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겁쟁이 (11)
단 하나뿐인 자식을 땅에 묻은 뒤로, 내 삶은 눈을 뜨나 감으나 악몽의 연장선이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달콤한 꿈을 꿨다.
아들과 소소하게 사냥 대결을 하며 잡은 사냥감을 서로에게 자랑하며 떠들썩하게 웃었다.
사냥이 끝난 뒤엔 말 안장에 사냥감을 눕히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주방에서 접시를 닦고 있던 아내는 오랫동안 달고 살았던 지병을 떨쳐내고 예전처럼 당차게 웃으며 요리를 해줬다.
우리 가족은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테이블에 앉아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저녁을 함께했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뒤, 가족을 품에 안았다.
다신 놓치지 않기 위해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아내와 아들을… 안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따스했던 행복은 차가운 비애로 바뀌었다.
대화할수록 깨닫게 된다.
손끝이 닿을수록 알게 된다.
결국 꿈이다.
그저 기억의 단편을 재조합한 것뿐이다.
그리움을 되새긴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느덧 행복한 꿈은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이건 악몽이다.
…이제 일어나야겠군.
* * *
“저기다! 침입자가 저기 있다!”
“우리가 용사한테 죽기 전에 서둘러 쫓아야 해!”
“문을 닫았다! 다들 밀어붙여!”
우렁찬 고함이 웨르의 귀에 스며들어 뇌를 뒤흔들었다.
고요한 호수에 바위를 던진 듯 혼란스럽게 정신이 각성한다.
“아오, 진짜! 그만 좀 몰려올라구! 우리가 왜 이런 생고생을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어느덧 흐리멍덩한 시야에 초점이 정렬되기 시작하더니, 피와 땀으로 흠뻑 젖은 스킬라가 가구를 옮겨 문을 봉쇄하는 게 보였다.
“사냥꾼…….”
혼자 남았다고 생각한 공간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스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웨르를 돌아봤다.
“까, 깜짝이야. 살아 있었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꽃꽂이라도 한 것처럼 등에 빼곡히 화살이 박혀선 꿈쩍도 하지 않는데, 누가 봐도 시체라 생각하지 않겠어.”
“어쩐지 등이 따갑더니만.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기뻐해 줬으면 좋겠는걸.”
“흥, 됐거든요. 쉰내 나는 아저씨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상체에 붕대 대신 감겨있는 찢어진 천을 확인하곤 웨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런 아저씨를 보살펴 준 건가.”
“착각하지 마. 남타르만 아니었어도 진즉 버리고 갔을 거야.”
“이것 참, 사냥꾼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쿵!
문 앞에 난잡하게 쌓아 올린 가구가 거칠게 들썩인다.
밖에서 드워프가 몸을 부딪치며 억지로 열려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정도면 충분히 잔 거 같은데 이제 나 좀 도와줄래?!”
닌카시가 서둘러 가구에 양손을 올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웨르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돕고 싶지만, 미안하게도 아저씨는 할 일이 남았거든.”
“난쟁이가 도끼를 겨누고 쳐들어오는 것보다 급한 일이야?!”
“물론이지.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묵혀뒀던 일이야. 오늘로써 종지부를 찍어야 돼.”
그리 말하며 근처에 떨어져 있던 강철궁과 철제화살을 양손에 쥐고 일어섰다.
그리고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창가로 향한다.
“바깥 구경하기엔 날씨가……. 자, 잠깐만! 뭐 하려구?!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생각이 일치한 거 같군. 진정한 친구는 마음이 통한다더니만 감동인걸.”
“난 아줌마가 아니거든! 아무래도 화살 맛을 덜 봤나 본데, 도주로가 막힌 상황에서 그 지랄맞은 화살이 또 쏟아지면 이번에야말로 죽어!”
스킬라가 큰소리치며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어차피 난 죽으러 온 거야, 이번에야말로.”
“…그냥 버리고 도망칠걸.”
활시위를 당기며 화살대 너머로 보이는 과녁을 집게손가락 끝으로 조준한다.
난전이 휘몰아쳤던 중앙 광장에서 서서히 부유하는 루페.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죽어 나갔던 동료의 한을 풀 수 있다.
또한 고대하던 자식의 복수를 드디어 이룩할 수 있다.
“미간은 아니지만… 널 죽일 수만 있다면…….”
기회를 놓치기 전에 활시위를 놓으려던 찰나.
불현듯 남타르와 눈이 맞았다.
구태여 대화하지 않아도 그 시선은 웨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쿵!
문이 들썩이며 경첩이 부서진다.
이에 조급함을 느낀 스킬라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될 데로 되라지! 쏠 거면 빨리 쏴버려!”
“…아니.”
“뭐가 아니야?! 복수하겠다면서 왜 갑자기 망설이는 건데?!”
“때를 기다리고 있어.”
“때라니,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머리가 돈 거야?”
쾅!
결국 문이 열리고, 제국 병사가 발길질로 가구를 치우며 떼거지로 진입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제국 병사가 무기를 쳐들며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자 스킬라도 헛웃음을 내쉬며 등 뒤에서 단도 두 자루를 뽑았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네.”
무기를 겨누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제국 병사들.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던 스킬라는 얼마 못 가 웨르 등에 부딪히며 멈췄다.
“아직이야, 아저씨? 도끼가 내 예쁜 얼굴에 박히기 직전이거든?”
“기다려. 조급한 건 너뿐만이 아니야.”
루페의 손에 점차 붉은 빛 망울이 모여든다.
연이은 용사와의 전투에 온몸이 걸레짝이 된 남타르의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것이다.
앞뒤로 시간이 없다. 이젠 결정해야 한다.
웨르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때.
“그만! 이 부질없는 싸움을 멈춰야 한다, 형제들이여!”
“…버오쉬푸?”
“스킬라 님, 제가 왔습니다!”
남타르가 검 끝을 들어 올려 목표물을 가리켰다.
그러자, 거의 손끝을 벗어난 화살은 루페의 뒤통수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다.
슈웅.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화살이 찬란히 빛나며 허공에 새하얀 선을 긋는다.
그 선은 이윽고 루페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안경에 다다랐고.
“드디어…….”
그렇게 중얼거린 웨르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토록 고대한 순간을 맞이한다.
쾅!
* * *
웨르가 쏜 화살은 허공에 선명한 선을 그리며 패자의 돋보기에 다다른다.
“저건!”
공기를 가로지르는 소리에 루페가 뒤늦게 저격을 눈치챈다.
하나, 한발 늦었다. 화살촉이 정확히 안경 이음매에 적중한다.
“안돼…….”
대검에 맞고 생겼던 균열이 안경테로 뻗어나간다.
“제발, 뺏어 가지 마…….”
가뭄에 메마른 땅처럼 일그러진 균열은 안경 렌즈까지 잠식했다.
“힘을, 난, 아직 힘이 필요해! 힘이 필요하다고!!!”
이윽고 균열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더니.
둑이 무너지듯 패자의 돋보기에 가둬뒀던 붉은 악몽의 힘이 터져 나왔다.
쾅!
화약통을 무더기로 터트린 것 같은 폭발음이 중앙 광장에 내려앉았고, 붉은빛은 하나의 기둥이 되어 하늘로 뻗어나가 제국을 검게 칠하던 먹구름을 퍼트렸다.
잠시나마 중앙 광장을 밝혔던 빛기둥은 점점 얇아지더니 공기에 산화되듯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청명한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한 건가.”
난 조심스럽게 중앙 광장을 살펴봤다.
그곳엔 방금까지 부유하고 있던 루페가 무릎 꿇고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다.
한데, 갑작스레 손을 떨며 바닥을 더듬는다.
“뭘 찾고 있나, 용사?”
“힘을 찾고 있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 어서 패자의 돋보기를 찾아 힘을 키워야 한다.”
“그건 이미 부서졌다.”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건 여기 있다. 있을 거야. 있어야 돼.”
“그만 포기해라.”
“힘이 있어야 한다. 난, 그건, 내 것이다. 온전한 삶, 인생, 그것이 여기 있다.”
아무리 말을 붙여도 루페는 혼이 나간 듯 횡설수설했다.
한때 용사라고 불리던 자가 겨우 안경을 잃고 망가졌다.
그 허무함에 불현듯 입 밖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너도 이제 끝낼 때가 됐군.”
대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생각을 고치고 다시 내려놨다.
루페의 목은 내 것이 아니다.
“아들 녀석이 말했지, 동족이 고통받는걸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의연한 발걸음으로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는 웨르.
“난 가지 말라고 했어. 아내를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 아들자식마저 잃으면 도저히 살 자신이 없었거든.”
그는 루페 앞에 서고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내려봤다.
“정의로운 성격은 지어미를 닮은 건지 결국 그 녀석은 떠나더군. …비겁한 나와 다르게 말이야.”
품 안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용감히 전장에 섰겠지. 자기가 다치든 말든 열심히 싸웠을 거야. 그리고 진정한 전사로서 생을 마감했어. 아들의 부모로서 정말 자랑스러워.”
특이한 형태의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그건 웨르의 아들을 죽인 루페의 화살촉이었다.
“그런데 운명이란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나, 결국 살아남는 건 우리 같은 겁쟁이들 뿐이라는 게.”
화살촉을 높이 들어 올린다.
“안 그런가, 용사?”
용사란 단어를 듣고 루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긴 악연이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그제야 드러난 미간에 웨르는 화살촉을 박아넣었다.
콰득.
용사는 단말마조차 뱉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나, 그의 시선은 죽어서도 여전히 힘을 찾으려 땅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속이 후련할 줄 알았건만, 그 반대였군.”
뇌수에 젖은 화살촉을 떨어트리고 웨르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가치 있는 복수였어…….”
그리 중얼거리곤 쓰러진다.
머리가 땅에 부딪치기 전에 옷깃을 낚아챘다.
“고생했어, 웨르.”
드디어 소명을 이룬 것을 담담하게 축하를 해줬다.
그러나 웨르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겐 먼저 떠나보낸 자식 몫까지 살아야 하는 업이 있으니까.
“형님, 괜찮으십니까?!”
상황이 마무리되자, 버오쉬푸가 짧은 다리를 휘저으며 달려왔다.
“다친 곳은… 벌써 아물었나 보군요.”
“나야 늘 그렇지. 그나저나 얘기가 잘 풀린 거야?”
버오쉬푸 뒤에 제국 병사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서 있는 걸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형님들의 용감무쌍한 박동 소리가 형제들의 심금을 울린 게지요!”
“재밌는 칭찬이군. 아무튼 고생했어.”
불현듯 버오쉬푸가 고개 숙였다.
“형님, 제국을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 버오쉬푸와 형제들이 진 빚을 분골쇄신하여 갚겠습니다.”
“그러냐. 그럼 바로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난 웨르와 곳곳에 쓰러진 부상병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병상 좀 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