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권위 (8)
―살아야 한다.
―마족을, 세계를 수호할 수 있는 건 저들 뿐이다.
―어둡고, 타락하고, 피비린내 날지라도 희망은 ‘악’이다.
―그러니 돕거라. 그리고 부디 남겨 주거라.
―할미의 소원을…….
전장 중앙에서 샬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샬라의 가슴에 손을 올린 라마슈투는 한껏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른 쪽 손을 허공을 뻗고, 마치 금고 자물쇠를 돌리듯 비틀었다.
쩌적.
유리가 깨지듯 허공이 일그러지며 공간의 파편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라마슈투의 마력 대신, 샬라의 생명력을 희생해 만든 차원문이었다.
“조금밖에 유지 못 해…! 빨리 통과해! 어서!”
아사쿠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텐덜을 향해 눈짓했다.
“텐덜은 첫째와 다섯째를 부탁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챙기도록 하죠.”
“남타르님은요? 게다가 다른 장군님들도 많이 남았어요!”
“우린 어머니가 우선입니다.”
단호한 결단에 텐덜은 숨을 삼키고 그들을 쳐다봤다.
남타르를 필두로 김민호와 전투를 펼치고 있는 보스와 수호자들.
아니, 겨우 시간을 벌고 있는 그들을 보곤 비통한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스님! 훔바바님!”
“알고 있어……!”
어금니가 뒤틀릴 정도로 이빨을 깨물고 일어선 리스는 텐덜과 함께 차원문으로 훔바바를 옮겼다.
“어머니, 등에 업겠습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잠시 참아주세요.”
“어머… 우리 귀여운 아사쿠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 윽…….”
“말씀은 삼가세요. 치명상을 입은 보스 여러분들도 어서 차원문으로 대피하세요!”
미처 제때 도망치지 못한 던전 동맹 보스들이 아사쿠의 목소리를 따라 차원문으로 통과한다.
아사쿠는 잠시 차원문 앞에 멈춰서고 남타르를 쳐다봤다.
이대로 가면 남타르가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자신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비참한 감정을 묵묵히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차원문을 통과했다.
“나머지는…….”
라마슈투는 속속히 차원문을 통과하는 던전 보스들을 확인하곤 남타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로선 최우선으로 살려야 하는 건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돌연 그녀를 향해 바리사다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없애주마, 마녀.”
대비하지 못한 김민호의 기습.
이대로라면 라마슈투의 목이 절단된다.
“네놈 뜻대로는 안 된다!”
라마슈투 앞으로 투명한 송곳이 수십 개가 떨어져 지면에 박혔다.
이윽고 나나야가 착지하며 라마슈투의 등 뒤에서 섰으니.
쨍그랑.
무수히 박힌 송곳이 일자로 뻗은 검기에 맞고 부서진다.
연달아 방해물에 처박히자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검기의 속도가 점차 늦춰지고, 크기가 축소됐다.
힘이 약해지길 기다리던 나나야는 아슬아슬하게 검기가 코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송곳을 휘둘러 깨부쉈다.
“여전히 무식한 놈이로구나.”
나나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라마슈투를 돌아봤다.
“괜찮느냐, 마녀… 샬라?”
라마슈투에게 생명력이 흡수되고 있는 샬라.
친구의 희생을 뒤늦게 깨닫곤 그녀는 입을 벌리며 놀랐다.
“안 돼… 안 된다! 안 돼! 그만해, 그러다가 샬라가 죽어! 죽는다고! 멈추란 소리 안 들려?!”
나나야가 서둘러 멈추려 했으나, 도리어 샬라가 미소를 띠며 저지했다.
“괜찮단다, 짐의 친우여.”
“샬라… 네, 네가 이럴 필요는…….”
“이건 희생이 아니다. 짐이 빌렸던 빚을 갚는 것이다.”
“너……!”
더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그저 상냥한 눈빛으로 나나야를 달랬다.
나나야는 순식간에 울상이 된 채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나나야. 하지만 이번엔 내가 널 데리고 가줄게.”
* * *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가시 박힌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르파닛, 이를 니겔링으로 여유롭게 맞받아치는 김민호.
작은 날붙이에서 묵직한 파철음과 자그마한 불똥을 연달아 솟아올랐다.
“다시 말해봐! 거울의 허상에 빠진 추녀라고?! 감히 나한테! 이렇게 아름답고 고결한 나한테?!”
시큰둥한 표정으로 몽둥이를 튕겨내던 김민호는 불현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너희한텐 질렸어.”
깡!
사르파닛의 무직한 타격을 큰 동작으로 튕겨냈다.
그녀는 거구의 몸짓, 그 체중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뒤뚱거렸다.
“그만 가라.”
니겔링을 허공에 찌르자 공중에 길게 뻗어나간다.
노도와 같이 뻗어나간 검 끝은 사르파닛의 심장을 꿰뚫었고.
이윽고 쨍그랑 소리를 내며 그녀의 마지막 거울을 깨부쉈다.
쩌적.
돌연 사르파닛의 온몸에 균열이 생기더니, 그녀의 육체가 서서히 유리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죽음은 추악한 형태로구나.”
끝내 그녀의 육신은 모래성처럼 지면에 쌓여, 바람결을 타고 서서히 허공에 흩어졌다.
김민호는 손을 휘적거리며 가루를 치웠다.
그런 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 하나.
그 화살은 직선을 그리며 김민호를 향해 주파했으나, 관자놀이를 꿰뚫기 직전 아이기스에 맞고 튕겨 나갔다.
마지막 힘을 몰아넣은 화살이 허무하게 떨어지자 동시에 웨르도 무릎 꿇었다.
“넌 너무 오래 살았어.”
바리사다를 꺼내 웨르의 목을 베려던 찰나.
우크르의 맹독파도가 그를 덮친다.
“그 이상은 안 된다!”
잘그락.
돌연 지면에서 검은 쇠사슬이 흘러나와 김민호의 발을 옭아맨다.
김민호는 허공에 뼈 창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우는 쿠스를 흘겨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안 통한다니까.”
인형을 조종하는 실처럼 공중에서 글레이프니르가 흘러나와 쿠스를 결박했다.
주술사의 힘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김민호는 발힘으로 검은 쇠사슬을 끊어냈다.
그리고 바리사다를 양손으로 쥐고 크게 휘두른다.
“이놈이……!”
지금껏 보았던 검기 중에서 최상의 크기.
그 압도적인 공격에 맹독 파도는 산산이 부서졌다.
“선배한텐 미안하게 됐지만.”
파도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우쿠르.
“넌 반드시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롱기누스를 꺼낸 김민호는 투창 자세를 잡고 그를 향해 내던졌다.
호쾌한 선을 그리며 날아간 창날은 우쿠르의 가슴을 꿰뚫고, 창 자루 중간쯤 박힌 채 멈춰 섰다.
우쿠르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쉰 소리를 내며 입을 뻐끔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떨구고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너도.”
쿠스를 향해 손을 뻗자, 글레이프니르가 빠르게 조여든다.
피부가 찢어지고, 살점이 뒤틀리고, 관절이 끊어지는 소리가 점차 거세지더니.
“…끝내 되찾지 못했구나.”
촤악.
거열형에 처하듯 쿠스의 육체가 오체분시 되었다.
지면에 달그락거리며 굴러다닌 쿠스의 사슴 머리뼈가 이윽고 남타르의 발치에 멈춰 섰고.
나는 쿠스의 사슴 머리뼈를 위를 뛰어올라 김민호를 향해 돌진했다.
육체가 한계에 다다른 탓인지 시야가 흐릿했지만, 김민호의 형체는 이상하리만큼 뚜렷하게 맺혔다.
이윽고 그의 앞에 도착하고 대검을 휘둘렀다.
깡!
있는 힘껏 휘둘렀음에도 김민호가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니겔링에 의해 간단히 막혔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찌푸리고 초점을 김민호에게 맞췄다.
왼손에 쥐고 있던 대검을 놓은 뒤, 재빨리 품에서 보옥을 꺼내 움켜쥐고 주먹을 휘두르려던 찰나.
“이젠 식상할 지경이네.”
갑작스럽게 날아든 아이기스에 맞고 날아갔다.
“이 개자식이!”
닌카시가 그 순간을 파고들어 김민호 등 뒤에서 도끼를 내리찍는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닌카시를 올려다본 그는 눈썹을 으쓱였다.
“멋있는 도끼네.”
일순간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닌카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파라슈를 확인했다.
“이런 제기랄!”
“늦었어.”
도끼를 놓고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떨어지는 파라슈에 의해 왼쪽 어깨가 찢어졌다.
“크으윽!”
왼쪽 팔을 잃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부지한 닌카시는 도끼날에 부딪히고 지면에 떨어졌다.
“이번엔 팔이냐. 아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이번엔 헤기르가 발돋움하며 파라슈 위로 도약했다.
공중에 피로 그림을 그리며 날아든 그녀는 도끼날 등을 짚고 올라선 뒤 곧장 김민호를 향해 발톱을 들이밀며 떨어진다.
“난 너무 큰 것도 싫더라.”
자신에게 떨어지는 태산만 한 백곰을 향해 니겔링을 휘두르는 김민호.
―쿠어어엉!
검날이 옆구리에 깊숙이 처박혔지만 헤기르는 날을 붙잡고 버텨냈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김민호를 짓누를 셈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던 그는 몽둥이를 휘두르듯 헤기르를 니겔링과 함께 날려버렸다.
백곰이 지면을 구르며 라마슈투를 덮치기 직전, 샤마쉬의 뼈골렘이 나타나 간신히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새 쥐구멍으로 도망쳤네. 하여튼 질긴 놈들이라니까. 쯧, 뒷정리는 귀찮은데.”
어느새 이르칼라를 비롯한 걸작과 던전 보스들이 차원문으로 대피한 걸 깨닫곤 김민호는 혀를 찼다.
돌연 김민호에게 음파가 쏟아졌다.
그는 표정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모아 입술에 넣고 휘파람을 부는 라하르를 노려봤다.
“귀찮은 박쥐 놈.”
바리사다를 꺼내 검기로 음파를 절단.
그의 신경이 라하르에게 집중된 사이에 이슘은 푸른빛을 발산하는 랜턴을 높이 들고 손짓했다.
“나이트메어.”
땅에서 칠흑의 안개가 솟아올라 김민호를 감싸 안고 휘몰아쳤으나.
돌아오는 건 절규가 아닌, 페일노트의 화살이었다.
“선생, 피하십시오!”
“으아악!”
미간을 향해 주파하는 화살을 보곤 이슘이 반사적으로 양팔로 얼굴을 보호했다.
그 정도론 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터.
이슘을 지키기 위해 뼈골렘이 양손으로 그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콰드드득!
격풍을 몰고 온 화살 한 발에 뼈가 갈리고 부서진 끝에 이슘 코앞에 멈춰 섰으니.
돌연 이슘의 뺨에 핏방울이 튀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슘은 양팔을 내려 확인하곤 눈을 번뜩 떴다.
“…형?”
산사태처럼 뼈골렘이 무너져내렸다.
그 안에서 나타난 건 샤마쉬.
그리고 그의 등을 꿰뚫고 가슴 중앙에 튀어나온 화살촉.
“오, 나의 운명이여, 역시 온전히 죽지는 못하는구나.”
샤마쉬는 몸에 박힌 화살을 보곤 쓰게 웃으며 피를 토했다.
“형! 형!!!”
쓰러지는 샤마쉬를 급히 받쳐 드는 이슘.
“아우여, 진정하거라. 전장에서 눈을 돌리면 쓰겠느냐.”
“안 돼, 제발, 형…….”
나는 대검으로 땅을 짚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정확히 급소를 꿰뚫었다.
별다른 치유 능력이 없는 그로선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그대여, 나의 보스여, 무사해서 다행일세.”
“대피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걸작들만 대피하면 된다.”
“…명을 받들겠네. 나의 보스여.”
내가 발을 옮기는 동시에, 샤마쉬는 떨리는 손으로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너졌던 뼈골렘의 손이 떠올라 헤기르를 받쳐 들고, 이슘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짓이야, 형!”
“슬퍼 말려무나, 나의 아우야. 이래봬도 나는 운명을 거스르고,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았으니.”
“하지 마! 형! 같이 가야 돼!”
“검은 태양 형제로서 삶을 동반해주어 고맙다.”
“형!!!”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휘둘러 이슘과 헤기르를 차원문으로 던졌다.
샤마쉬는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눈을 감았다.
이제 남은 인원은 두 명.
남은 한쪽 손으로 도낏자루를 잡고 일어서는 닌카시.
그리고 그녀를 도우려고 달려드는 라하르.
“제길! 선생, 제가 가겠습니다!”
“안 된다.”
나는 라하르의 뒷덜미를 잡아 멈춰 세웠다.
“놓으십시오! 닌카시가……!”
“걱정 마라.”
“…선생?”
라하르를 안심시키고 차원문으로 던졌다.
“당신들은 아직 죽어선 안됩니……!”
이로써 남은 인원은 한 명.
닌카시가 남은 한쪽 팔을 휘저어 도끼를 휘두르는 걸 김민호는 가볍게 피하고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커윽!”
발에 맞고 날아가는 닌카시를 품으로 받았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곤 호탕하게 웃었다.
“캬하하하. 멍청한 놈아, 대체 왜 돌아온 거야.”
“너희를 대피시켜야 한다.”
“말했잖아. 너한테 목숨을 바치겠다고. 그래서 우리 수호자가 남아 있는 건데.”
“지금은 아니다.”
“안 돼. 네가 살아야 돼. 네가……!”
닌카시를 차원문을 향해 던지자, 라마슈투가 마법으로 닌카시를 안전하게 받아냈다.
라마슈투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불안한 듯 두 눈을 떨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나나야와 닌카시와 함께 차원문으로 통과했다.
그 끝으로 차원문은 사라졌다.
“왜 저놈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거야?”
“그래야만 네놈이 쫓지 않을 테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마족 입장에선 네가 유일한 희망… 아니다, 말을 말자.”
사르파닛, 우쿠르, 쿠스, 그리고 샤마쉬와 엔릴…….
끝도 없이 펼쳐진 핏줄기와 다양한 형태로 생을 마감한 전사들.
그 광경을 보고 돌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라마슈투가 말하길,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고 했었다.
믿기지 않으면서, 우스운 일이다.
“마지막에 와서 미친 거냐?”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 있겠나.”
“…잘 가라.”
김민호가 바리사다를 들어 올렸다.
내게 남은 건 대검 한 자루와 보옥.
강하긴 하지만 네놈을 이기기엔 부족한 패들이다.
하나, 만약 내가 보았던 미래가 틀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선 죽지 않는다.
분명.
* * *
까아아아악.
바리사다를 휘두르기 직전, 김민호는 검을 거둬들였다.
돌연 괴조의 울음소리와 함께 남타르의 등 뒤에서 후광이 맺혔기 때문이다.
“…이건?”
남타르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빛 저편에서 괴조의 발톱이 튀어나오더니 그를 낚아채고 끌고 들어갔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김민호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식들이 왜 이제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