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거꾸로 매달린 고객 (3)
역한 악취를 풍기는 비밀 통로를 끝엔 라멘트 성으로 이어진 계단이 있었다.
오랜 세월 습기에 방치되어 미끌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고, 사람보다 약간 큰 나무판자로 막혀있는 진입로에 다다랐다.
그 판자에 어깨를 올리고 조심스럽게 밀자, 붙어 있던 벽과 판자가 벌어지며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그렇게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간격이 생겼고 우린 그곳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안은 창문은커녕 빛이 스며들 틈조차 없었다.
판자의 정체는 무기 보관함이었고 먼지가 소복이 쌓인 상자와 쓸모없는 물건이 쌓여있는 걸 보아 버려진 창고 같았다.
“이쪽이다.”
어둠 속에서 케이퍼는 익숙하게 문을 찾고 우릴 안내했다.
복도로 들어서자 정갈한 석조바닥이 반겨줬다.
“다시 한번 말지만 라멘트 성에선 언동 하나하나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사냥꾼, 기사단원 중에 비꼬는 말투를 사용하는 자는 없으니 최대한 입 다물고 있어라.”
“물론 관광지에 오면 안내인의 말씀을 따라야겠지.”
“쯧. 릴리프 씨는 왜 저런 독종을…….”
케이프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또한 허리춤에 들고 있던 투구를 쓰고 목적지까지 앞장서서 걸었다.
“삼엄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난 휑한 복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케이퍼를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 내부 순찰을 도는 병사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새벽이라곤 하지만 왕국의 요충지치곤 퍽 이상했다.
“의아할 만하지. 물론 예전엔 내부와 외부 순찰병은 비슷한 비율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왕국은 내부 순찰병을 대거 외부로 변경됐다.”
“그 사건이라니?”
“사건의 진상이 기억을 못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케이퍼.
“몇 년 전 히루 극장이 무너질 날, 운드님을 닮은 수인이 나타나 라멘트 성에 불덩이를 떨어트리지 않았나.”
“기사단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라마슈투가 화약통을 투하한 것 말인가.”
“그래, 그것 때문에 기사단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왕국에선 종말의 마녀가 다시금 재림할 때를 대비해 언제든 외부에서 공성전을 펼칠 수 있도록 경계 방침을 바꿨다.”
내가 계획한 작전이었지만 설마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올 줄은 몰랐군.
한데, 얘기를 듣고 있던 리스가 불현듯 코웃음 쳤다.
“자네의 노리개 마녀가 악명이 자자한걸.”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노리개니 뭐니 하는 단어는 절대 라마슈투 앞에서 하지 마.”
“미쳤다고 그러겠어. 나도 마법에 구워지고 싶진 않아. 그래서 여태 내 쪽에서 말도 안 붙이고 있잖아.”
라마슈투와 리스 간에 접점이 별로 없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리스가 일부러 피해 다니고 있었던 건가.
하긴 라마슈투는 걸작 중에서 가장 강하며, 다혈질이고, 도통 생각을 종잡을 수 없다.
그런 존재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꼼짝도 못 하고 죽을 터.
리스로선 미리 조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확인해둘 게 있다, 마족.”
돌연 케이퍼가 진지한 말투로 묻는다.
“운드님은 돌아오지 않는 게냐?”
왕국의 영웅이자, 독수리 기사단장 운드.
임시 기사단장 케이퍼에게 그녀가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네가 알던 운드는 죽었어. 라마슈투는 완전히 다른 존재야.”
“…혹시나 했건만. 결국 마족의 손에 돌아가신 게로군.”
“그녀와는 무슨 사이였지?”
“악을 뿌리 뽑겠단 이념을 가진 상관, 그리고 그런 영웅에게 존경심을 가진 부하 관계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사뭇 슬픈 목소리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곤란하게 됐군.
만약 케이퍼가 복수심에 딴생각을 품으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뿐더러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하지만 운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내겐 그를 위로할 자격도 없으며, 마족을 멸족한다는 어긋난 광기를 엿본 이상 칭송할 수도 없었다.
난 속으로 케이퍼를 붙잡아둘 이유를 고심하던 중, 그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땐 미처 몰랐지, 운드님이 틀렸다는 걸.”
예상치도 못한 그의 고백에 짐짓 놀랐다.
“임시 기사단장이 되고 이클립스 님을 보필하면서 깨달았다. 악은 마족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였음을 말이다.”
처음 왕국을 배반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계획을 케이퍼에게 제안했을 때, 그는 단번에 승낙했다.
나로선 협박을 안 해도 돼서 다행이지만, 케이퍼가 고민도 안 하고 즉답하는 건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케이퍼의 관점이 바뀐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릴 돕는 거였군.”
“난 한 명의 병사다. 그리고, 자고로 병사는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닌 전쟁을 끝내기 위해 존재하지.”
“우릴 도우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다?”
“그건 아직 모르지.”
자조적인 웃음엔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하겠다.”
증오하는 마족에게 고개 숙이면서까지 이클립스를 지키고, 전쟁을 끝내려는 결심.
그것이 케이퍼의 각오였다.
“의외네. 난 자네가 릴리프의 환심을 사려고, 또 형님 될 분의 점수를 따려고 가담한 줄 알았는데.”
“…명색의 기사단원이 사랑과 신념을 구분 못할 줄 알았나, 사냥꾼.”
“사랑이라, 멋있는걸. 그렇지, 예비 형님?”
헛기침을 뱉으며 리스의 조롱을 묵살했다.
애초에 내가 릴리프의 연애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만약 동생의 상대가 변변찮은 놈이었으면 진즉 처리했을 테지.
그리 생각할 때.
“…사람이야.”
리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녀 말대로 복도 갈림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우린 잡담을 멈추고 인기척을 경계했다.
기사단의 갑옷과 투구로 정체를 숨긴 상태다.
순찰병이든 기사단원이든 우리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
하나, 이윽고 갈림길에서 인기척과 마주쳤을 때 우린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훤칠한 외모,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남성.
“기사단인가.”
인기척의 정체가 다름 아닌 영웅, 지 본디였다.
“무탈하십니까, 지 본디님.”
갑작스러운 영웅과의 조우에도 케이퍼는 당황하지 않고 심장에 손을 올리며 경례한다.
나와 리스도 경례 동작을 따라하며 지 본디에게 예를 갖췄다.
“무탈은 무슨. 나한텐 딱딱하게 인사 안 해도 돼.”
“실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래도. 난 너희들이 친구처럼 대해줬으면 좋겠는걸.”
그리 말하며 지 본디는 친근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문득 그는 우릴 둘러보곤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보아하니 순찰을 도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막사로 복귀하고 있었나?”
“그건…….”
유연하게 대처하던 케이퍼가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자칫 말꼬리를 잡힐 수 있다.
그리고 거짓말이 길어질수록 발각될 확률도 높아진다.
“왜 그러지?”
신중하게 대답해야 하지만, 더 이상 침묵이 이어졌다간 의심이 깊어진다.
하물며 라멘트 성에 잠입할 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오늘 물러서면 두 번 다신 기회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난 진실과 거짓을 섞어 대답하기로 했다.
“저흰 1 왕자님의 호출을 받고 황급히 그곳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1 왕자님이 너희를? 왜?”
“이유는 저희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지 본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봤다.
들통 난 걸까, 난 언제든 주먹을 휘두를 수 있도록 건틀릿을 말아 쥐었다.
“그거 잘됐네. 마침 나도 1 왕자님이 불러서 가는 중이었거든.”
돌연 환하게 웃으며 그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앞장섰다.
우린 투구 틈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일단 잠자코 지 본디를 뒤따르기로 했다.
이건 크나큰 변수다.
서둘러 처리하는 편이 좋지만, 상대가 영웅인지라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떨쳐낼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 본디는 태평하게 웃으며 떠들어댄다.
“오랜만에 라멘트 성으로 복귀했는데 오자마자 불러내다니, 보나 마나 나를 소개하면서 귀족들한테 자랑질 하려는 거겠지. 정말이지 1 왕자는 사람 힘들게 한다니까.”
“그렇습니까. 고생하시는군요.”
그의 하소연에 케이퍼는 서둘러 대답했다.
“고생은 너희가 하지. 분명 불러내서 시답지 않은 걸로 심부름시키려고 할걸.”
“저희는 괜찮습니다. 기사단은 왕국의 검인데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군기 제대로 들었는데. 혹시 방금 한 말 일러바치려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요. 저희 따위가 어찌 감히 영웅님을 뒷담화할 수 있겠습니까.”
“농담이야, 농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
넉살 좋게 케이퍼의 어깨에 팔을 거는 지 본디.
“아무튼 너희도 1 왕자님이 귀찮게 굴어도 참아야 한다? 괜히 심기 건드렸다가, 좌천되거나 심하면 목이 매달리는 경우까지 봤거든.”
“지 본디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본디라고 불러.”
결국 지 본디를 떨쳐내지 못하고 1 왕자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큰 방해물이 생겼지만 이대로 작전을 진행할 수밖에 없겠군.
“어서 들어가자고.”
지 본디가 우릴 대신해 두꺼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따가운 빛과 요란한 웃음소리, 시큰거리는 술 냄새가 문밖으로 터지듯 쏟아졌다.
마력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거대한 방을 휘황찬란하게 꾸몄고, 도박판으로 보이는 여러 테이블에선 수많은 귀족이 둘러앉아 술을 들이켜며 카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히루 극장의 도박장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곳이었으니, 엄숙한 복도 풍경과는 무척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저기 계시네.”
지 본디는 우리를 배려해 앞장서서 귀족들을 뚫고 가장 안쪽 테이블로 안내한다.
의자에 앉은 귀족들과는 달리 홀로 기다란 소파에 앉아 과시하듯 양옆에 창부를 끼고 있는 1 왕자.
황태자 티시를 향해 고개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