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속도전 (4)
닌카시의 방어선은 삼목산 던전의 수호자 중 가장 독특했다.
깨진 술병으로 거대한 원을 그린 무대는 마치 술꾼들의 도박 내기를 위해 만들어진 경기장을 연상케 했다.
이른바 투혈의 경기장이라 불리는 곳 중앙에 서서 닌카시는 붉은 도끼를 어깨에 올린 채 맥주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하!”
맥주를 원샷한 그녀는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고 잔을 뒤로 던졌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본디를 보곤 상어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어째서 경기장 테두리가 깨진 유리 파편인지 알게 된 본디는 작게 헛웃음을 내쉬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홀로 강자와의 대결을 고집하는 승부욕… 당신은 변한 게 없네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마왕이 죽고 은퇴했으면서, 결국 옛 버릇 못 고치고 다시 싸움터로 돌아왔잖아.”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하잖아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사람이야. 그저 네가 바뀔 마음이 없었던 것뿐이지.”
아픈 곳이 찔렸다는 듯 본디는 쓴웃음을 삼켰다.
하나,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제안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기면 저와 제 병사들을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게 해 주십시오.”
“캬하하하, 강도마냥 남의 집에 칼 들고 쳐들어왔으면서 이젠 감 놔라 배 놔라 하네. 여기서 당장 네 모가지를 꺾고 저 새끼들도 죽여 버려도 돼. 그게 원래 내 임무고.”
“임무라는 건, 역시 던전 보스가 따로 존재한단 얘기군요.”
“말 돌리지 마, 새끼야. 근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임무를 저버리고 네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방해꾼 없이 저와 대결하는 결론 부족합니까? 당신이라면 충분히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요.”
“물론 혹하는 제안이지. 근데 나도 여기서 밥을 얻어먹는 년이잖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그러면 쓰겠냐.”
“그것도 그렇군요.”
닌카시가 제안에 응할만한 판돈이 무엇이 있을까, 본디는 눈을 감고 고민했다.
그는 잠시 후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정보?”
“곧 토벌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던전 동맹의 핵심인 초목 뱀 던전을 칠 겁니다. 그리고 엔릴이란 자를 처단하고 전쟁을 종식할 겁니다.”
“엔릴과 던전 동맹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보니, 왕국도 허투루 싸움질만 한 건 아닌가 보네.”
그리 말하며 닌카시는 슬쩍 카운터 석에 앉아 있는 라하르를 쳐다봤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닌카시는 호탕하게 웃었다.
“캬하하하, 좋아. 그럼 내가 이겼을 땐 네놈 병사들의 모가지 말고 또 뭘 얻을 수 있지?”
“그토록 원하던 제 목을 가져갈 수 있겠죠.”
“캬하하하, 건질 게 네 목밖에 없다니……!”
발바닥을 쓸며 땅을 고르고 자세를 숙이는 닌카시.
어느덧 상체에서 도마뱀의 비늘이 돋아나더니 그녀의 뺨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거 최곤데!”
땅을 박차고 그에게 주파한다.
서슴없이 그의 목을 향해 붉은 도끼날을 휘둘렀다.
쿵.
그러나 손을 뻗어 도끼날을 붙잡는 본디.
시퍼렇게 벼린 도끼날을 맨손으로 잡았건만, 그의 손바닥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 * *
그들의 대결이 성사됐을 무렵.
토벌군 본대는 아직 어둠을 헤매고 있었다.
아무리 나아가도 좀처럼 적의 흔적이나, 기습, 동향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던전의 끝이 어디일까. 또 소문의 흑막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마치 애태우듯 공허한 어둠이 나크의 초조함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 빌어먹을 자식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진정하세요, 나크님. 아직 공략을 시작한 지 3시간밖에 안 됐잖아요.”
“3시간밖에 가 아니라, 3시간이나 지났어! 그런데도 그 자식은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인걸요. 그리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계속 나아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드로세라의 진정하란 말에 나크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탐탁지 않았으니.
“제길, 토벌군만 아니었어도 혼자서 달려가는 건데…….”
삼목산 던전 공략에 차출된 토벌군이 아무리 정예 병사들로 모아놨어도, 수백 명이나 되는 대군이 동시에 움직이면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을 터.
평소 극소수의 부하를 대동하고 유람하듯 던전을 공략하던 그는 이번 공략이 지체되고 있는 이유가 과도하게 많은 토벌군에 있다고 생각했다.
드로세라는 그의 불쾌함을 어렴풋 눈치챘다.
돌발 행동을 하기 전에 기분을 달래줘야 했다.
“너, 앞에 가서 아까 그 사냥꾼 년 불러와.”
“네.”
명령을 받은 병사는 빠른 걸음으로 선두에서 그녀를 찾았다.
머지않아 수색 정찰을 하고 있던 유피테르가 토벌군 중앙에 있는 드로세라에게 합류했다.
“부르셨습니까?”
“뭐 알아낸 게 있니?”
“그렇다 할 흔적이나 적의 모습은 발견 못 했습니다.”
“흥, 잘난 척만 잘하지 실속은 없구나?”
“…죄송합니다.”
“아무튼 사냥꾼 몇 명 데리고 좀 더 멀리 정찰해봐. 적을 발견하면 싸워도 되고, 도망쳐서 우리한테 알려도 돼.”
“응전하란 말씀입니까.”
“그럼, 대단하신 명문가의 자제님이 혼자 무찌를 자신 있으면.”
“…발견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으면 가봐. 살아서 돌아오든가 말든가.”
모진 조롱에도 불구하고 유피테르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숙이고 선두로 떠났다.
“자기 분수는 아는 모양이네.”
그녀를 쳐다보며 드로세라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나크가 동조하듯 웃는다.
“참나, 못 말리겠네. 쟤는 왜 갑자기 괴롭히는 건데?”
“나크님은 안 재밌어요? 영웅의 장난감이 내 손에 놀아나고 있잖아요. 이런 기회 모처럼 없는데 실컷 괴롭혀줘야죠.”
“캬, 성격 고약하네. 너 어쩌다 그렇게 됐냐?”
“용병 시절에 제가 받은 걸 갚아주는 것뿐이랍니다.”
드로세라는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그 악독한 미소를 멀찍이서 힐끔 쳐다본 유피테르는 한심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러지, 유피테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서두릅시다.”
사냥꾼의 물음에 간단히 답하고 유피테르는 수색 정찰에 나섰다.
그녀와 같은 하늘고래 가문의 사냥꾼이 함께해서 그런지 암흑 속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이윽고 그들 앞에 새로운 갈림길이 나타났다.
유피테르와 사냥꾼은 방금과 같이 바닥의 흔적을 조사했다.
“사람의 발자국입니다.”
“여기도 있군.”
“왼쪽으로 향하는 거 같은데.”
어중간한 흔적과 달리 발자국이 뚜렷하게 찍혀있었다.
한데, 함께했던 사냥꾼 한 명이 조심스레 유피테르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녀는 사냥꾼이 말없이 가리키고 있는 벽을 확인했다.
오른쪽 길의 시야가 닿기 힘든 높은 벽면엔 도르래가 달려 있었다.
도르래에 걸린 줄이 암흑에 물든 천장으로 향해있는 터라 무엇을 매달고 있는지 알 순 없으나, 유피테르는 그것이 함정일 것이라고 단번에 눈치챘다.
“감히 사냥꾼 상대로 하찮은 재주를 부리네요.”
“일단 돌아가서 토벌군에 알려야겠군.”
미지의 던전에서 이만하면 훌륭한 발견이다.
그러나 드로세라는 그걸 알면서도 자신을 조롱할 게 분명했으니, 유피테르는 벌써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사냥감에 집중해야겠죠.”
유피테르는 짧게 중얼거리고 토벌군에 합류하고자 등을 돌렸다.
그때.
돌연 인기척을 느끼고 순식간에 검을 뽑으며 돌아보는 유피테르.
왼쪽 길에 마치 도깨비불처럼 푸른 불빛이 일렁였다.
“적이다.”
가까이 있던 사냥꾼들도 또한 각자 무기를 뽑고 기습을 대비했다.
그 푸른 불빛은 서서히 그들에게 접근해왔다.
어느덧 불과 열 걸음을 앞에 두고 멈춰선 불빛은 서서히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곱상하지만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이 반사됐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사냥꾼들을 둘러보곤 시선을 유피테르에게 고정했다.
“아하.”
짤막한 감탄음.
“서늘하고 용감무쌍한 전의… 당신이 유피테르시군요.”
“당신은 누굽니까?”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누군지 중요하죠. 말해보세요, 당신은 누구죠?”
“이게 무슨 수작질입니까?”
사냥꾼이 유피테르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말려들지 마. 도발하는 거야.”
“걱정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유피테르가 장검을 등 뒤로 넘기며 돌진 자세를 취한다.
“머리를 가져가 용사한테 물어보면 당신이 누군지 알게 되겠죠.”
“이런, 전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요.”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말해보세요. 당신은 사냥꾼 유피테르입니까?”
수호자 이슘은 사냥꾼 유피테르에게 묻는다.
“레아입니까?”
질문에 놀란 듯 숨을 들이마신다.
어째서 그가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은 단번에 유피테르의 감정 속 편린을 자극했고, 그녀는 그에게 돌진한다.
“넌 뭐야?!”
쏜살같이 달려가 그에게 검을 휘두르지만 살을 베는 감촉은커녕 검날은 허공을 가른다.
그녀가 허무하게 검을 휘두르는 틈에 이슘은 한 발짝 멀어졌다.
“놓칠 거 같아!”
곧바로 쫓아 검을 휘두르는 유피테르.
“말해!”
다시 한 번.
“말하고, 네가 그걸 어떻게……!”
다시금.
“어떻게 알고 있냐고!”
다시.
“너 누구야?!”
이윽고 검날이 허상을 갈랐을 때.
문득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횃불도 없이 홀로 어둠 속에 남겨진 유피테르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사방을 경계했다.
달그락.
순간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생존본능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드디어 살점을 베는 감촉이 검날을 타고 손잡이로 전해진다.
그리고 상대는…….
‘…상대는 마족이야.’
상대는 용암처럼 피부가 녹아내렸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구멍엔 구더기가 들끓었다.
게다가 사람의 머리에 갈고리를 박아 넣고 그걸 갑옷 대신 입고 있었으며, 하체는 살가죽이 전부 벗겨진 염소 다리를 하고 있었다.
“네놈들이 그자의 부하구나……!”
베야 할 적인 게 확실해졌다.
유피테르는 지체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방금 막 팔을 베어낸 적의 목젖에 검 끝을 꽂아 넣고, 그에게 올라탄다.
그 위에서 눈동자를 빠르게 적의 숫자를 파악한 뒤, 어깨를 발판삼아 도약했다.
촤악.
우선 한 놈.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머리를 반으로 가른다.
가까이 있던 마족이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친다.
“시끄러워.”
뜻은 알아들을 수 없으나 동료의 죽음에 분개한 건 확실했다.
상대가 분노에 취해 이성을 잃었을 때가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촤악.
유피테르는 그가 달려들기 전에 검을 휘둘러 머리를 날렸다.
그러자 등 뒤로 적이 접근해온다.
휘둘렀던 장검을 거두고 겨드랑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멍청하긴.”
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
구태여 돌아보지 않아도 검 끝이 턱밑에서 시작해 정수리로 꿰뚫었을 게 확실했다.
이제 마지막 한 놈.
그자는 유피테르를 흉내 내려는 건지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돌진했다.
“마족 주제에 정교한 몸놀림이지만 그 정도론 부족해.”
촤악.
검을 회피함과 동시에 다리를 베며 그를 넘어갔다.
다리가 떨어져 나간 걸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재빨리 뒤를 돌아 바닥에 쓰러진 그를 향해 검을 내려찍었다.
“──!”
등에 검이 처박히자 마족이 고통스럽게 울었다.
“역겹고 끔찍한 울음소리… 하지만 듣기 좋네요.”
검날을 비틀자, 마족은 몸부림쳤고 이내 죽은 듯 축 늘어졌다.
유피테르는 숨을 토해내고 주변을 둘러봤다.
“우선 합류해야 돼…….”
적이 발견됐다.
어서 알려야 한다.
그녀는 서둘러 감각이 이끄는 곳으로 달렸다.
머지않아 적을 쫓았던 길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갈림길에 벽면을 확인했다.
왼쪽 벽면에 도르래가 걸려 있다.
그럼 적은 도르래가 없는 오른쪽 길에 있다.
확인을 끝마치고 유피테르는 서둘러 본대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무사하길 바라며.
* * *
철퍽.
뒷짐을 지고 던전의 길을 살피던 아사쿠는 피 웅덩이에 발을 들였다.
그는 시선으로 피 줄기를 쫓아 시체를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훌륭하네요, 이슘.”
그가 말하자, 어둠 속에서 푸른 랜턴 불빛이 밝아지더니 이슘이 뺨을 긁으며 나타났다.
“겨우 이 정도로 뭘요. 그냥 잔재주일 뿐인데요 뭐.”
“하하하, 잔재주라뇨. 이슘의 환술 마법에 넷째도 못지않잖아요.”
“저, 저는 라마슈투 씨랑 비교할 게 못 돼요. 아마 그분이 환술 마법을 터득하면 저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쓸 걸요.”
그래서 더욱 무섭다는 듯, 아사쿠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미끼는 풀었습니다.”
“그다음은요?”
“바늘을 문 물고기를 건져 올릴 준비를 해야겠죠.”
아사쿠가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그리고 장검에 도륙 난 사냥꾼의 시체를 보며 웃었다.
“동료의 목을 벤 게 자기 자신이란 걸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