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70화. 마운트베른(5) (71/178)



〈 71화 〉70화. 마운트베른(5)

텐트 안에 몸을 뉘이고, 모닥불에 비추어 책을 읽는다. 본래 저번 여행에 갈 때도 베라가 읽으라며 챙겨준 책이었지만, 이번에는 말동무가 딱히 없는 탓에 꽤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요새 글 읽는 데 좀 익숙해졌더니, 가끔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 빼고는 나름 문제없이 읽어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것보다 재밌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텐트 밖을 슬쩍 쳐다본다. 모포를 둘둘 두르고 누워있던 신참 기사들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스윽 돌린다. 가문 내에서 지위의 차이 때문에 불편해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저들이 나를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서야 말을 붙일 상대도 없다. 헛기침을 몇 번 하자 하루종일 목소리를 몇  내지 않은 목이 잠겨 있는 게 느껴졌다.

하긴 저들 입장에서는 이번 일행의 대장인 프란첼로가 나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니, 내게 친근하게 굴기도 난처할 것이다. 그  좁은 놈한테 찍혔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래도 가주의 동생이라고 막 대하지는 못해서, 이렇게  닭 보듯 애매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도 딱히 큰 불만은 없다. 밥 잘 나오고  자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됐지 뭐. 좀 많이 과장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괴한에 의해 가주가 변을 당하는 사고가 있어서 그런지, 호위라는 이름으로 데려온 기사들의 수가 꽤나 많았다. 이런 대인원이 이동하면서 이 정도로 편하게 가는 건 힘든 일이다.

지금 나보다 더 편한 곳에서 지내는 건, 손님용 마차에서 밤을 보내는 프란첼로 놈밖에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는 내가 저걸 썼어야  것 같은데… 그때 내 텐트로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에드워드 경, 아직 깨어 계셨군요.”

호랑이도  말 하면 온다더니, 마차 밖에 있었는지 내 시야의 사각에서 튀어나왔다. 오는  알고 있었다면 책 덮고 자는 척이라도 하고 있었을 텐데. 며칠 전의  무례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프란첼로가 나름 정중하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 그렇습니다.”

“잠시 산책이나 하시겠습니까?”

이미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기도 귀찮았지만, 정중한 말투와는 다르게 프란첼로의 눈빛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피로한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에둘러 한 거절을 칼같이 도로 튕겨낼 정도로 의지가 확고했다. 더 이상 거절해봤자 의미도 없고 괜히 기분만 상할 것 같아,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앞서나가는 프란첼로를 따라 걷자, 어둑어둑해진 하늘 사이로 별빛이 쏟아져 내리듯 찬란하게 보였다. …이런 칙칙한 아저씨가 아니라 여자랑 이걸 같이 봤어야 하는데. 못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베라와 위니가 보고 싶었다.

“에드워드 경. 일전의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뭐 신경쓰지 마십시오.”

신경쓰지 말긴 뭘 신경쓰지 마. 마음 같아서는 그 면상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앞으로도 며칠은 더 가야 하는 길이기에 조금 맞춰 주기로 했다.  속 좁은 영감이 무슨 핑계로 괴롭힐지 몰랐으니까.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 의외였는지, 프란첼로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마음이 넓으시군요.”

얼마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다시 나를 깔보는 듯한 말투에 살짝 짜증이 몰려왔지만, 티내지 않고 대답했다. 어두워서 아마 표정은 잘  보일 테니까.

“하실 말씀이라는 건 이게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그… 앉을 데가 어디…”

“그냥 서서 듣겠습니다. 빨리 끝내주시죠.”

프란첼로가 머뭇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대놓고 하기는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그냥 말하지. 기껏해야 자신이 가주가 되는 걸 도와달라는 말일 텐데. 먼저 내게 부탁하면서 저자세로 나오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듯 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프란첼로가 내게 물은 것은, 다소 황당한 질문이었다.

“술 좋아하십니까?”











“기사 나으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전해 드릴 테니, 그 앞에 두고 가거라.”

“…나으리. 마리 마님의 얼굴을 한번만 뵙게 해주십쇼…”

애절하게 부탁하는 늙은 하녀의 요청에, 알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녀가 백작 부인을 자신이 호위하기 한참 전부터 그녀를 모시던 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매일 세 끼 꼬박꼬박 이 먼 곳까지 직접 식사를 가져다 주러 온다는 데서,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 상태의 백작 부인은 더더욱 보여줄 수 없었다.  늙은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한껏 더 묻어났다.

“기사 나으리, 벌써 마님이 이 방에서 나오지 않으신 것도 일주일이 다 되어 갑니다. 이 쇤네는 마님이 너무 걱정되어 밤에 잠도 못 잘 지경입니다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마리가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헨리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한 것이 벌써 근 일주일이 다 되었다니. 잠도 문 앞에서 쪽잠을 자며 호위를 했더니 시간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알렌은 생각했다.

“그래도 아니 된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으셨다.”

피로 때문인지 조금 신경질적으로 나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는 노파의 모습이 보였다. 힘없이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에 알렌이 덧붙였다.

“대신, 며칠 내로 한 번은 나오신다 하셨으니   얼굴을 뵐 수 있게 해주겠다.”

“…예, 알겠습니다요…”

늙은 시녀가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알렌이 살며시 문을 열었다. 안에서 풍겨나오는 냄새에 약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음식을 들고 침대로 다가갔다.

“부인,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으… 음? 알렌 경…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백작가의 가주이자 백작, 헨리가 누워있는침대 위에는 그의 부인인 마리 마운트베른 백작 부인이 올라타 있었다. 옷을 전부 벗은 상태로 남편 위에 올라타 있던 그녀는,  위에 멍하니 엎드려 쉬고 있다가 알렌이 들어오자 정신을 차린 듯 했다. 격렬한 운동에 체온이 올랐는지 붉게 달아올라 땀이 방울진 백작 부인의 피부가, 야릇한 땀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가랑이 사이에서 하얗고 끈적끈적한 것이 묻은 채 반쯤 풀린 눈을 한 그녀를, 아까처럼 외부인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침대  테이블에 식사를 내려놓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마리가 스윽 내려와 식사를 시작했다.

“아까 늙은 시녀 하나가 부인을 뵙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아… 이거 미안하네요. 걱정하고 있을 텐데.”

누군지 바로 짐작이 된  마리가 말했다.  말을 듣고 노파에게 더욱 미안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알렌이었다. 그 하녀를 시켜 부인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가신들 중 하나가 시켰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녀가 여전히 부인에게 충성하더라도, 간단한 질문 몇 가지면 원하는 사실을 캐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한달 후라고 했으면 그 때까지는 내버려 두지, 부인이 뭘 하는지는 왜 이렇게 궁금해한다는 말인가. 벌써 그걸 알아내려는 몇 명의 사용인들을 쫓아내버린 적이 있기에, 알렌에게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목적은  되어가고 있습니까?”

“음, 열심히 하고는 있어요. 남편도 힘내주고 있는  같고…”

마리가 수건으로 가랑이에 묻어있던 하얀 것을 닦았다. 말라버린 그 액체 중에는, 헨리의 정액도 조금이지만 섞여 있기는 했다.

“저렇게 되어 있는데도, 저한테 벌써 두 번이나 정을 줬는데요. 나머지는 다 제 몸에서 나온 것이긴 했지만.”

알렌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위를 노리는 자들이 마리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이라 매도하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아이가 있다는 말은, 한 달이 지나면 어차피 거짓말이라는 게 탄로날 테니까. 식물인간이 된 남편과 한달만에 아이를 어떻게 만들겠냐, 그 정도 정성이면 인정해 주겠다… 뭐 그런 자세였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알렌이 할 수 있는  응원밖에 없었다.

“부인, 반드시 아이를 가지셔야 합니다.”

“…네. 알았아요.”

마리가 쓰게 웃음지었다. 그녀 스스로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건 알고 있는 듯 했다.

“…내일이나 모레는 나와서 목욕도 한 번 하시고요.”

“그럴게요.”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서, 다시 그 앞을 지키듯 서있었다. 알렌에게도, 마리에게도 유일한 대화의 시간이 또 지나갔다. 그녀의 충직한 호위기사는 다시 본연의 임무를 다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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