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비루한 목적 (7)
삼목산 던전, 닌카시의 술집.
그곳에 모인 닌카시, 라하르, 샤마쉬, 이슘, 그리고 헤기르.
던전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순혈들은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같은 던전에 있지만 각자 맡은 구역이 달라 만날 기회가 적었다.
때문에 오랜만에 술자리는 옛친구를 만난 듯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마왕은 이르칼라님이 되겠군요.”
라하르의 한마디에 수호자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힘겹게 입을 연 건 이슘이었다.
“괜찮을까요?”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담긴 질문, 그건 수호자들도 똑같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고민이었다.
“계속 걱정돼요. 정식으로 마왕이 된 이르칼라 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저 상태면… 그분의 폭주가 저희한테 향하진 않을까 하고요.”
“하면, 그분을 배신하자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선생도 아시지 않습니까. 패배자에겐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리 말하곤 라하르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 저희에겐 남타르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억제기가 되어주실 겁니다.”
“그대는 그자에 대한 믿음이 두텁군.”
두개골을 머리에 뒤집어쓴 샤마쉬가 푸른 안광을 가늘게 뜨며 라하르를 떠보듯 말했다.
“그러면 누구에게 충성하란 겁니까. 저희는 이제 순혈도 마왕군의 장군도 아닙니다. 한낱 남타르님의 병사일 뿐이죠.”
“만약 그자가 죽는다면 어찌할 텐가? 그자와 함께 땅에 묻히기라도 할 건가?”
“남타르님의 뜻을 이어가야겠죠. 그것이 주군을 섬기는 병사의 마음가짐입니다.”
“남타르가 외면하라면 그녀가 병사를 학살하더라도 방관하겠단 소리로군.”
“…형제께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라하르의 공격적인 눈초리에 샤마쉬는 어깨를 으쓱였다.
“강력한 힘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건 좋지만, 그 힘에 영혼을 팔아선 안 된단 말을 하고 싶었다네. 그대, 맥주의 여왕도 그리 생각하지 않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연신 맥주를 들이켜던 닌카시는 멋쩍게 술잔으로 머리를 긁었다.
“네 말도 맞지만, 라하르 말도 틀린 건 아니지.”
“그대라면 이르칼라를 멈추자는 뜻을 비출 줄 알았네만.”
샤마쉬가 닌카시의 오른쪽 안대를 가리켰다.
이르칼라의 촉수에 의해 눈알이 뭉개진 그때를 떠올린 듯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한이 있냐 없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마음에 응어리가 남아 있어. 하지만 그럴수록 남타르를 믿고 따라야 돼. 맹목적인 복수심은 고통밖에 남지 않으니까.”
칙칙한 분위기를 띄우고자 닌카시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뭣보다 남은 눈깔이라도 지켜야 할 거 아니냐, 캬하하하. 그것보다 계속 마시자고. 너도 그만 자고 얘기에 끼라고, 잠탱아.”
닌카시가 줄곧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잠자고 있던 헤기르의 어깨를 잡고 들어 올린다.
그러자 끈적한 침이 길게 늘어지며 헤기르의 가슴골에 뚝뚝 떨어졌다.
“자게 내버려 둬… 어제 23시간밖에 못 잤단 말이야…….”
“그렇게 계속 자니까 더 졸린 거 아니야. 그것보다 넌 할 말 없냐?”
“이르칼라가 마왕이 되는 거?”
“그래, 인마.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귀찮은 주제에 답하고자 헤기르는 손등으로 침을 닦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사리판 날 게 불 보듯 뻔하잖아.”
정신은 비몽사몽 했지만, 직설적인 말투는 매우 또렷했다.
“이르칼라가 마왕의 상징인 보옥을 찾고 정말로 마왕이 되면, 그야말로 힘과 권력을 둘 다 손에 넣는 거잖아. 분명 그걸 이용해 지금보다 더 날뛰려 할걸. 아마 그땐 남타르도 못 멈출 거야.”
어렴풋이 상상이 되는 미래를 헤기르가 줄줄이 읊었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연히 그들도 이르칼라의 폭주가 초래할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다.
“캬하하하… 역시 그렇게 되겠지.”
닌카시는 쓰게 웃으며 한숨을 흘렸다.
모두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다.
마족을 지키고자 남타르에게 충성했지만, 하필 그가 충성하는 자가 종말을 불러올 이르칼라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그들은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그 끝에 나온 답은 단 하나.
“차라리 남타르가 마왕이 되면 좋을 텐데 말이지.”
닌카시가 중얼거림을 듣고 이슘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타르 씨는 마족도 아니고, 하물며 마왕군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마왕이라니…….”
라하르가 고개를 가로저어 이슘의 의견을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 선생. 남타르 님은 뿔뿔이 흩어진 마왕군을 모아 던전 동맹을 체결했고, 저희가 애먹던 용사를 삽시간에 두 명이나 제거했습니다. 그만하면 자격은 충분하겠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로에 이슘은 더는 반론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한 가지 더 남았다.
“마왕님의 보옥은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과연 남타르 씨가 보옥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강대한 힘 때문에 보옥은 다룰 수 있는 자는 순혈 중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현재로선 가장 가능성 있는 자는 이르칼라와 엔릴뿐이었으니, 둘 중 한 명이 마왕이 되리라 마왕군은 짐작하고 있었다.
“동생이여, 의외로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나, 그 예상을 샤마쉬가 순식간에 깨부쉈다.
“내가 개발한 견고함과 아름다움의 집대성인 칠흑 뼈와 이르칼라가 수여한 무한한 재생력, 그리고 그자의 정신력이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 테지.”
“정말이야, 형? 그럼 정말로 남타르 씨가 마왕이…….”
“될 수 있을 거란다. 아니, 되고도 남을 거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헤기르가 불현듯 코웃음을 쳤다.
“걔가 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
자격과 힘이 주어졌지만 정작 본인이 거절하면 아무 소용없다.
결국 그들의 의논은 한낱 부질없는 고민에 그쳤다.
그러나 닌카시는 어두운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속 시원하게 웃었다.
“대장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린 믿고 따르면 돼. …그걸로 충분해.”
* * *
덴마우스.
청명한 하늘, 푸른 달빛이 내리쬐는 지붕에 작은 털 뭉치가 짧은 다리를 휘적이며 열심히 달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들쥐는 달빛을 머금은 그림자를 발견하자 두 다리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공물을 바치듯 곱게 접은 쪽지를 하늘 높이 내밀었다.
그것을 본 그림자는 혐오감에 한숨을 내쉬고 쪽지를 받아 펼쳤다.
거기엔 정보를 함축한 암호문이 좁쌀만 하게 적혀있었다.
눈살을 찌푸려도 보이지는 잘 보이는 글씨를 태연하게 읽고 네 갈래로 찢어 버렸다.
그리고 그림자에 달린 꼬리가 파도처럼 물결쳤다.
“용사가 두 명 째…….”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리스.
그녀는 불현듯 지붕 밑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내려와, 저녁밥 다됐어.”
또 다른 사냥꾼 스킬라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불렀다.
리스는 거절할까 생각했으나, 문득 식객에게 볼일이 떠오르고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지붕에서 땅으로 가볍게 착지한 리스의 어깨를 스킬라가 장난스럽게 쳤다.
“하여튼 고양이 아니랄까 봐 지붕 좋아하기는. 그래도 맨날 그러고 있는 건 좀 심하지 않니? 내가 다 쪽팔리거든?”
“호위 임무는 주변 경계부터 시작이야. 그러는 자네야말로 방해할 거면 그만 던전으로 돌아가지 그래.”
“싫거든, 그런 칙칙한 곳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남타르랑 널 기다리는 것보단 여기가 훨씬 나아. 물론 훔바바를 못 봐서 아쉽지만.”
“뭐? 자네는 그 역겨운 괴물이 그리워?”
“귀엽잖아. 강아지처럼 말 잘 듣는 게 귀여워.”
리스는 훔바바가 아버지이자 스승인 누스를 죽인 걸 스킬라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같은 제자인 그녀가 안다면 사사로운 감정싸움만 일어난다.
무엇보다 그건 온전히 리스 자신이 매듭져야 할 일이다.
“아무튼 그 역겨운 괴물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흥, 기지배가 비비 꼬여서는.”
가볍게 담소를 나누면서 거점으로 이용하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이 들어오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타르의 동생 릴리프가 생긋 웃으며 반겼다.
“음식 식기 전에 안으로 들어오세요.”
“맛있는 냄새! 역시 릴리프 음식은 항상 기다려진다니까.”
먹음직스러운 향기에 이끌려 스킬라가 쏜살같이 식탁으로 달려갔다.
리스는 그녀를 먼저 보내고 잠시 릴리프를 쳐다봤다.
“이클립스는 안에 있어?”
“네, 케이퍼님과 같이 식사 준비하고 계세요.”
“…그래.”
짤막하게 대답하고 식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의 가림막을 들추고 이클립스를 찾았다.
“어서 와, 리스. 오늘은 비프스튜야.”
“따라와. 할 얘기 있어.”
갑작스러운 호출에 이클립스는 당황했으나, 곧 리스의 표정에서 진중함을 느끼고 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리스는 이클립스는 데리고 어둠으로 물든 뒷골목에 도착했다.
“딱 보니 밥 먹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가 보네?”
“자네들만 있으면 상관없지만 사람 죽는 얘기를 식사 자리에서, 그것도 릴리프 앞에서 하긴 싫거든.”
“리스는 배려심 넘치네. 사냥꾼들이 전부 너 같으면 좋을 텐데.”
상냥한 말투에도 리스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법국에 있던 용사가 죽었어.”
“…카르나 말이야?”
리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어. 게다가 죽을 때도 무척 추하게 죽었다던데.”
“그렇구나… 나름 좋은 친구였는데…….”
“남타르는 곧바로 다음 용사를 사냥하겠지. 그게 나크든 김민호든, 아니면 자네든.”
“나더러 그만 떠나란 얘기를 하려는 거야?”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리스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이제 그만 선택하란 얘기야.”
“무슨 선택?”
“마족을 도울 건지, 아니면 옛 동료의 복수를 할 건지, 혹은 전부 포기하고 도망칠 건지 정해야 돼.”
“전부 어려운 선택지네.”
이클립스는 소탈하게 웃었으나,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은 초조하게 바지를 쥐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이 좋아. 동생들과 친구와 함께하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지금이…….”
“애처럼 굴지 마. 자네가 용사인 이상,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과 달콤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병행할 순 없어.”
“용사는 일상을 누릴 자격도 없다니… 그것참 너무하네.”
“정말 그걸 원했으면 남타르 곁을 떠나 멀리 도망쳤어야 해. 하지만 자네는 용사의 사명감과 죄책감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있지.”
거세게 쥐고 있던 바지를 놓는 이클립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지금의 일상이 계속될 리 없단 것도 알아. 언젠간 검을 들어야 하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구겨진 바지를 손바닥으로 털어보았으나 처음 모습으론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이클립스는 포기한 듯 허탈하게 웃었다.
“언젠간 선택할 거야.”
이클립스는 담담히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리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는 시간이 없어. 도망치지 말고 여기서 당장 정해.”
“지, 지금? 일단 밥부터 먹으면 안 될까?”
“숙제를 계속 밀어두다간 회초리질에 종아리가 부어오를걸.”
“하지만 내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 이 자리에서 정하는 건 조금 그런데…….”
“걱정 마. 정 못 정하겠으면 내가 도와줄게.”
“네, 네가?”
리스는 비웃듯 미소 지으며 그녀 앞에 섰다.
“검을 뽑을 시간이야, 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