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100화. 임신(3)
* * *
기쁘게 대답한 위니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혹여나 부서지지 않을까, 마주 안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배에 압박이 가해지지 않을 정도로 주의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기억보다 살이 빠진 위니였다.
“앗….”
안 그래도 가벼웠는데 더 가벼워진 위니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내게 달라붙는 위니. 보금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작은 동물처럼, 내 품에 딱 붙는다. 이렇게 응석 부리기 좋아하는 여자가 강한 척 하기는. 뭐?
‘저걸 마시면, 내가 임신했던 건 없는 일이 될 거야.’
‘아이를 지우는 게 꺼려지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혼자 키워도 되니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기 싫다고 얼굴에 써있는데 누가 그걸 강요할 수 있겠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본 채,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강한 척을 해봤자 누가 그걸 믿겠냐는 말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 억지로 강한 척 하려고 해도, 전부 티가 나게 되어 있다.
게다가 내가 아이를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내 아이를 가졌다 생각하니까 위니가 배는 사랑스러워 보였다. 물론 위니가 한 말이 전부 맞다. 위니가 임신한 걸 모니카나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곤란해지겠지. 나는 몰라도 서로 잘 지내던 모니카와 베라, 그리고 위니 사이의 관계가 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 관계가 그대로 영원할 수는 없다. 서로 사랑하고 매일매일 섹스를 하면서 지내면서, 아이가 영원히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 거다. 언제까지고 모니카를 속이면서 유지되는 이 관계가 이어질 수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울 생각 자체가 없었다. 마리를 임신시키고 난 후, 그 아이를 마음대로 볼 수도, 내 아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정말 싫었다. 단순히 아쉬운 걸 넘어서, 속상한… 아이를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실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보다 먼저 생긴, 내 아이가 있다고? 절대 놓칠 수 없지. 그리고 위니도….
“흐흥….”
아이를 낳아도 된다고 하니까 이렇게 좋아하면서. 뭐, 솔직하지 못한 게 위니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귀여운 거짓말을 하는 게 위니의 매력이었으니까. 침대에 편한 자세로 눕혀 주고, 난 슬슬…
“어이쿠.”
“가지마….”
일어나려다가 위니에게 붙잡혔다. 떨쳐낼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랬다가 위니에게 충격이 가기라도 할까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건데…. 벌써 갈거야?”
으윽, 솔직한 위니의 모습이라니. 마음고생이 심했던 건지, 강한 척 괜찮은 척 하던 가면을 벗어던진 위니는 정말 제대로 애처럼 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짜증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참…. 침대맡에서 붙잡혀 위니를 달래 줬다.
“이제 아이도 있는데, 일찍 자야지. 눈가에 피로가 가득한 거 봐. 빨리 자.”
“그치만, 아직 할 얘기가 많은데….”
“당분간은 어디 갈 예정 없어. 자고 일어나면 전부 들어줄 테니까, 우선은 자.”
“…알았어. 그 대신… 나 잘 때까지 옆에 있어줘.”
누가 봐도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위니다. 당부하듯 말하는 내 모습에, 위니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잠들 때까지 이대로 손을 잡은 채, 침대 옆에 무릎으로 서있어야 하겠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정말 부부 사이에서 할 일처럼 느껴졌달까. 한 번도 제대로 된 부부생활을 해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드워드.”
“응.”
“베라 아주머니… 아니, 베라 언니 좀 잘 위로해줘.”
“…응.”
곧 새근새근 잠든 위니에게서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고, 춥지 않게 이불도 덮어 줬다. 편안한 표정을 한 그녀를 뒤로 하고 멜버른 저택을 나섰다.
“아, 왔어?”
그리고 혼자 기다리고 있던 베라를 마주쳤다.
“흠, 흐흠.”
나보다 앞서서 걸어가는 베라 누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아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껴안고 싶었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그렇게 함께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 베라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되게 오래 걸렸네.”
“네? 네.... 할 얘기가 좀 많아서.”
나를 위니가 있는 곳까지 데려온 것도 베라였고, 위니를 달래고 재우는 데 걸린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 동안 이 쌀쌀한 가을 밤에 밖에서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더 미안해졌다.
“그….”
“그래서, 어떻게 하기도 했어?”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뒷모습만을 보이면서 베라 누나가 내게 물었다.
“아이 문제… 말하는 거죠?”
“그거 해결하라고 보낸 건데. 당연하지.”
“우선 낳아서 키우기로 했어요. 자세한 건 다음에 말하고. 위니가 워낙 피곤해 보여서 재우고 왔어요.”
흐음 하고 뒤돌아선 베라 누나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냥 낳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니. 키우는 건 둘째치고, 주변에는 뭐라고 하게. 아버지 없는 아이로 키울 셈이야?”
“전혀 아닙니다.”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대놓고 알리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누가 물어본다 해서 그걸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고, 숨기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내 딸한테도?”
“…그래야겠죠.”
“어떻게 해결하려고? 정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계획 없이 그러는 건 좋지 않아.”
반박할 수 없었다. 위니가 임신했다는 걸 안 지도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 계획 같은 게 들어갈 틈이 있었겠는가. 애초에 계획 같은 건 세우지도 않는데…. 다만 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베라 누나가 말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 위니도 내 딸 같이 소중한 아이라서, 힘들어할 때는 좀 걱정됐는데….”
걱정할 정도로 위니가 힘들어 보이긴 했다. 피로와 걱정, 불안에 찌든 듯한 얼굴이었으니까. 착하고 자상한 베라 누나가 챙겨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베라의 표정도 위니만큼 좋지 않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탓일까.
“…만약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으면 엄청 실망했을 거야. 레이디를 슬프게 하는 남자는 기사가 아니라구.”
“누나.”
“응?”
베라 언니를 잘 챙겨달라는 위니의 말이 떠올랐다. 누나는 결코 성인군자 같은 성격은 아니다. 분명 자신을 제일 사랑한다 했었는데. 위니가 먼저 임신한 걸 보고, 질투, 아니 하다못해 부러운 기분이 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그 부정적인 감정을,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서운하다는 티를 대놓고 드러냈으면 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니까 더 미안하고 고마웠다. 베라 누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한 건지 체감이 된다. 자기가 제일 좋다고 해놓고,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다니…. 생각해보니, 누나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두 명이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 누나가 더 서운해하기 전에, 그 감정을 해소해주기로 했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 할 말 있어?”
“미안해요.”
“아니, 갑자기 왜. 아흣, 자, 잠깐만.”
이렇게 몸이 굳어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도 잘 풀리지 않는다. 품 안에 베라 누나를 안고 풀어 주듯 몸을 만져 줬다.
“위니가 베라 ‘언니’도 챙겨주라고 했었어요.”
“걔는, 정말, 흣, 우슨 그런 말을….”
오랜만에 만지는 탐스러운 엉덩이. 맛보기로 끝난 내 손길을 기다렸던 것처럼, 누나가 몸을 떨며 달콤한 소리를 냈다.
“누나.”
“흣, 안 돼.”
무슨 말을 할 건지 예상한 듯, 베라 누나가 부정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했다.
“제 아이를 낳아주세요.”
“아, 안 된다니까….”
“저번에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했었잖아요.”
아직도 기억난다. 마운트베른으로 떠나기 전날 밤, 위니와 함께 셋이서 보냈을 때. 베라 누나도 기억난 듯 얼굴을 붉혔다.
“그, 그건 그냥 분위기 타서 했던 말이고,”
“이번에는 진짜로 만들어 드릴게요.”
“위니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지만, 나까지 임신해 버리면….”
“책임질게요.”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피하지 못하게 계속 바라봤다. 내 진심이 전해지도록. 잠시 눈을 맞추고 있던 베라 누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에드, 너 정말… 그러면 안돼. 알겠니?”
“뭐가 안되는데요?”
“…그런 눈빛으로 아무 여자나 막 쳐다보면 안된다구.”
수줍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대충 아무 여자나 꼬시지 말라는 거겠지.
“이런 눈빛이 뭔데요?”
하지만 모르는 척, 돌아간 고개를 쫓아가며 계속 물었다. 부끄럽다는 듯 대답을 피하던 베라 누나는 내가 계속 보채자 결국 대답해 줬다.
“그, 그렇게 바라보면 거절할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될 것 같니?”
“누나!”
“꺄앗!”
베라 누나를 안아들었다. 밖은 너무 추우니까, 옷을 벗으려면 실내에서 해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