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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336화 (336/384)

336화

가위 (8)

이클립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딜문은 큰 소란이 일어났다.

딜문 병사도 그녀가 더 이상 적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마왕을 죽이는데 일조한 용사를 친절하게 맞이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할 터.

용사에 대한 적개심이 나에 대한 충성심을 넘어서기 전에 도피시키듯 서둘러 그녀를 막사로 데려갔다.

물론 이클립스를 데려온 리스도 같이 말이다.

“네가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지 몰랐군.”

이클립스를 방 한가운데 앉혀두고 심문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섣부른 행동인 걸 알고 있었는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게는 생각해. 그래도 꼭 이곳에 와서 얘기하고 싶었어.”

“동생 집이든 아사쿠의 은행이든 안전한 곳은 널렸는데 굳이 여기서 해야겠어? 적어도 사리 분별을 하는 녀석일 줄 알았는데 그새 리스한테 성격이 옮았나?”

“흥분한 건 알겠는데 말조심해야 될 거 같아. 리스가 엄청나게 노려보고 있어.”

“나도 알아.”

뒤통수에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며 이클립스에게 집중했다.

“아무튼 얘기할 게 있으면 나중에 해. 여긴 듣는 귀가 너무 많아.”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라니, 왜 그렇게 조급해해? 딜문 병사 때문에 그래? 아니면 장군들 때문에?”

“그 녀석들이야 진정시키면 그만이야. 문제는 던전 끝자락에 있는 보스지.”

“…이르칼라를 말하는 거구나.”

이클립스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난 순간 멈칫했다.

여태껏 이르칼라의 존재를 이클립스에게 숨겨왔다.

동생한테 들었을 수도 있지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암묵적인 규칙으로 던전에 대해선 서로 묻거나 말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하면, 이르칼라의 정보를 넘긴 건 정황상 딱 한 명밖에 없다.

“협잡질하느라 바쁜 게 누군지 모르겠군.”

리스를 노려보자, 그녀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그렸다.

“거대한 도박판엔 큰 판돈이 필요한 법이잖아. 누구보다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 시답지 않은 내기 때문에 난 모든 걸 잃었어. 그걸 코앞에서 지켜본 게 너고.”

“아무렴, 자네가 멍청한 짓 하기 전에 말린 게 난데 어찌 모를까.”

“너 정말…….”

리스의 멱살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걸 이클립스가 황급히 낚아챘다.

“지, 진정해, 남타르! 내가 결정한 후에 리스가 말한 거야.”

“순서 따윈 중요하지 않아. 리스가 널 가지고 놀게 놔둘 수 없어.”

“설령 날 속이더라도 상관없어. 그것까지 각오하고 여기로 온 거야.”

시선이 날 붙잡은 손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눈동자에 다다른다.

슬픔에 일그러진 눈빛엔 결심도 각오도 아닌,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이용당하는 걸 무서워하면서 리스의 거래를 받아들일 건가.

그렇게까지 해서 날 만나러 왔는데 도저히 돌려보낼 수 없었다.

“말해봐, 무슨 얘기지?”

깊게 한숨을 내쉬고 한발 물러섰다.

하나, 기껏 기회를 줬음에도 이클립스는 문 쪽 방향을 힐끔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나도 문을 흘려봤다.

다행히 혼자인가, 게다가 그녀라면 안심해도 되겠다.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응.”

한참을 주저한 끝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마왕군을 도와주고 싶어.”

“안 돼.”

“윽. 이 정도로 딱 잘라서 거절할 줄 몰랐는데…….”

즉답을 듣고 이클립스는 의기소침해졌다.

살짝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봐줘선 안 된다.

이건 그녀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무모하게 밀어붙일 것 같으니 미리 거절 이유를 말해두지. 첫 번째로 넌 용사야.”

“알고 있어. 예전 용사가 도와주는 건 마왕군도 많이 불편하겠지.”

“불편한 정도가 아니야. 너 하나 때문에 던전 동맹이 와해될 수 있어.”

시선은 이클립스에게 향했지만, 이건 리스한테도 말하는 거였다.

“던전 동맹은 종족의 존망뿐만 아니라 용사에 대한 증오심으로 움직이고 있어. 한데, 그들이 마왕을 죽인 널 가만히 놔둘 거 같아?”

“용서받지 못할 거란 건 알아. 하지만 속죄하고 싶어. 그리고 잘못된 걸 바로 고치고 싶어.”

“그 숭고한 이타심이 저들한텐 위선자의 기만으로 비친다는 걸 모르겠어? 네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 병사들이 반발할 거고, 하물며 용사가 마왕군 편에 선다고 한들 여러 갈래로 나뉜 순혈을 억지로 붙여놓은 위태로운 동맹에 붕괴를 재촉할 뿐이야.”

정론에 이클립스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렇다면 납득할 때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두 번째, 우리들의 적은 네 예전 동료야.”

그 말을 듣고 올곧은 눈동자가 한순간 흔들렸다.

“제국에서 용사를 죽였다고 알렸을 때, 넌 어땠었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어.”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슬퍼했지. 그랬던 네가 그 손으로 직접 동료의 목을 벨 수 있을 거 같나.”

“베, 벨 순 없지만 막을 수는…….”

“어린애처럼 굴지 마. 이건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모험 따위가 아니야. 지저분하고 추악한 전쟁이지.”

“그 정도는 알아. 안다고…….”

이클립스는 혼난 아이처럼 고개를 떨궜다.

이대로 그녀의 결심을 무너트리기 위해 나는 몹쓸 말을 이어간다.

“무엇보다 옛 동료와 마주하고 변심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뭐?!”

“막말로, 용사를 배반했던 네가 마왕군을 배신 못 할 이유는 없잖아.”

힘겹게 내린 각오가 한낱 배신자 취급당하자 그녀는 분을 못 참고 내 멱살을 잡았다.

“넌, 날 그런 쓰레기로 봤던 거야?!”

동요하지 않고 그녀를 직시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그럼 그런 말을 왜 해?!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냐고!”

“내가 이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하겠어?!”

고함치자 그녀는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마왕군은 널 첩자라고밖에 생각 안 해. 마족을 위해 검을 들어봤자 위선이고, 옛 동료에게 검을 겨눠봤자 배신이야. 그게 현실이라고!”

“그게 현실이라도… 난 속죄해야 돼.”

“그러니까 그만해. 무리할 필요 없어.”

“…그만해? 무리할 필요 없다고?”

힘없이 멱살을 놓는 이클립스.

“내가 얼마나 나쁜 부탁을 하는지 알고 있어.”

불현듯 그녀의 두 손이 파르르 떨었다.

“알고 있지만, 바꾸고 싶단 말이야.”

“이클립스.”

“손에서 풍기는 피비린내 때문에 코가 썩어들어갈 것 같아. 정의라 생각하고 휘둘렀던 검에 죽은 사람들이 매일 밤 찾아와 곁에서 흐느끼고 있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무언가를 잡을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살아 있는 매 순간이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야.”

“심정은 알겠지만 이 방법은 아니야.”

“하지만 죄책감보다 앞선 건 무엇보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그녀의 손이 힘겹게 올라와 내 심장 위로 안착한다.

“…남타르, 널 돕고 싶은 마음이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나밖에 없어서겠지.”

“아니. 절대로 아니야.”

이클립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느덧 눈가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나를 광기 속에서 꺼내준 게 너였으니까. 헛되고 잘못된 길에 빠지기 직전에 멈춰 세운 게 다름 아닌 남타르, 너였으니까.”

이윽고 눈물은 굴러떨어진다.

그 깨끗하고 아름다운 선이 도리어 그녀를 지키려는 내 심장을 도려내듯 고통스러웠다.

“…세 번째, 넌 내 은인이야.”

난 부탁하듯 읊조린다.

“동생을 데리고 수도 컬랩스에서 도망칠 때, 넌 적이었던 날 도와주고 동생을 살려줬어.”

“그거야말로 비겁한 짓이었어.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너희 가족을 구했으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구원받았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가족을 구해준 은인이 상처받게 둘 수 없어.”

“남타르…….”

“부탁이야, 이클립스. 전장에서 물러나. 그리고 그때처럼 동생을 지켜줘.”

그건 필시 더럽고 추악한 소망이다.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이클립스가 죄를 씻을 기회를 짓뭉갠 거나 마찬가지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들을 안전한 울타리에 감금한 거나 다름없다.

“나는…….”

결국 마음씨 약한 그녀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발 물러서려 했다.

그때, 불현듯 손뼉 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선수 어디 안 갔네.”

내가 노려보자, 그제야 리스는 손을 내렸다.

“그런데 용사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세 가지의 이유가 너무 이상한데.”

“이상한 거 하나도 없어.”

“글쎄. 마왕군이나 던전 동맹의 반발이 걱정되면, 차라리 던전의 수호자처럼 이클립스를 자네만의 독립적인 병사로 만들면 되잖아. 그래도 만약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자네의 그 잘난 언변으로 반발하는 자들을 지금처럼 구워삶으면 되고.”

“그럼 이클립스가 옛 동료를 죽이게 놔두자는 건가?”

“자네가 손을 올린 그 어깨는, 누구보다 많은 피를 봤던 용사의 어깨야. 옛 동료가 앞길을 막는다고 해도 베고 넘어갈 만큼 강인한 존재지.”

“그렇다 해도 더는 이클립스를 몰아세울 순 없어.”

“몰아세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세 번째 이유, 자네의 이기심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하면 어쩔 건데. 수중에 있는 검을 전부 사용해도 모자랄 판에 제일 강인한 검을 아까워서 못쓰겠다니 이게 가당키나 해?”

“이클립스는 나와 싸우면서 힘을 전부 잃었어. 선천적인 괴력이 남아 있다지만, 그것만으로 용사를 병사로 받아들이기엔 리스크가 너무 커. 그게 네 번째 이유야.”

제대로 된 이유로 반박했다고 생각했건만, 리스는 마치 덫에 빠진 사냥감을 본 듯 미소를 그렸다.

“자네 말이 맞아. 저대로 전장에 내보내봤자 거치적거리기만 할 거야.”

“둘 다 면전에 대고 못 하는 말이 없네.”

이클립스가 눈물을 닦고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유유히 지나쳐간 리스는 문 옆에 섰다.

“그러니 제 구실하게 도와줘야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고, 엉덩방아 찧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 검은색 깃털이 날렸다.

“아오, 겁나 아프네.”

인안나가 바닥에 떨어진 엉덩이 부위를 어루만진다.

“망할 년아, 문을 열 거면 인기척을 내라고!”

“도청하고 있었으면서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네. 그보다 왜 문에 등을 기대고 있었어? 폼 잡고 싶었던거야?”

“시끄러워. 쯧, 사냥꾼 아니랄까 봐 눈치는 빨라 가지고.”

“나 말고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어.”

“저, 정말이냐?”

인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난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으나, 이클립스는 멋쩍게 뺨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눈치챘으면 들여보내 줄 것이지. 이것들이 괜히 사람 쪽팔리게 만들고 있어.”

“정 인기척을 숨기고 싶으면 자네의 부산스러운 날개부터 어떻게든 해. 크기를 손톱만큼 줄이든가, 아님 아예 뽑아버리든가. 그럼 깃털 안 날리고 좋잖아.”

“자랑스러운 날개를 뽑으라니, 그딴 개소리 두 번 다신 하지 마. 그리고 줄이는 것도 이게 한계야.”

“그럼 사냥꾼은 못 되겠네.”

“누가 되고 싶다냐.”

인안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다.

“그래서, 얌전히 숨어 있던 날 왜 끌어들인 건데?”

“왜겠어.”

리스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클립스를 가리켰다.

“자네가 용사의 힘을 되찾게 도와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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