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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347화 (347/384)

347화

거꾸로 매달린 고객 (8)

그녀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 안쪽 방으로 향했다.

“드디어 오셨구먼.”

방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건 다름 아닌 티시였다.

포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여유로운 표정과 말투는 인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티시 정면에 앉아 쓴 미소를 흘리고 있던 아사쿠는 날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겨줬다.

우두커니 서서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는 새드너스와 불만인 듯 팔짱을 낀 케이퍼도 내게 시선을 보내곤 다시 티시에게로 눈을 돌렸다.

“황태자 납치사건의 범인들이 전부 모였네. 이 정도로 깔끔하게 날 납치하더니, 정말 훌륭한 작전과 연기력이야. 다들 대단해!”

분노할 줄 알았건만 도리어 인질이 호탕하게 웃으며 칭찬하고 있다.

분위기가 어정쩡할 만하군.

아사쿠도 이를 의식했는지 헛기침으로 늘어진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황태자님은 굉장히… 성격이 좋으시군요.”

“비꼬는 거냐?”

“그럴 리가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겁니다. 납치됐으면서 그리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사쿠는 턱을 집고 티시를 관찰하듯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만 그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저희가 추적 병력을 뿌리친 건 상황을 보면 아실 테고, 마음만 먹으면 황태자님을 고문하고 시체를 광장에 흩뿌릴 수도 있을 텐데요.”

살짝 위협해봤지만, 티시도 말뿐인 협박이란 걸 알고 있는지 코웃음 쳤다.

그는 눈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날 토막 낼 거면 이런 햇빛 드는 곳이 아니라 으슥한 지하로 데려갔겠지.”

“장소는 상관없을 텐데요.”

“상관있어. 넌 제대로 죄의식을 느끼는 놈이니까.”

“죄의식이요?”

“왜 가끔 있잖아, 벌건 대낮에 동물 도축하듯 사람 목을 산채로 잘라내는 녀석들. 그런데 넌 그런 녀석들과는 달라. 어리숙하지만 제대로 감정을 느끼고 있거든.”

“하하하, 얕잡아 보였네요. 이래 봬도 입에 못 담을 짓을 제법 많이 했는데 말이죠.”

그리 말하는 아사쿠.

하나,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실제로 아사쿠의 웃음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자 티시도 이유를 덧붙인다.

“하물며 겨우 화풀이나 하자고 평생을 쫓겨 다닐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국의 황태자를 납치하겠냐. 너희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거 아니야.”

티시는 물 흐르듯 자신이 죽지 않을 이유를 설명했다.

아사쿠도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망나니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진 않으시군요.”

“이 새끼들이 건방지게… 아무튼 밧줄 풀어. 그러면 너희가 사형당하는 날짜를 3일 정도 미뤄줄게.”

“하하하. 3일 동안 고문당할 바에 차라리 붙잡히자마자 죽는 게 낫겠죠.”

“그러면 바로 죽여줄 테니까 밧줄 풀고 술이랑 먹을 거 가져와.”

“죄송합니다. 저희도 자금이 빠듯해서요. 대신 밧줄을 풀어드리도록 하죠.”

새드너스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티시를 휘감고 있던 밧줄을 끊었다.

포박에서 풀려난 티시는 어깨를 돌리며 뻐근한 몸을 풀고 곧장 다리를 꼬았다.

“자, 너희가 원하는 게 뭐야?”

“얘기가 빨라서 좋네요.”

“뜸 들일 게 뭐 있어. 어서 말해봐. 내가 숨겨둔 돈? 마왕군으로서의 명예? 아니면 마왕군을 배신하고 나한테 붙어 권력이라도 얻으려고?”

아사쿠는 그와 똑같이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미소를 그렸다.

“전부를 원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쫓지 말아라, 그런 얘기도 못 들어봤냐.”

“능력이 없는 자나 늘어놓는 속설이죠.”

“욕심부리다간 전부 놓칠걸.”

“그거야 하기 나름입니다.”

티시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돈, 명예, 권력을 나한테 뽑아서 어디다 쓰려는 거냐?”

그의 물음에 아사쿠는 잠깐 날 쳐다보곤 대답한다.

“마왕군을 정식 국가로 만들 겁니다.”

“…하.”

우리의 목적을 듣고 티시가 허무맹랑한 얘기를 들은 듯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소리도 적당히 해야 반응해주지.”

“하하하. 속 시원할 정도로 솔직한 반응이군요. 제 나름대로 계산은 끝났는데 황태자님께선 어디가 불만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티시의 등이 등받이에서 미끄러진다.

“인간, 마족, 수인, 드워프, 엘프 별의별 종족이 마왕 단 한 명을 중점으로 모인 게 마왕군이야. 법국처럼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것도 아니고, 제국처럼 한 종족이 단합하고 성을 세운 것도 아니야. 더군다나 내 왕국처럼 질서정연하게 깃발을 세운 것도 아니지. 한마디로 표현해서 마왕군은 잡종 집단 아니겠어.”

“이 자식이…….”

티시의 막말을 듣고 텐덜이 험상궂은 얼굴을 한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돌발행동하기 전에 난 팔을 펼쳐 길을 막았다.

걸작이기 이전에 마왕군 소속인 그녀가 화낼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티시의 입을 찢어버리거나 위해를 가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간다.

텐덜도 그걸 알고 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어금니를 깨물고 물러섰다.

“구태여 부정하진 않겠지만 말조심해주세요. 그러다가 한 마리 토끼한테 사지가 뜯길 겁니다.”

“그러든 말든, 아무튼 첫 난관도 못 뚫을걸.”

“첫 난관이라 함은?”

“마왕군의 역사와 국가의 토지를 인정받으려면 타국의 승인이 필요하잖아. 말만 승인이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자기네 땅을 넘겨주겠단 얘긴데 땅딸보 새끼들이랑 사이비 새끼들이 좋다고 허락해 주겠냐.”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미 승인 떨어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뭐?”

불현듯 아사쿠가 손을 펼쳐 나를 가리킨다.

“여기 황태자님을 모셔온 둘째가 제국 황제와 의형제 사이거든요.”

“드워프한테 의형제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나 늘어놓자고 황태자님을 납치했을까요?”

“그러면 정말로… 하지만 드워프가 저런 인간도 마족도 아닌 놈이랑 맺었다니… 아, 황제가 바뀌었단 얘기는 들었는데 그게 네놈들 작품이었구나?”

“맞습니다. 새로운 황제 버오쉬푸는 둘째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새로운 성녀 줄라이도 우리 손아귀에 있습니다. 다음은 황태자님 차례죠.”

아사쿠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황태자의 안색을 살피듯 쳐다본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날 왕으로 만들고 삼국의 승인을 받겠단 말이구먼.”

문제의 정답을 맞힌 학생을 칭찬하듯 아사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황태자님을 다소 거친 방법으로 모셔왔죠.”

“뭐, 그래. 너희가 재주 좋다는 건 인정할게. 날 데려온 이유도 알겠고. 근데 제국과 법국을 어떻게 구워삶았을지 몰라도 왕국은 못 할걸.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타국과 달리 왕국은 전쟁에 혈안이 돼 있으니까.”

아사쿠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가는 티시.

“게다가 너희가 날 납치하면서 전쟁 명분에 힘을 실어줬고, 그걸 바탕으로 동생 새끼는 땅바닥에 떨어진 날고기를 본 이리 새끼마냥 더더욱 달려들 거야.”

“아무렴 그러겠죠. 2 왕자 러스틱은 토벌군을 앞세워 진군에 박차를 가할 겁니다.”

“그걸 아는 놈이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해? 제정신이냐?”

“하하하, 글쎄요.”

아사쿠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용사, 영웅, 이단 심문관, 사냥꾼 조합으로 이루어진 토벌군. 듣기만 해도 정말 무서운 조합이죠.”

커튼을 젖히자 창문을 투과한 빛줄기가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용사 두 명을 없애도, 제국과 법국을 전장에 이탈시켜도, 던전 동맹이 힘을 모아 맞서 싸워도 자칫 잘못하면 공멸. 운 좋게 마왕군이 승리하더라도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고, 더군다나 왕국을 무너트릴 수도 없죠. 그 끝엔 분명 전사자도 속출할 테고요.”

이윽고 아사쿠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계획입니다.”

그가 던진 말에 방 전체는 의문에 휩싸였다.

유일하게 답을 알고 있던 난 숨죽여 반응을 살폈다.

얼마 안 가 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그녀를 쳐다봤다.

티시도 입을 쩍 벌리고 아사쿠를 노려봤다.

새드너스도 불안하게 아사쿠와 그녀를 바라봤다.

스킬라와 케이퍼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답을 갈구하는 것처럼 주위를 살폈다.

그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왕군 소속이었던 텐덜은 한 발짝 나아가 그에게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죠, 아사쿠님?”

죄책감에서 시선을 돌리려는 걸까, 아사쿠는 눈을 감았다.

“황태자님을 납치함으로써 2 왕자에게 힘을 실어준 건, 용사와 영웅, 귀족을 포함해 마왕군에게 악감정인 자들을 추려내기 위함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들과 반드시 싸워야 하는 것도, 그 때문에 희생자가 나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걸 의도했다뇨? 마치 마왕군도 죽어야 끝난다는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왜요?! 우린 그저 살려고… 살고 싶어서 싸우는 것뿐인데 왜 죽어야 하냐고요! 우리가 잘못한 게 있어요?! 나쁜 건 전부 왕국이잖아요!”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아사쿠는 한숨을 내쉬고 텐덜을 쳐다봤다.

“왕국이 전쟁에 혈안이 돼 있는 것처럼 마왕군도 복수에 목말라 있습니다. 하지만 마왕군을 집결했던 그 마왕이 죽은 시점에서 이성적인 화해는 불가능하게 됐죠. 이제 전쟁을 끝낼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거 뭔데요?!”

“…타협에 의한 종전입니다.”

“…타협?”

“운 좋게 용사와 영웅을 피해 없이 제거한들, 복수를 쫓는 순혈과 마왕군이 남아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생존이 아닌, 복수를 쫓는 그들을 대거 정리해야 비로소 종전을…….”

“네가 뭔데!”

나와 리스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달려드는 텐덜.

쿵.

그녀는 아사쿠의 멱살을 잡고 벽에 몰아붙였다.

뼈가 비대해지고 근육이 들썩이며 혀를 가슴골까지 길게 늘어트린다.

“네가 뭔데 우릴 정리해?”

몸은 거의 짐승으로 변했으나 다행히 아직 이성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또 죽으라고?!”

“애초에 피해 없이 용사와 영웅을 물리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힘겹게 토벌군을 제거하더라도 왕국을 무너트릴 순 없을뿐더러, 그 이상 진행했다간 기껏 우호적으로 만들었던 제국과 법국이 돌아설 테고, 둘째가 어머니를 흑막으로 만들면서 쌓아 올렸던 종전의 이유도 허사로 돌아갈 겁니다.”

“그래서 동료가 죽든 말든 방관하라고?! 애초에 실패하면 전부 개죽음이잖아!”

“필요한 희생입니다. 그리고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네가 신이라도 된 거 같아?! 착각하지 마, 넌 그냥 쥐새끼일 뿐이야! 오만한 쥐새끼!!”

“…알고 있습니다.”

“뭐? 알고 있어?”

허탈한 목소리가 도리어 텐덜을 자극했는지, 그녀는 짐승으로 변한 손을 그에게 뻗는다.

“차라리 넌 여기서 없어지는 편이 나아.”

우득.

그의 목이 꺾이기 전, 내가 텐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붉어진 눈동자를 돌려 날 뻔히 쳐다봤다.

“넌 왜!!!”

목을 향해 송곳니를 뻗는다.

이빨이 목젖에 닿으려던 찰나, 그녀의 이마를 잡고 바닥에 내려찍었다.

우득.

땅에 처박히면서 텐덜의 목이 꺾였다.

그러나 곧 원래 형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왜… 대체 왜 말 안 해줬어요… 전부 남타르님이 세운 계획이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떨궜다.

“이런 건 제가 비밀을 알았을 때 알려줬어야 했잖아요… 근데 왜…….”

“미안해. 차마 말할 수 없었어.”

“죄책감 때문에요?”

“모든 게.”

“…당신도 똑같아.”

텐덜은 날 밀치며 일어나곤 방을 나갔다.

내가 리스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텐덜을 쫓아갔다.

근처에 있던 스킬라도 눈치 빠르게 친구를 따라갔다.

“이래서 얌전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니까. 그렇지, 둘째?”

아사쿠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악역을 떠맡겨 버렸군.”

“일 시키는 사람이 좋은 소리 듣는 법 있겠어. 미움 받는 건 익숙해. 둘째는 아니겠지만.”

위로하는 건지 아사쿠가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고 티시 앞에 앉았다.

“하하하, 고객을 앞에 두고 소란을 피웠네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흰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황태자님을 모셨습니다. 어떠신지요?”

그는 얼빠진 얼굴을 한 채 텐덜이 나간 문과 아사쿠를 번갈아 쳐다본다.

“어쩌고 자시고 간에, 너희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흰 삼목산 던전에서 온 걸작입니다.”

“그러면 너희 걸작들은 방금 그년, 아니, 그 수인처럼 짐승으로 그러나? 목이 꺾여도 살아나고?”

“설마요. 여섯째의 능력이 유별난 것뿐입니다.”

“살아나는 건 부정하지 않는군.”

“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와 함께하신다면 눈엣가시였던 인물들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고, 명예와 권력을 쟁취하여 왕국에 우뚝 서실 수 있을 테니 황태자님한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겁니다.”

“그 수인을 단번에 제압한 걸 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승낙을 듣고 아사쿠는 능글맞게 웃었다.

“이제야 진솔한 거래를 할 수 있겠네요.”

그의 태도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티시는 고개를 떨궜다.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이만 쉬시죠. 참고로 다른 마음먹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 사냥꾼은 황태자님이 알고 있는 사냥꾼이 아니니까요.”

“방금 그 꼴을 보고 어떻게 도망치겠냐.”

“하하하, 그것도 그렇겠네요.”

“참고로 묻겠는데 내가 거절했으면 어쩌려고 했지?”

질문을 듣고 문득 아사쿠는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꼭두각시로 만들었겠죠.”

꼭두각시가 무슨 뜻인지 티시는 알 수 없었다.

하나, 그의 표정을 보곤 단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그도 어림짐작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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