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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384화 (384/384)

384화

왜바람 (3)

밝은 빛에 의해 미지에 숨어 있던 비밀이 드러나듯, 광구가 붉은 쇠사슬을 밝혔다.

“이렇게 보니 알겠소. 그대는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구려.”

흥미로워하는 솔라의 말투를 듣고 그제야 깨달았다.

쇠사슬의 정체와 사슬을 쥔 자가 누구인지 말이다.

“나와 이르칼라와의 연결을 형상화한 건가.”

“아, 그대의 주인 이름이 이르칼라인가 보군.”

솔라는 턱을 짚고 고개를 내밀어 쇠사슬을 관찰했다.

“그나저나 실로 기묘한 주술이오. 개인의 영혼을 거머쥐는 건 우리 정령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평생, 아니, 영겁의 시간 동안 유지되도록 조합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오.”

“주술? 저주? 언니는 마법 같은 거 못쓰는데 잘못 안 거 아니야?”

인안나의 물음에 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마법에 해박한 자가 주술, 저주에 능통한 건 사실이나, 마법과 주술의 뿌리는 전혀 다르오. 마법은 시전자의 외부에서 발현되는 반면에 주술은 피격자의 내부, 즉 육체와 영혼에 실현되오.”

“…우리말로 번역해줄래?”

“쉽게 말하자면 형태의 차이오. 내가 손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것과…….”

손가락을 튕겨 허공에 빛을 만들어내는 솔라.

“…그대 몸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차이라오.”

인안나에게 손을 뻗자, 입속에서 자그마한 빛 덩어리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그녀는 허공에 침을 뱉고 인상을 썼다.

“아무튼 그 주술인지 뭔지 하는 거… 너는 풀 수 있는 거냐?”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물고 묻는 인안나.

“주술은 악독하고, 저주는 악랄한 수수께끼이오.”

하지만 솔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주술은 뜻 모를 상형문자로 만든 문제를 사람 몸에 새기는 일이오. 게다가 해답이 틀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저주이고.”

“자칫 남타르가 죽을 수도 있단 거야?”

“애석하게도 무엇이 숨겨져 있는진 가늠이 안 되는구려. 죽음, 혹은 그 이상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오.”

“제기랄, 미친 언니 년이… 정말 방법이 없는 거야?”

“하나 있소. 주술과 저주를 해제하는 유구한 방법이.”

“그게 뭔데?”

인안나의 절박한 질문에, 저주에 걸린 당사자인 내가 대신해 답하기로 했다.

“이르칼라가 직접 푸는 것밖에 없겠지.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하지만 그건…….”

“그래, 제일 불가능한 방법이지.”

피처럼 붉은 쇠사슬을 손에 올리자 잘그락하고 쇠붙이 소리가 울렸다.

막상 내가 이르칼라와 연결돼 있단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다.

언제까지고 그녀는 쫓아올 것이다.

나는, 우리는 언제까지고 이르칼라에게…….

“너무 괘념치 마시오. 혹시 모르잖소, 애초에 죽음을 초래하는 저주가 아닐 수도 있소.”

“그런 경우도 있나?”

“죽음과 괴롭힘을 목적으로 둔 저주기에 드물긴 하나, 반드시 목숨을 해치리란 법은 없소.”

“목숨을 해치지 않는다라. 어떨지 모르겠군.”

나는 한번 코웃음 치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지금 당장 이르칼라의 저주를 풀 수 없다면 신경 쓸 필요 없겠군.”

“남타르 말이 맞아. 복잡한 사정은 나중에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팔부터 치료하자.”

눈치를 살피던 이클립스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냉큼 동의했다.

“이클립스가 그리 말한다면.”

솔라는 손가락을 튕기자 내 가슴에 있던 쇠사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팔을 한번 줘 보시오.”

왼쪽 팔을 확인하곤 솔라에게 내밀었다.

그는 손목을 쥐고 팔을 몇 차례 뒤집으며 꼼꼼히 살펴봤다.

“극에 달한 공포에 정신은 비명조차 못 지르고, 극에 달한 고통에 육체는 절로 감각을 끊는 법. 즉 한마디로 요약건대, 그것참 많이도 해 먹었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군.”

“하면, 두 개로 되겠소? 필시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오. 마치 사막 같은 피부는 당장이라도 바람에 쓸려나갈 것처럼 메말랐고, 썩은 육고기처럼 악취를 풍기는 살점은 머지않아 녹아 사라질 것이니, 그 앞에 인간을 초월한 재생력도 소용이 없거늘 그대는 영혼을 깎아가며 저항을 했소. 그 인내심에 경외와 경악을 보내오.”

진찰을 끝낸 솔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자 이클립스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냉큼 다가왔다.

“그래도 고칠 수 있는 거지?”

“시의적절하다고 해야 할까,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히 방도는 있구려.”

마치 마법 라이트처럼 손바닥에 광구를 띄우고 팔에 가져갔다.

“치유 마법인가?”

“그렇소만, 그대가 인간계에서 구경하던 수준의 위력은 아닐 것이오.”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팔에서 극심한 고통이 퍼졌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고통을 참아냈지만,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차마 막을 수 없었다.

“뭐야, 이놈 반응이 왜 이래?”

“치료하는 거 아니었어, 솔라?”

그녀들의 물음에 솔라는 진정하라는 듯 허공에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살육에 취해 잃어버렸던 감각이 돌아온 것뿐이오.”

그리 말하며 광구를 거두어들이는 솔라.

“오늘은 이쯤하고 휴식을 취하구려.”

“팔이 아직 그대로인데 벌써?”

“본래 치료란, 처음 받았던 고통을 길게 늘어놓는 것이오.”

“고통 따위 신경 쓸 시간 없어.”

“그러다간 정신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오.”

“내가 제정신으로 버텼던 거 같아?”

내 눈빛을 보곤 솔라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또한 맞는 말이겠지. 알겠소, 그대가 정 바란다면 그리하리다.”

“잠깐, 잠깐만.”

솔라가 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이클립스가 끼어들었다.

“여기선 솔라의 말대로 하자. 억지로 치료를 이어가면 피차 힘들 거야.”

“하지만 시간이…….”

“삼목산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주저앉을지도 몰라. 하물며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 상태로는 똑바로 생각도 못 해. 이럴 때일수록 우리 차분해지자.”

이클립스의 애원에 나는 슬며시 인안나를 쳐다봤다.

시선을 마주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알겠어. 치료는 천천히 받을게.”

이클립스는 안심하고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솔라를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솔라, 다시 한번 힘을 빌려줄 수 있을까?”

“…지금 소인과 재계약을 하자는 말이오?”

그녀는 결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허리를 숙였다.

“너희의 믿음을 저버린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리인지 알아. 하지만 아직 나한텐 솔라의 힘이 필요해.”

“그리 말한다 한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소.”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엔 정말 실망 안 시킬 거야.”

솔라는 낮게 한숨을 내뱉곤 등을 돌렸다.

“나도 어찌 그대를 돕고 싶지 않겠소. 하나, 정령왕의 윤허가 떨어지지 않는 한 그대를 도와주기 힘드오.”

“솔라…….”

“미안하오, 이클립스. 나는 실피가 되지 못하오. 내게 주어진 자리는 엄격하오.”

이클립스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손을 가슴에 묻고 쓰게 웃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

“…대신 그대가 머무를 동안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소.”

“응. 정말 고마워.”

* * *

얘기를 끝낸 우리는 솔라의 신전 밖으로 나갔다.

말없이 길을 안내하고 있는 이클립스의 등을 살피며 나와 인안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쟤 차인 거 같은데, 가서 위로라도 해줘.”

“인안나 네가 하지 그래.”

“내가? 쟤를?”

“이럴 땐 이성보단 동성의 위로가 도움 될 거야.”

“아무리 그래도 마왕군이었던 내가 용사를 위로하냐.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여기 오면서 부쩍 사이가 가까워졌잖아. 무엇보다 너도 이클립스는 다른 용사들과는 다른 걸 확실히 느꼈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툭 까놓고 말해서, 남자한테 차인 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세상에 반은 남자다, 같은 거면 되지 않을까.”

불현듯 이클립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저기, 차인 건 맞는데 그걸 꼭 당사자 뒤에서 다 들리게 얘기해야겠니?”

뾰로통한 눈빛을 보고 인안나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저놈이 안 도와주는 건 의외네. 헤벌쭉한 면상만 봐도 너한테 홀딱 빠진 거 같은데.”

“당연해. 빛의 정령 자리는 성역에서 최고위직에 속하니까,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하거든.”

“아, 전에 말했던 거.”

인안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말투로 얘기를 끝냈으나, 반면에 나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내 표정을 보고 이클립스는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많은 사람이 정령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야. 여기도 인간계와 마찬가지로 직책이 있고, 규칙이 있어.”

“그렇다는 건 그에 따른 임무도 있단 소리군.”

“맞아. 빛의 정령 중에서 최고 관리자인 솔라는 태양을 관리해. 게헨나 대륙, 성역, 그리고 다른 곳까지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햇볕이 내리쬘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슬며시 하늘 밖으로 보이는 수평선 너머의 빛 덩어리를 쳐다봤다.

저걸 솔라가 관리하는 건가.

“그리고 바람의 정령인 실피는 바람을 실어나르고, 불길의 정령인 테우스는 불씨가 사라지지 않도록 관리해주고 있어.”

“그것 완전 신이나 다름없군.”

“뭐, 말만 들어보면 그렇긴 한데 조금은 달라. 정령은 이미 존재하는 걸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뿐이니까.”

“하면, 그 임무는 정령왕이 부여한 건가?”

“정령왕님은 정령들이 제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조율을 하시는 분이야. 아마도 임무는… 신이 내려준 게 아닐까?”

이클립스도 자세히는 모르는 건가.

어쨌거나 정령들이 누군가에 의해 체계가 잡혀있는 건 확실했다.

그 누군가가 정령왕일까, 혹은 신일까.

나한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조금은 호기심이 들었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그 좀생이가 정령왕한테 쫄아선 널 안 도와주는 게 문제지.”

인안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그 말을 듣고 이클립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그런 말은 실례야. 애초에 정령이 나를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건 아니잖아.”

“그게 왜 당연한 게 아니냐. 넌, 정령이 선택한 용사잖아.”

정령이 선택한 용사.

그 말을 듣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클립스를 쳐다봤다.

“그게 사실인가?”

그러자 이클립스는 뺨을 긁으며 부끄러움을 표했다.

“…응. 이미 옛날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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