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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374화 (374/384)

374화

권위 (1)

창공에서 떨어진 빛줄기가 폭포처럼 지면에 부딪히고 조각난 파편이 요란스럽게 흩날렸다.

장시간 쳐다보면 눈이 타오를 것 같은 찬란한 빛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으니.

파산되는 빛줄기 속에서 보기 드문 흑발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잊으려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리고 꺼림칙한 미소.

“재밌게 놀았냐.”

김민호.

그의 한마디가 침묵에 잠긴 전장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이것 봐라. 저렙 던전 보스부터 고렙 던전 보스까지 전부 모였네. 이 광경을 실제로 볼 줄이야. 게다가…….”

고귀한 갈기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청록 뱀 엔릴을 올려다보는 김민호.

“…설정으로만 존재했던 녀석도 있네.”

엔릴이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는 네놈은 마지막 용사 김민호로구나.

“이미 나를 알고 있나 보네, 땅의 지배자.”

―할미의 동족이 네놈을 침이 튀겨라 욕하는데 어찌 모를까.

“이래서 인기가 많으면 피곤하다니까.”

김민호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턱 끝으로 나를 지목한다.

“오랜만이야. 히든 몬스터.”

“생각보다 늦게 왔군, 용사.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나는 나대로 세계를 지키고 있었지. 아주 열심히.”

그는 쓰러져 있는 나크를 흘깃 쳐다봤다.

김민호와 눈이 마주친 나크는 두려움에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너희한테 쉽게 당할 녀석은 아닌데… 또 네가 한 짓이냐?”

“사냥꾼의 사약을 먹였다. 보기 좋게 걸려들더군.”

“아, 레벨 다운 포션. 그런 게 있었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참 재주도 좋아.”

문득 나크가 땅을 기어서 김민호의 발을 붙잡았다.

“김민호, 네가 와줘서 천만다행이야.”

“왜 이래 징그럽게. 윈드를 빼앗았다고 욕지거리를 내뱉었잖아.”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나도, 영웅들도 타격을 입었어. 왕국을 지킬 수 있는 건, 저기 있는 빌어먹을 놈들을 쳐죽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먼지를 뒤집어쓰고 어깨에선 피를 흘리는 나크가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함께 모험을 했고, 같은 용사라 불리는 그를 향해 김민호가 코웃음 쳤다.

“싫은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냐?”

“넌… 용사잖아. 마족으로부터 왕국을 지켜야 할… 용사.”

“하, 그딴 설정 집어치운 지 오래야.”

용사로서의 소임을 코웃음 치며 부정하는 김민호.

“애초에 왕국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어. 루페, 카르나, 윈드, 그리고 네놈도 용사는 장기 말에 불과해.”

“장기 말? …웃기지 마. 나는 용사야! 네 새끼의 장기 말 따위가 아니야!”

“그리 잘나신 용사님이 바닥 납작 엎드려서 뭘 하고 있냐?”

“다 네놈 때문이잖아! 네가 제때 왔어도 내가 이런 꼴을 당할 일은… 커억!”

발을 휘둘러 나크를 걷어찼다.

부상당한 팔을 부여잡고 나뒹굴던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김민호를 노려봤다.

“김… 민호……!”

“인벤토리. 바리사다.”

허공에 자그맣게 소용돌이치더니, 일그러진 차원에서 기다란 검을 뽑아 나크에게 겨눴다.

“나크, 넌 훌륭한 녀석이야. 저놈 말대로 보기 좋게 당한 덕분에 마족도 희망이 생겼고, 몬스터와 보스들이 한곳으로 뭉치는 계기가 돼줬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김민호. 김민호!”

“네 역할은 끝났어.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만 죽어라.”

어린애가 질린 장난감을 내다 버리듯.

혹은 필요 없어진 조직 구성원을 냉정히 정리하는 보스처럼.

“지랄하지 마! 나는 용사야! 용사!!”

차원 건너편에서 가져온 검으로 가볍게 허공을 베는 김민호.

가느다란 검날에서 일순간 검기가 사출하더니 나크를 베고 지나갔다.

“나는… 용사…….”

말을 이어가다 말고 피를 울컥 쏟아내는 나크.

분노가 맹렬히 타오르던 눈동자에 공허함이 들어차고, 거친 숨과 욕, 부정을 내뱉은 입은 지면에 처박혔으니.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싸늘히 식어갔다.

“신묘한 검술이군.”

목소리를 듣고 다시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검술이라기보단 장비의 효과지. 방어력 관통 100%의 검기를 발사하는… 뭐, 알아들을 리 없나.”

김민호는 허탈하게 웃고는 검을 차원에 도로 넣었다.

“아무튼 너도 훌륭해. 나크를 죽이고 왕국을 무너트리면, 패배에 당면했던 마족은 없어질 역사 속 승자가 되겠지. 인간의 승리로 끝날 게임의 스토리도 완전히 바뀔 테고, 어쩌면 다른 결말을 맞이할지도 몰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김민호.

“근데 어쩌냐, 내가 와버렸는데.”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용사.

“나는 아직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이세계의 결말은 바뀌지 않아.”

그는 스스로 용사 김민호란 직위와 이름을 버렸으니.

“그저 너희는 나의 유희 거리, 마왕을 이어서 나를 즐겁게 해줄 몬스터일 뿐이지.”

힘을 가진 망나니를 자처하며 우리에게 선언했다.

“…그래서 2 왕자 러스틱에게 전쟁을 선포하라 지시했나? 겨우 네놈의 유희를 채우고자, 그 많은 피와 시체를 부른 거냐.”

“그 자식이 말해줬나 보네. 맞아, 강한 적은 비로소 시쳇더미 위에서 탄생하는 법이니까.”

“오만하지만… 흥미로운 녀석이군.”

“…흥미롭다고?”

“도대체 뭣 때문에 그리도 유희를 갈망하는지, 또 피와 살점과 비명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 공허가 얼마나 깊은지 궁금했었다.”

왕국 병사의 시체와 성벽의 파편이 즐비한 한복판.

“하나, 이제 그딴 건 상관없어졌다. 용사, 내가 왜 던전 동맹을 이곳에 부르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나크를 지금 살려뒀는지 알고 있나?”

나는 검지를 들어 올려 그를 가리켰다.

“전부 오만한 네놈을 부르기 위해서다.”

“오호라, 나를 부르자고 이 난리를 피웠다?”

“그리고 이 세계의 마지막 이질자를 처단하겠다.”

적장을 베기 직전 검을 닦아두듯 엔릴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천둥 벼락이 요동치는 먹구름을 몰고 위에 선 샬라.

칠흑의 날개를 펼치고 투명한 송곳을 겨누는 나나야.

몽둥이를 어깨에 올리고 달릴 준비를 하는 사르파닛.

조악한 뼈 창으로 땅을 짚으며 그에게 고개를 내미는 쿠스.

역류하는 물길처럼 부서진 성벽 파편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우쿠르.

조용히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거는 웨르.

그밖에 모든 던전 보스가 오로지 한 명을 향해 분노의 눈초리를 쏘아댔으니.

김민호는 살기 어린 시선을 만끽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오랜만에 재미 좀 볼까.”

그의 가벼운 한마디가 살육을 부르는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 * *

전장 뒤편, 언덕.

던전의 보스, 마왕군의 간부들이 단 한 명에게 달려드는 웃지 못할 광경을 아사쿠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옆에 있던 라마슈투는 초조하게 샬라와 나나야를 번갈아 쳐다보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와줘야 돼.”

“성급하게 굴면 안 돼, 넷째. 우선 정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쟤들이 죽는걸 지켜볼 수만은 없어. 차라리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서 쓰러트리는 게…….”

“넷째. 마왕군은 우린 마왕군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만, 목적은 완전히 달라. 여기서 왕국의 마지막 보루인 김민호가 허무하게 죽는다면 그걸로 끝이야.”

아사쿠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물며 김민호는 단숨에 나크를 벴어. 섣불리 가세했다간 우리가 죽을걸.”

“겁먹고 있다간 오히려 시기를 놓칠 수도 있어.”

“그것까지 제어하는 게 내 역할이야.”

그리 말하며 그는 전장에 있는 남타르를 쳐다봤다.

엔릴과 던전 동맹에게 선두를 맡기고 물러나 있는 남타르.

그는 훔바바가 달려들지 못하도록 손짓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의 역할이고…….”

불현듯 그들의 뒤에서 이르칼라가 미약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우리 귀여운 아사쿠 말이 맞아. 왜 던전 보스가 맨 마지막에 있겠니. 짱 귀여운 라마슈투가 힘을 뽐내고 싶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아랫것들이 적당히 힘을 빼줄 때까지 기다리──.”

“다른 걸작들은 어디 있어?”

“무시하면 마음 아프잖아! 진짜 그럴래?!”

아사쿠는 쓰게 웃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컬랩스 전역에 흩뿌려놓은 쥐를 통해 그녀들을 찾았다.

“다섯째 리스는 지휘부에서 방금 발을 돌렸고, 여섯째 텐덜도 머지않아 도착할 거야.”

라마슈투는 손톱을 깨물었다.

차원문으로 데려오면 빠르게 합류할 수 있지만, 자칫 김민호에게 포착될 수 있기에 아사쿠가 만류했다.

온갖 던전 보스들이 모여 있는데도, 심지어 카르나와 맞서 싸웠던 자신이 조심해야 할 정도로 김민호가 강한 걸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유일하게 그 답을 알고 있는 이르칼라를 노려봤다.

“김민호는… 얼마나 강한 거야?”

“글쎄. 저놈이라면 혼자서 마왕과 맞짱 뜰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용사들이 전부 모여서 마왕을 쓰러트렸지만.”

“그럼 마왕은 얼마나 강해? …너보다 강해?”

“어머, 갑자기 나 칭찬하는 거야? 부끄럽다, 얘.”

잡담을 나누는 아줌마처럼 이르칼라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긴박한 상황에도 장난질을 치는 그녀가 못마땅했던 라마슈투는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장난치지 마.”

“아이참, 알았어. 하여튼 우리 라마슈투는 고지식하다니까.”

짓궂게 손사래를 치며 상체를 뒤로 빼는 이르칼라.

어느덧 장난스러운 태도는 사라지고, 문득 입가에 그리운 미소를 그렸다.

“마왕은 마족을 초월한 자였어. 나조차도 걔한텐 한낱 미물밖에 안 됐을걸.”

“…그 정도야?”

“응. 만약 김민호가 없었더라면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을 거야.”

그녀는 서서히 시선을 전장으로 돌렸다.

“그래, 김민호만 없었더라면 말이야…….”

그리고 쓸쓸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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