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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화 〉면담 (2) (272/447)



〈 272화 〉면담 (2)

“...혹시 이 세계는 가상 세계입니까? 그러니까, 저는 일종의 게임 같은 걸 하고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여신은 말없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의심이 하루 이틀만에 생긴 것은 아니다. 전부터 이상한 위화감은 있었다. 시스템의 UI는 가장 최신 게임의 UI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세련되었고.

그리고 고블린 던전에서의 고블린 박이가 외친 비명소리. 검과 마법이 있는 세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인공적인 고주파음.

거기에 위성 레이저포를 쏘는 달이나, 니니엘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마치 버그 걸린 것 처럼 깨진 글자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지만,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위화감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여기는 그야말로 현대시설, 아니 현대시설이라기보다는 근미래 SF에서나볼법한 시설이었으니까. 게다가 변신드론들이 접속자 운운하는 꼴이라니.

그리고 마침내 여신을 만나자, 이 미묘한 위화감은 구체적인 의심이 되었다.

세상에 셔츠에 쓰레빠 신고 모니터를 쳐다보는 여신이라니? 그리고 뭐? 관리자? 채널? 매크로?

내 의심이 가득한 눈길에 여신은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쩔건가요?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와서 현실로 돌아가고 싶나요?”

“...아뇨.”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나는 스스로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거의 즉답에 가까운 반응이라니.

그렇지만 깊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애들을 놔두고 다시 돌아가라고? 그럴 수는 없어!

“흐음. 어째서인가요? 아하,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이들. 그 아이들 때문이군요. 하지만 여기가 가상현실이라면 그 애들은 그저...프로그래밍된 코드 몇줄에 불과할 텐데?”

“...상관 없습니다.”

그렇다. 상관 없다. 설령 레니나 유리나 그 실체가 몇줄짜리 코드에 불과하더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니까.

여신은 내 대답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보는, 여신다운 성스로운 미소.

“그런 걱정을  필요는 없어요. 그런건 아니니까요.”

여신의 대답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한편으로는 조금 두려웠으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속의뇌가 되버린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우리 애들이 명령어 몇줄에 사라져버릴 수 있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가상현실이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나요?”

“아, 그니까.... 너무 익숙해 보인다고나 할까요. 이것저것...”

내가 의심했던 이유를 들려주자 여신은 웬지모르게 의기양양한, 한편으로는 재수없이 잘난 체하는 얼굴이되었다.

“UI가 그런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용자 맞춤 서비스라는 거에요. 사용자에게 형태로 나타난다는 거지요. 애초에 모두에게 게임 스타일의 UI를 적용시킨다면, 게임을 안하는 사람을 소환했을 때 어떻게 적응을 시킬건가요?”

“아, 그럼...”

“그래요. 당신에게는 게임 스타일이 가장 익숙할테니까 그런 형태로 나타난거에요.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아하. 흥미롭네. 그러니까 만약에 고전게임만 하는 사람이라면 고전게임적인 메뉴가 나타날테고, 책만 보는 사람이라면 책에 익숙한 무언가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소리군.

그러고보니 소설 속에서 소환자들이 적응하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적이 없었다. 이제는 옛날 이야기긴 하지만.

그게 그런이유에서였군.

여신은 웬지 젠체하는 듯한 투로 설명을 이었다.

“당신에게 보이는 제 모습도, 당신이 듣는 제 말도. 본래의 모습과 의사가 아니라 상당한 변환을 거치고 있어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다간 미쳐버리거나 뇌가 타버릴 지도 모를테니 말이죠.”

“...”

그래,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있다. 성경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두려워 말라' 라는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천사의 모습이 눈알에 일곱장의 날개가 달려있다던가, 아니면 다리가 여러개달려있다던가 하는 식이라서 일단 그런 말부터 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여신의 본래 모습은...

나는 상상을 관뒀다. 그래, 뭐 어쨌든 변환한 다음이 중요한 거지. 성형하기 전이 뭐가 중요하겠어? 어쨌든 덕분에 한숨 놨다.

“음. 대단하시네요. 어쩐지 여신님 모습이 너무 익숙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익숙한 스타일이라뇨?”

“어, 그니까 너무 좀 직장인스럽다고나 할까.... 제 생각에는 뭔가 나풀나풀 거리는 드레스 입고 빛에 휘감겨서...뭐 그런 걸 예상했는데. 그런게 아니라서요.”

여신은 내 말에 퍼뜩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당신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일지 아직 확인을 안해봤군요.”

그러더니 허공에서 전신거울을 소환해서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기 시작했다.

“흐응...”

여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쳐보였다.

헝클어진 머리, 풀어헤쳐져서 가슴골과 배꼽이 보일락말락하는 셔츠, 구겨져서 조금 올라간 타이트한 미니커트와과 올나간 스타킹. 삼선 쓰레빠와 안경.

여신은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고는 웃으며 나를 보았다.

“당신은 저한테마저 욕구를 품고 있었군요.”

“...네?”

입만 웃고 있고 있어. 눈은 웃고 있지 않은데. 잘보니 이마에 혈관까지 돋아있잖아?!

“피곤한 얼굴이야 그려러니 하지만, 이런 퇴폐적인 모습이라니. 욕망의 덩어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발칙할 줄은...”

“아, 아니, 잠깐, 잠깐만...끄악!”

...

나는 주저앉아서 찌릿거리는 팔다리를 주물렀다.

한마디로 망할 ㄴ...이다. 차라리 내 시선이 음흉하해서 기분나쁘다고 했으면 납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모습은  무의식이 반영한거라며? 그럼 내 무의식이 반영한걸가지고 나한테 책임을 묻는건 너무 심한거 아닌가?

내가 꿈에서 나쁜짓 했다고 해서 잡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내 무의식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다고!

“너무 하지 않습니까? 제가 의도하고 그런 것도 아닌데.”

내 투덜거림에 여신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흠, 으흠. 그것도 그래요. 미안해요. 당신도 보면 알겠지만, 제가 요즘 피곤한 일이 좀 많아요.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피곤한 일이 많다니. 신도 야근하나? 왜?

묻고 싶은게 많았지만, 나는 일단 중요한 문제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제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러니까 그...각종 박이들을 처리하라는거.”

여신은 내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뭐,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좀 황당하기는 하네요. 그런 녀석들을 처리하라니. 너무 개인사생활 침해하는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하고 있는 짓보면 처리하는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말을 하면서 조금 억울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싸워야 할 일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럴거면 좀  전투에특화된 능력을 주셔야하는 것 아닌가요?”

여신은 내 투덜거림에 나를 비스듬하게 내려보았다.

“당신이 그런 능력을 가진 데에는 여러가지가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그 능력이야 말로 당신이 바라마지 않던 능력 아닌가요?”

“....”

“불만인가요?”

“아뇨, 불만이라니, 그럴 리가 없죠.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 전투를 해야할 때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는 더이상 만족할 수가 없을 정도니까. 그렇지만 피곤한 건 피곤한 일.

“음,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집어치우고 그냥 저택에서 칩거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신 생각에는 어떻게 될 것 같나요?”

“글쎄요...”

여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감히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수 있느냐는 듯한 눈빛. 보는 것만으로 최악의 상상을 하게만드는 경고의 눈빛이다.

“...”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여신은 아까부터 내 질문에 질문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네 생각은 어떻냐, 네가 원하는거 아니었냐, 어떻게 될 것 같냐,이런 식.

“....아까부터 말이 빙빙 도는 것 같은데. 그냥, 속시원하게 가르쳐주실수는 없는 겁니까?”

내 말에 여신은 굉장히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보낸 듯한 표정.

“이런 식의 대화가 답답하다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해해줬으면 좋겠군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는건 리스크가 너무 크고,규칙에 위반되는 일이에요. 그러니 계속 질문해보세요.”

“....”

나야말로 답답해 죽겠다. 뭐하나 속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으면서 질문을 계속하라니. 나는 약간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때 떡신을 못쓴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작가 여신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떡신을 못쓰고 연중한 이유. 사실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한건 궁금한거다.

“저도 쓰기 싫어서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에 여신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쓰기 싫어서 안쓴거라니, 그럼 못쓴건가? 진짜 경험이 없어서?

내가 마음속으로 발칙한 생각을 했건만 여신은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에 당신 입으로 말한 적이 있었죠.”

“네?”

“당신은 소설의 내용을 기반으로 행동을 했지요. 그걸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했죠?”

“음....”

내가 읽은 소설의 내용. 나는 그걸 행동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그걸 우리 애들한테 설명했을 때는...

“일종의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조금 집중해보세요.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예상하는 걸 뭐라고 하지요? 예언이나 신탁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계산을 하는  뭐라고 하지요?”

“...시뮬레이션?”

여신은 대답이 없었지만 무언의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소설은 시뮬레이션이다. 그 시뮬레이션에는 섹스가 없었다.

내 능력은 섹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내 사명은 이상성욕자를 잡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 잡힐듯 말 듯한데. 명확하게 뭔지를 모르겠어.

“그렇다면...”

-삑삑.

모니터에서 소음이 들렸고, 여신은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그러더니 경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 레벨이...왜 이렇게 낮나요?”

“네?”

“빈둥대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이 정도였다니... 여기엔 어떻게 온거죠? 레벨이 충분하지 않았을텐데? 가디언의 레벨은 60대인데, 통과를 시켜줬단 말인가요?”

“아뇨. 통과 안시켜주던데요.”

“그럼 어떻게?!”

“어, 그니까 제 레벨은 낮지만 우리 애들이 제 버프를 받아서... 한방감이던데요.”

내 대답에 여신은 입을 헤-하고 벌렸다.

생각보다 전지전능하지는 않구만. 허당끼가 있는게 인간미가 있는 모습이야.

“당장 돌아가요.”

“네?!”

아니 이렇게 돌려보낸다고?

뭐하나 속시원하게 해결된 것도 없는데? 뭔가 개념이 잡히기 직전인데 이대로 돌려보낸다고?!

여신은 내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손짓을 했다.

“당신의 추측을 믿고 하던대로 하세요. 그렇다면 곧 다시 만날 수 있을거에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 # #

“...”

“흑....으흑. 일어나세요, 유진씨, 흑, 일어나아....”

눈을 떠보니 모르는 천장에....익숙한 얼굴.

레니가 펑펑 울면서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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