 스킬라의 폭주를 막았다.

그때 병사 한 명이 동료의 머리를 밟고 닌카시 머리 위를 지나간다.

“방심했군, 마족이여! 네놈의 목을 횃불 대신 장식해주마!”

제국 병사가 손도끼를 쳐들고 뛰어들었건만, 웨르는 그를 태평하게 쳐다봤다.

“이런 노인네를 제국의 심장부에 전리품으로 장식해주다니, 영광스럽기 그지없군.”

“우악!”

순식간에 드워프의 손목을 꺾어 무장을 해제시키고 계단 밑으로 던져버린다.

“하지만 패기에 비해 실력이 부족해. 다음부턴 목소리 말고 그것부터 챙기도록, 젊은이.”

계단 밑으로 떨어진 드워프에 의해 제국 병사가 볼링핀처럼 쓰러졌다.

그 드워프에 맞을 뻔 했던 스킬라가 단도를 그에게 겨눴다.

“던질 거면 말하고 던져! 나까지 떨어질 뻔했잖아! 내 몸에 땅딸보 땀 냄새가 배면 책임 질 거야?!”

“사냥꾼의 날카로운 감각을 믿은 거지. 예상대로 잽싸군.”

“어머 어머, 쉰내 나는 아저씨랑 신뢰 쌓는 건 사양이거든?!”

“이런, 입까지 날카로운 아가씨로군.”

퍽.

닌카시가 도낏자루에 달라붙은 병사의 얼굴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린다.

“사이좋게 떠들 때야?! 빨리 올라가야 한다고! 너희 남타르가 뒤지는 꼴 보고 싶어?!”

“물론 그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웨르는 계단 난간으로 몸을 기울이고 꼭대기 층을 올려다봤다.

수십 층이 남은 아득한 높이의 계단과 그곳을 빼곡히 채운 제국 병사를 보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국 병사가 이 정도로 많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군. 설령 드워프를 넘어간다고 해도 계단이 저리 많아서야 무릎이 남아나질 않겠어.”

“한탄만 하지 말고 대책을 내놓으라고!”

“닌카시, 너도 내 나이가 돼봐. 계단만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니까.”

“그런 건 됐대도!”

대화를 듣고 있던 스킬라가 허리춤에서 밧줄 달린 갈고리를 웨르에게 던졌다.

“화살에 걸고 천장에 쏴!”

“설마, 밧줄을 타고 기어가란 건가?”

“그 방법밖에 없잖아! 아무튼 빨리해줄래?! 코 썩을 거 같거든?!”

“하, 무릎 대신 허리가 작살나겠구만.”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웨르는 서둘러 기다란 철 화살에 밧줄 묶었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으냐!”

계획을 눈치채고 드워프 들이 닌카시를 거세게 밀어붙인다.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걸 제국 병사가 느긋하게 지켜볼 리 없다.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웨르, 그 활 버틸 수 있을 거 같냐?”

“강철궁이라 살살 다룬다면 몇 번이고 쏠 수 있겠지.”

“최대위력으로 쏘면?”

“기껏해야 두세 번 정도.”

“…그럼 하는 수 없지. 웨르, 천장을 뚫을 기세로 쏴!”

용사를 저격하는데 화살을 몇 발이 소모할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활을 내구도를 손상시킬 수 없다.

하지만 시도조차 못 하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무섭겠지만 허리 다칠 걱정은 없겠군.”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웨르는 난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양쪽 팔을 본모습으로 바꾼다.

“부탁한다, 닌카시.”

갈고리를 앞세운 화살을 천장으로 겨냥하고 쏘아 올린다.

슈욱.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올라가는 화살, 그리고 밧줄.

“오냐!”

닌카시가 몸을 돌려 밧줄을 잡았다.

그리고 가공할 만한 속도로 질주하는 위력에 매달려 순식간에 꼭대기 층까지 도착한다.

“다들 꽉 잡아!”

밧줄을 잡고 천장에 박힌 화살을 뽑아 들며 닌카시가 경고했다.

그 사이에 웨르와 스킬라가 도약해 밧줄을 매달렸다.

“으아아아!”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밧줄을 당기는 닌카시.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건지듯 웨르와 스킬라를 순식간에 꼭대기 층까지 끌어 올렸다.

“우와 우와, 진짜 성공할 줄은 몰랐어.”

“그러게나 말이야. 여전히 장사로군.”

떨어지기 전에 간신히 난간에 매달린 그들은 서둘러 계단으로 넘어갔다.

“여긴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너흰 어서 저격지점을 확보해.”

닌카시가 도끼날을 땅에 박고 손을 풀며 말했다.

“혼자서 괜찮겠어? 네가 아무리 세도 작은 녀석들이 한꺼번에 달라붙으면 위험할 거야.”

스킬라의 걱정에 닌카시는 안심시키듯 상어 치열을 만개하며 듬직하게 웃었다.

“땅딸보랑 놀아주는데 설마 다치기야 하겠어.”

“하지만, 널 혼자 내버려 둘 수는…….”

“남 걱정할 때야, 웨르? 드디어 아들놈의 넋을 기릴 기회가 왔는데도?”

웨르는 그녀를 홀로 전장에 남겨둔다는 죄책감에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목적을 되새김질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부탁한다.”

“맡겨만 둬, 한량. 사냥꾼, 너도 서둘러.”

스킬라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냉큼 갈고리와 밧줄을 챙겨 웨르를 따라갔다.

뼈가 시릴 정도로 냉기가 서린 바람이 불어닥치는 성 꼭대기.

그곳에 올라선 그들은 중앙 광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을 보고 황급히 몸을 숙였다.

“정말로 용사를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군.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남자야, 남타르.”

“근데 상황이 심상치 않은걸.”

활시위에 걸린 붉은 빛의 화살, 그리고 공중에 수 놓인 수십, 수백 개의 화살을 보고 스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남타르는 수백 개의 화살에 벌집이 될 것이다.

“먼저 쏴야 돼, 빨리!”

“안 그래도 진즉에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놨어.”

숨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활시위를 당긴다.

과도한 근력에 반듯했던 강철궁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꺾였다.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철제화살을 용사,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 루페를 조준한다.

사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초점은 올곧게 그의 미간을 맺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용사 주변에 있던 수백 개의 화살이 동시에 발광한다.

그 순간, 웨르 또한 활시위를 손끝에서 놓았다.

“…복수.”

슈욱.

하늘에 나부끼는 얼음결정을 꿰뚫고, 공중에 선명을 궤적을 그리며 쏜 일념.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구애받지 않고 화살은 순식간에 용사의 미간에 도착했으니.

깡!

순간, 성 꼭대기로 눈을 돌린 용사의 안경에 맞고 부서진다.

“서, 성공한 거야? 어? 맞춘 거냐구!”

땅바닥에 주저앉은 용사를 보고 스킬라는 확신하며 물었다.

그러나, 웨르의 표정을 보고 입가에 머금었던 승리의 미소는 눈 녹듯 사라진다.

“망했네…….”

그녀는 서둘러 중앙 광장을 내려다봤다.

이마에 생긴 생채기를 손바닥으로 억누르고 있던 루페와 눈이 마주친다.

“안 돼…….”

심장에 화살이 박힌 듯 극심한 공포에 뒷걸음질 친다.

그럼에도 용사의 분노는 피할 수 없었다.

남타르를 향했던 수백 개의 붉은 화살이 그들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제, 기랄……!”

복수에 실패하고, 한탄 섞인 욕지거리를 내뱉는 웨르.

그를 향해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든다.

“안 돼!”

쾅!

수백 개의 화살이 처박히면서 굴착기로 파내듯 성이 무너져내린다.

발을 딛고 있던 땅이 꺼지고, 무수한 잔해와 뒤섞여 떨어지는 웨르와 스킬라.

“안 돼……!”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공중에서 추락하던 스킬라는 허리춤으로 손을 옮긴다.

“리스가 보는 앞에서… 죽을 순 없어…!”

죄책감에 슬퍼할 친구를 떠올리며 생존의 의지를 불태운 그녀는 갈고리를 던진다.

창문을 부수고 창틀에 걸린 갈고리 끝.

제대로 걸려는지 확인할 틈이 없다.

그녀는 부디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웨르를 낚아채고 떨어진다.

쨍그랑!

창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굴러떨어진 스킬라와 웨르.

“아야야…. 아파라…. …어떻게든 살았네.”

뒤늦게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걸 인지한 스킬라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깨에 박힌 유리 조각과 피부 사이로 흐르는 피를 보곤 신음을 삼켰다.

“흉터 지겠네. 진짜 최악이야.”

그녀는 불만을 내쉬곤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제국 병사가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금 한숨을 내쉰다.

“감사 인사는 접어두라구.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까?”

웨르에게 말을 걸었으나 대답이 없다.

그 적막함이 도리어 위기감을 깨웠으니, 스킬라는 옆으로 누워있던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한다.

“…야, 너, 괜찮아?”

거칠게 들썩이는 그의 등에서 네 개의 붉은 화살이 발광하고 있었다.

스킬라는 어째서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는지 깨닫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바보 같긴! 누가 누굴 구해! 야, 살아 있는 거 아니까 빨리 일어나!”

화살을 함부로 뽑는 건 위험하다. 의식부터 되찾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그의 뺨을 때려 의식을 깨우려 해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쿵!

그러던 중, 난데없이 문이 열린다.

제국 병사가 추적했으리라 판단한 스킬라는 재빠르게 일어나 등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무기 내려. 나야, 사냥꾼.”

닌카시가 뜀박질이라도 한 듯 도낏자루를 어깨에 걸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어들어왔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사냥꾼이 내 걱정했을지는 몰랐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여긴 꼭대기에서 한참 밑인데.”

“계단이 갑자기 주저앉아서 떨어졌지. 그런데 난데없이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라. 고층 높이에 창문을 깨고 들어올 놈들이 너희밖에 더 있겠어.”

닌카시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보다, 웨르는?”

“그게…….”

등 뒤로 웨르를 보호하고 있던 스킬라가 몸을 틀었다.

쓰러져있는 그를 보고 닌카시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다가갔다.

“살아 있냐, 한량?”

장난기 섞인 질문에 웨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숨은 쉬고 있으나 기절한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또 뺀질거리고 있냐고 욕도 못 해겠네. …적당히 쉬고 있어, 웨르.”

닌카시는 쓰게 웃으며 찬바람이 들어오는 깨진 창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려고?”

스킬라가 물었다.

그러자 닌카시는 냉철할 눈빛으로 뒤돌아본다.

“원한과 복수는 저 녀석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그리 대답하곤 창문0 너머로 도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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