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6화. 의심(2)
노숙할 때는 먹기 힘든, 부드러운 빵을 뜯었다. 며칠간 먹지 못했던 스튜에 찍어서 서둘러 먹는다. 아무리 여관이라 해도 결국에는 누구나 돈만 내면 먹을 수 있는 곳. 귀족가의 요리사는 차원이 달랐다. 방금 전까지 베라와 함께 땀을 흘리느라 굶주린 배를 빠르게 채운다. 내 맞은편에 앉은 위니도 허기가 졌는지, 말 없이고요한 식사가 계속됐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빵을 삼킨 후, 덜 말라 촉촉한 머리의 위니가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욕탕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좋아서.”
거짓말은 아니다. 욕탕에들어가서, 거기서 만난 사람이 좋았던 거니까.
“흐응… 목욕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별 얘기 안 했어?”
“무슨얘기?”
“모니카랑, 말이야.”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모니카가 위니와 나를 떼어 놓으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 얘기 안했는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아, 이거, 이거 맛있다구… 밖에서는 이런 거 먹기 힘드니까.”
“… 부족하면 말해.”
갑자기 모니카가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다행히 위니와 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말한 내용들을 듣지는 못한 듯했다. 들었다면 그 성격에 저렇게 평온하지는 못했겠지. 모니카가 기다란 테이블의 가장 상석, 영주를 위한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애초에 자신을 위한 좌석이니 문제될 것은 없지만,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게 불안했다. 꼬인 마음속을 표현하는 것처럼 모니카가 팔짱까지 끼자, 베라를 닮아 거대한 젖가슴이 팔에 밀려 올라왔다.
밥 먹는 데 저렇게 빤히 쳐다보니, 그 눈빛에 체할 것 같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볼을 빵빵하게 빵을 채워넣던 위니도 깨작깨작 먹고 있었다.
“…입에 안맞아?”
“아냐, 진짜 맛있어! 많이 먹어서 그래…”
“당신은?”
왜 굳이 내 의견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속으로도 투정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모니카는 질문에늦게 대답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니까.
“굉장히 맛있습, 아니 맛있소…”
내가듣기에도 한심한 말투의 대답이 나왔다.
“…당신. 말 편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
“…”
십 년도 넘게 불편하게 써왔는데, 그게 말처럼 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물론 모니카는 모르겠지만, 이미 굳어진 습관이라 어쩔 수 없었다.
“후… 당신, 다 먹고 내 방으로 따라와.”
“알겠…소.”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모니카. 다 먹고 간다고 했지? 최대한 느리게, 하지만 체하지 않게 꼭 꼭 빵을 씹었다. 고급 밀가루로 일류 요리사가 만든 빵은 입 안에서 씹을 필요도 없이 녹아버리듯 사라졌지만, 그 질감을 찾으려 열심히 씹었다. 어차피 다가올 시간이라지만, 최대한 늦게 가고 싶었다. 혹시 몰라. 내가 밥 먹는 걸 기다리다가 졸려 모니카가 잠들기라도 할지.
“그, 그럼 나는 피곤해서 이만. 부부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
반면에 위니는 빠른 속도로 식사를 마쳤다. 품위와는 동떨어지게 입안 가득 빵과 물을 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한 후 식당 밖으로 도망쳤다. 믿고 있었는데. 친구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도망친다니. 정말 친구 맞아?
그나마 분산되던 시선을 혼자서 오롯이 받으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체할 듯한 분위기에서, 최대한 천천히. 다행히 천천히 먹느라 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감상 이십 분도 넘게 밥을 먹었는데도, 모니카는 그 자리에서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에게 한 소리 하거나독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차분히 기다려주고 있다.
“다 먹은 거야?”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쳐다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모니카가 손짓을 하고, 메이드가 이내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명분이 없어서 순순히 모니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끼익-
보통의 방보다 두배는 커 보이는, 영주실의 문이 열렸다. 그 문이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악마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 가자.’
딱히 꼬투리를 잡힐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베라와 위니를 따먹은 것? 모니카가 그걸 알았으면 이미 밖으로 내쫓았겠지. 심호흡을 하고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모니카가 나를 기다리면서 문을 계속 잡고 있었다.
업무를 볼 때 사용하는 집무실 책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따로 문이 달려 있는 침실이 보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며칠 써서 익숙해진 침대가… 응?
“침대가 당신한테 너무 작은 것 같아서, 새로 맞췄어.”
엄청나게 큰 침대가 보였다. 확실히 이 침대가 작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디 가서 덩치가 작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 나였지만, 내가 셋이 있어도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은 사이즈였으니까. 이전에 쓰던 침대에 비하면 두 배도 넘게 커진 것 같았다.
“당신 장모님이 사준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써.”
갑자기 이런 걸 왜 샀나 했더니, 베라가 사준 거라면 이해가 됐다. 베라는 이런 침대나 이불 같은 침구류에 대해 돈을 아끼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내가 쓰라고?
“이걸 쓰라는 건…”
“당연히 여기서 자라는 거지. 엄마가 싸운 것도 아닌데 왜 각방을 쓰냐고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데…”
부부가 같은 방을 쓰는 건… 원래 그게 맞긴 하지. 지금까지는 각방을 썼지만, 베라가 뭔가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진심인지, 모니카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모니카가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이건…”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거 아냐. 그 꼴로 자려는 건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잠옷으로 갈아입는 모니카. 몇 번 같이 밤을 보내서 그런지, 내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조금 부끄럽기는 한지, 보이지 않도록 뒤를 돌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잘 때는 속옷을 벗고 자는지, 등 뒤의 후크를 풀자 베라와 비슷한 모양의 가슴이 드러났다. 물론 정면에서 본 것은 아니고, 모니카도 나름 가슴이 커서 등 뒤로도 옆으로 튀어나온 가슴이 보였을 뿐이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에, 눈치껏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왜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나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십 년 넘게 시달리다보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원하네.’
여름이 끝나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더워서 그런지, 잠옷은 바람이 잘 통하는 얇고 가벼운 소재였다. 회귀하기 전에도 몇 번 입었던 기억이 난다. 바지는 없고 긴 가운 형태라서 특이했지.
“오늘은 피곤하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바로 잘거야.”
잠옷을 다 입은 모니카가 침대로 뛰어들듯 누웠다. 고급스럽고 푹신한 침대가 큰 반동 없이 모니카를 받아낸다. 다만 나풀거리는 잠옷이 그 움직임을 잠시 놓쳐, 그 아래 맨살이 드러났다. 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잠옷은 다시 가라앉았지만, 내 다리 사이는 반대로 일어서고 있었다.
‘…베라를 닮긴 닮았네.’
내 잠옷보다 더 얇은 재질인지, 굴곡진 곳에 닿은 모니카의 잠옷이 그 속살을 투명하게 비춘다. 그러니까, 가슴 끝이라던가 하는 곳 말이다. 지금의 모니카는 기억보다 젊어서 그런지, 좀 더 순한 인상이여서 베라를 더욱 닮았다. 내가 발기한 이유는, 성욕이 쌓여 있는데 베라랑 비슷한 걸 봐서 그런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모니카의 옆에, 거리를 조금 두고 누웠다. 침대가 충분히 넓어서 가능했다. 아, 오늘 밤은 오랜만에 베라랑 보내려고 했는데.
“그렇게 싫으면 억지로 여기서 잘 필요 없어.”
“아, 아니오.”
표정관리가 그렇게 안 됐나. 모니카의 말을 듣고 얼굴을 매만졌다.
“…말 좀편하게 하라고 몇 번을… 아니다. 당신 좋을대로 해.”
“…”
누워 있으니 내 다리 사이만 불쑥 솟아 있다. 민망한 마음에 이불을 덮어 가리자, 모니카도 그걸 봤는지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진짜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한다?”
“…어.”
“오늘 밤에 손대면 두고 봐.”
“…”
“…진짜로.”
“알았어.”
애초에 손댈 생각도 없다. 은은한 촛불이 괜찮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회귀 전의 경험이 있는 한 섹스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행히 이동의 피로 때문인지, 생각보다 쉽게 잠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