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밑 빠진 유혹 (10)
마치 연쇄 반응처럼 단 하나의 섬광은 여기저기 충돌해 빛을 일으켰다.
뒤늦게 열기가 한차례 퍼져나가고 후폭풍이 주위 건물과 흙더미를 파헤쳤다.
이윽고 재난이 완전히 사라졌으나, 머릿속을 울리는 이명은 쉽사리 떠나가지 않았다.
그 혼란을 일깨운 것은 바로 청각이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빗방울처럼 땅에 어질러졌다.
그 시끄러운 소리가 마침내 끝났을 때, 마지막으로 그녀가 떨어졌다.
“라마슈투.”
황급히 뛰어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마치 불구덩이에 던져진 장작처럼 신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검게 그을리고 회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 있단 거지만, 그마저도 연소할 것이 없어 사그라드는 불씨처럼 금방이라도 꺼질듯했다.
서둘러 치료해야 한다.
그러나 내겐 포션도 없고, 치료마법도 사용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용사가 그렇게 놔둘 리 있겠는가.
슉.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오른 얼음 창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더러운 짐승년 같으니라고!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
아귀힘으로 창을 깨부수고 카르나를 쳐다봤다.
마법구를 잃고 평정심도 잃었는지 여유로움이란 가면을 벗어던지고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노려보고 있었다.
“마력 제어 장치를 단번에 풀어서 마법구를 단번에 없애? 자기가 뒤지든 말든? 이런다고 고귀해 보일 거 같아? 지금 그 꼴을 봐! 그래봐야 넌 더러운 마족의 역겨운 하수인밖에 안 돼! 알아?!”
비단 분노는 표정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거세게 발광하는 마법구 세 개가 그녀 등 뒤로 떠올랐다.
그 폭발 속에서 몇 개 건졌나 보군.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라마슈투, 넌 선을 넘었어. 아주 제대로 넘어버렸다고! 쉽게 죽을 생각은 버려!”
카르나가 지팡이를 쳐들자 마법구가 발광한다.
교전해야 할까, 후퇴해야 할까.
그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물론 싸워야 하는 건 알고 있다.
수십 개의 마법구를 세 개까지 줄였다.
라마슈투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를 방치했다간 머지않아 숨이 끊길 것이다.
도박이지만 아사쿠 쪽과 합류할 수 있다면 군의관과 성직자, 포션의 도움으로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쓰레기 같은 마족의 앞잡이들이 같으니라고! 당장 여기서 존재 자체를 말소시켜주마!”
지팡이의 마법석이 마력을 머금고 붉은빛을 방출한다.
어쩔 수 없나.
주위에 있던 대검을 잡고 일어섰다.
또다시 마법이 휘몰아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난 그녀에게 달려들고자 자세를 취했다.
하나, 뒤편에서 울려 퍼지는 짐승의 뜀박질 소릴 듣고 잠시 전의를 풀었다.
살의를 담은 저돌적인 돌진은 끊임없이 이어져 등까지 접근했고.
땅을 박차며 머리 위로 이어졌다.
“…토끼 수인?”
한쪽이 반절 잘린 분홍빛 토끼 귀를 휘날리며 뛰어오른 텐덜.
그녀는 허공에 분홍 선을 그리며 카르나를 향해 질주한다.
“윽, 뭐 저렇게 생겼어?”
마치 굶주린 짐승이 고기를 보고 군침을 흘리듯, 입은 초승달처럼 기이하게 찢어졌고 턱밑까지 내려온 기다란 혓바닥에선 침이 뚝뚝 떨어진다.
그 모습에 혐오감을 느낀 카르나는 지팡이의 목표를 그녀에게로 바꿨다.
“에어 커터!”
무형의 칼날이 텐덜을 베어 가르고 내게로 온다.
난 대검을 들어 올려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으나, 그녀는 방어 능력이 전혀 없었으니 식칼로 자른 토마토처럼 온몸이 토막 났다.
“한낱 짐승 종 주제 어딜 인간에게 더러운 침을 묻히려…….”
혐오감으로 물들었던 표정이 이번엔 썩어들어간다.
땅바닥에 흩뿌려졌던 텐덜의 피가 나무줄기처럼 퍼지더니 토막 났던 신체를 끌어 모아 원형으로 복원시켰다.
위기감을 느낀 카르나는 부활, 죽음을 초월한 텐덜을 향해 마법을 연사했다.
“아이스 스피어! 라이트닝 웨이브! 플레어!”
얼음 창에 고슴도치가 돼도, 전격이 발부터 머리끝까지 휘몰아쳐도, 고열의 불덩이가 집어삼켜도 그녀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미친 짐승 년이! 블링크!”
톱날 같은 이빨로 물어뜯기 직전, 이동마법으로 회피한 카르나가 또 한 번 지팡이를 겨눈다.
“문 라이트!”
돋보기에 비추듯 달빛이 모여 순식간에 텐덜의 사지를 빙결시킨다.
냉기의 빛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텐덜은 아직 멀쩡한 머리를 이리저리 휘둘러 상체까지 올라온 얼음을 털어내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입을 크게 찢으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리고, 카르나의 목을 쳐다보며 기다란 혀로 입맛을 다셨다.
“도, 도대체 뭐야? 너, 너희 도대체 뭐냐고?! 라마슈투도, 너도, 이년도! 너희 같은 괴물들은 역사에 없단 말이야!”
“하면, 네년은 미래에서 왔단 소리군.”
문득 카르나가 노려봤으나,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역사가 바뀐 기점이 너희 용사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고.”
“하, 그래!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우리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겠지! 근데 어쩌라고?! 한번 바뀐 미래, 두 번 세 번이건 바꾸면 그만이야!”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군. 어째서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 건지 아직도 모르겠나?”
“두말할 것도 없이 잘 알고 있지. 우리 때문이란 거 아니야?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카르나가 내게 삿대질한다.
그 손가락은 왼쪽 눈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다.”
“뭐?”
“너희가 만든 혼돈이 우릴 만들었다.”
“그게 무슨 말…….”
하나둘 피어오른 횃불이 빼곡하게 주위를 밝힌다.
“이번엔 우리가 너희에게 혼돈을 주마.”
불씨를 모은 자는 신의 뜻을 알리는 자고, 신의 대변인을 섬기는 자였으며, 신을 혐오하는 자였다.
“당신들이 왜?”
병상에서 일어나 태연히 걸어 다니는 성녀 얼라이먼트, 법국 병사들을 집결시킨 교황 락데드,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온 아사쿠와 줄라이.
그들은 내 등 뒤에 서서 용사와 대치한다.
“라, 라마슈투!”
병사들 사이로 줄라이가 뛰쳐나와 라마슈투에게 다가갔다.
“…안돼. 제발, 라마슈투. 제발.”
새까맣게 숯덩이가 된 그녀를 보곤 금세 울상이 된 채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람을 초월한 힘과 재능, 분명 줄라이는 라마슈투가 쓰러지리라곤 절대 생각 못 했을 터.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미약한 숨결, 처참한 몰골을 한 채 꼼짝도 안 하는 모습이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이윽고 뒤늦게 찾아온 미안함이 파도가 되어 지금까지의 소홀함을 들추고, 라마슈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달았다.
“미안해. 제발 용서해줘.”
라마슈투의 손을 들어 올리고 사죄를 연호하지만,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괜찮단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했다.
“심각하군요. 당장 치료해야 합니다.”
아사쿠가 상태를 살피곤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내 라마슈투 입술로 흘려보냈다.
포션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지만 지금으로선 충분히 도움이 됐다.
그도 그럴 게 치료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성직자가 널려 있지 않은가.
“여, 여기 좀 도와주세요. 제발 라마슈투를 살려주세요.”
줄라이의 호소를 듣고 성직자들이 모여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죽고도 남을 부상이었으나, 영웅의 육체를 기반으로 탄생한 라마슈투는 다르다.
치료마법과 포션으로 고비만 넘긴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넷째가 이렇게 당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둘째.”
“상대는 용사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소임을 다했다. 그것보다 준비는 끝났나?”
“설마 빈손으로 왔겠어. 이제 방해꾼만 처리하면 돼.”
그리 말하며 아사쿠는 카르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그게 가장 힘들지만.”
떨리는 눈동자로 우리를 둘러보던 그녀는 불현듯 미소 지었다.
“아, 그런 거구나… 저를 도와 법국에 쳐들어온 마족들을 소탕하러 온 거죠? 내 말 맞죠? 네?”
물음에 답하고자 락데드가 한 발짝 내디딘다.
“교황으로서 용사에게 청하겠소. 당장 무기를 거두고 그들에게서 물러나시오.”
“뭐? 무기를 거두라고? 그새 노망이라도 난 거야? 개소리 마! 이 새끼들은 마족의 하수인들이야! 너희 법국에 쳐들어온 적군이라고!”
“법국은 더는 부질없는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오. 부디 그대도 신의 뜻을 따라주길 바라오.”
“언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족을 벌하는 게 법국의 소명이라며! 네가 섬기는 주인이 그렇게 말했잖아!”
“이 모든 건 신의 뜻이오. 성녀님이 그리 말씀하셨소.”
“말도 안 돼. 애초에 저년은 어떻게 일어난 거야. 인체 변형마법으로 들쑤셔도 돌아오지 않았잖아!”
“신의 기적이 성녀님을 일으키셨소. 그리고 말씀하셨소, 법국의 중심을 쑥대밭으로 만든 용사를 멈추라고 말이오.”
“…그건 뭐야? 마치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카르나가 뒷걸음질 친다.
“전부 너희를 위해서였어! 대서고가 이렇게 된 건, 어, 어쩔 수 없는…….”
“이곳에 오면서 추기경에게 들었소. 그대가 지식의 보고를 무너트렸다고. 또한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전부 그 새끼가 자초한 일이야! 애초에 그놈은 마족한테 빌붙으려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용사인 내가……!”
“용사는 어디까지나 왕국에 통용되는 칭호니, 그대가 추기경을 벌할 자격은 애초에 없소.”
“윽, 이런 멍청한 야만인들… 내가 누굴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인정 못한다는 듯 어금니를 깨문 카르나.
심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그녀에게 선고하듯 말한다.
“포기해라. 네 이기심은 여기서 끝이다.”
그 말은 카르나가 이룩하려 했던 모든 것이 실패했음을 뜻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무릎 꿇었다.
혹 이대로 좌절하고 잘못된 이념을 내려놓으려는 걸까.
“…하.”
그럴 리 있겠는가.
헛웃음으로 시작된 웃음소리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보기 흉한 폭소로 번졌다.
“왜 변명하고 있지? 아무리 인간이라도 마족 편으로 돌아선 이상 인류의 적이잖아. 그러니 너희를 죽이는 것 또한 정당한 일이지.”
짧게 주문을 읊더니 점점 하늘로 떠오른다.
“멍청이들은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돼.”
용사의 지팡이에서 쏟아지는 불온한 마력, 법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발언에 병사들은 압도당한다.
차라리 도망칠까, 그 고민이 병사들 사이로 퍼졌으나.
“신자들이여.”
그 어수선함을 줄곧 침묵하던 얼라이먼트가 바로잡았다.
“한때 사람을 구원하려던 자가 이젠 국가를 소멸시키려 합니다. 그러한 존재에 맞서는 건 필시 죽음이 동반할 터. 하나, 귀중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의식엔 반드시 신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딘다.
“애석하게도 저는 오늘 달빛이 차오를 무렵 신의 인도를 벗어났고, 더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그분께선 저희를 버리지 않았으니.”
이윽고 줄라이 앞에서 멈춰선 얼라이먼트.
“새로운 성녀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성녀님, 저희에게 그분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시지요.”
전 성녀가 재촉하자, 줄라이의 눈물이 라마슈투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성녀는 증오가 끓어오르는 눈동자로 용사를 올려다본다.
“…라마슈투를 이렇게 만든 악인을 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