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 하하, 세상에……. 도망쳤어? 도망쳤다고? 황제의 아내는 지금 수도에 남아서 내게 용서를 빌려고 그대를 보냈는데?”
“네, 키르타 님.”
“이런, 상상도 못 했던 일이네. 그대의 황후는 우리 민족의 여인과 비슷한데 그대의 황제는 초원의 사내와 전혀 다른 것 같아.”
키르타가 경쾌하게 덧붙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루크넬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초원의 유목민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전사로 길러진다. 그들에게 도주는 불명예였고, 비겁함은 가장 큰 죄악이었다.
“만약 이 자리까지 나아 온 그대가 사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나라의 모든 사내가 황제처럼 비겁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대 덕분에 내가 착각하는 일은 없겠군.”
키르타의 태평한 발언을 듣고 루크넬은 문득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이미 수많은 제국 사내들이 침략자를 막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가 스러졌거늘, 감히 누구를 비겁하다고 부르는가?
루크넬은 제 누이가 거듭 말했듯 이 전쟁은 제국의 잘못으로 시작된 거라는 사실을 애써 되뇌었다.
그런다고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여기서 이성을 잃고 적장에게 달려들지 않을 정도의 절제력은 얻을 수 있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게, 제국의 전령이여. 다 함께 수도로 향하면 되겠네.”
“네, 키르타 님.”
아까 미리 검을 버리고 와서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 손이 닿는 곳에 무기가 있었다면 저 사내의 느물거리는 얼굴에 칼을 꽂고 싶다는 유혹에 끝내 굴복했을지도 모르니.
현재 루크넬에게 중요한 건 무사히 살아서 수도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누나를 도와 제국을 지키는 거였다.
순간의 진노에 휩쓸려 일을 그르쳤다간 저승에서도 자신을 용서치 못하리라.
결국 그들은 더 이상의 유혈 사태 없이 수도에 입성했다.
이미 적군의 잔혹함에 대한 소문을 들은 영주들은 적과 맞서는 대신 식솔을 챙겨 도주했고, 영지민도 꼭꼭 숨었으며, 키르타의 군대는 그들을 찾아내 죽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느 화창한 봄날, 레케온의 황후는 초원의 젊은 군주와 마주했다.
렌티아는 키르타를 황궁으로 안내했다. 평소에 문마다 보초를 서는 자랑스러운 황실 근위대는 오늘 황후의 명에 따라 자리를 비웠다.
적국의 심장부에 당당하게 입성한 키르타와 그의 부하들은 전부 무장한 상태였으나, 그들을 맞이한 렌티아는 호위병 하나 없이 시녀 하나만 거느린 채였다.
그녀가 적군을 도발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는지 확인한 키르타는 흥미를 느꼈다. 호의에 가까운 호기심이었다.
“당신의 남편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더니 당신은 참 용맹하군요. 저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두렵지 않습니까?”
차분한 걸음으로 살짝 앞서는 여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키르타가 능청스레 물었다. 황후는 멈칫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키르타 님을 향한 신뢰가 두려움보다 클 뿐입니다. 제 전언을 받고 나서 수도로 오기까지 아무도 해치지 않으셨으니, 여기서도 계속 그렇게 예의를 갖춰 주실 거라고 판단했을 따름이죠.”
황후의 억양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어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발음되어 무엇도 답답하게 뭉개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반쯤은 짓궂은 마음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매끄러웠으며 그녀의 둥근 어깨와 반듯한 목, 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언뜻언뜻 비치는 봉긋한 귓불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비록 가장 최근에는 전투를 삼갔을지언정 여기까지 오는 길을 피로 흥건하게 적신 침략자를 이렇게 가까이 두고도 전혀 떨지 않는다니, 배포가 큰 여인이 분명했다.
‘이 사람 시녀도 만만치 않은 것 같고.’
키르타는 잠시 황후 옆에서 걷는 빨간 머리 여자를 흘긋했다.
적갈색 머리칼을 수수하게 땋아 올린 여성은 황후보다 제법 앳돼 보였고, 그녀 역시 겁에 질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레케온 여인들이 소문으로 접한 것보다 강인한 면이 있는 건가? 아니면 황실만 유독, 아니지, 황후의 사람들만 유독 이런 걸까.’
레케온 사람들이 야만족을 깔보듯 초원의 유목민도 나름대로 제국을 비웃는 부분이 있었다.
남아와 동등하게 전사로 길러지는 초원의 여아들은 나중에 커서 고향의 가족과 재산을 지킨다.
사냥이나 전쟁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건 사내들이지만, 사내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을 든든하게 지키는 건 여인들의 몫이었다.
이번에 제국을 침략한 군대가 전부 사내로 이루어진 것도 여인에게 싸움을 맡기는 게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사내들이 없을 때 누군가는 그들의 터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초원에 일처다부제가 흔한 것도 그런 풍습과 맥락을 같이했다.
사내들은 사냥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가 언제 어디서 객사할지 모르니, 집에 남아 가정을 지키는 여인들을 중심으로 모계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여인들이 보기에 제 아내와 딸과 누이를 코르셋으로 조이고 좁은 규방에 가두는 제국의 사내들과 그 사내들에게 순응하는 여인들은 하찮기 그지없었다.
키르타도 원래는 고향의 여인들과 생각이 비슷했다.
그러나 난생처음 제대로 만난 레케온의 여인으로 인해 키르타는 본래의 감상을 기꺼이 수정했다.
‘이들이 예외인 건지, 아니면 우리가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키르타가 속으로 즐거워하는 사이 렌티아는 한결같이 고상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마침내 어느 문 앞에서 멈추자 양쪽에 있던 시종들이 말없이 문을 열었다.
“회의실입니다. 앞으로 두 나라의 화합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차분히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라 하면?”
“저와 키르타 님을 뜻합니다.”
렌티아의 단정한 대답에 키르타는 유쾌한 조소로 입매를 비틀었다. 결코 렌티아를 향한 비웃음은 아니었다.
‘황제 놈은 확실히 나라를 버렸나 보군.’
두 나라의 미래를 논하는 중대한 자리에서 황후가 황제를 쏙 빼놓고 얘기하는 걸 보니 그놈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뻔히 상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키르타가 본 바로 황궁과 수도의 분위기는 침략자들로 인해 날카롭게 곤두섰을 뿐,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어수선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구심점이구나.’
황후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황궁 시종과 시녀, 그리고 도시를 가로지르면서 본 제국의 백성은 겁에 질렸을지언정 심지가 꺾인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냥 허수아비였고.’
황후의 저 차분한 힘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걸까, 아니면 황제가 처음부터 한심한 놈이었기에 황후가 저런 눈빛으로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걸까?
궁금한 점이 하나둘씩 불어났다. 그러나 아직은 호기심을 해소할 때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대화야말로 소통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죠.”
지금은 달리 논의해야 할 중대한 일이 많았다. 키르타는 이를 상기하며 열린 문을 통해 회의실에 얌전히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검을 빼 들기 전에 가장 먼저 대화부터 시도한답니다.”
키르타가 황후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와 말에는 확실히 뼈가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이 초원에서 온 사절단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들을 무작정 야만족으로 상정, 죄다 죽인 뒤 물건을 갈취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그리 부당한 비아냥은 아니었다.
렌티아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회의실 중앙에 놓인 길쭉한 탁자로 향했다.
렌티아가 말없이 키르타를 돌아보았다. 먼저 앉으라는 뜻이었다.
제국에서든 초원에서든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일 먼저 착석하므로, 지금 황후의 행동은 또 하나의 매우 의도적인 배려였다.
키르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지금 황후가 제게 몸을 낮추면 낮출수록 나중에 어떤 식으로 반격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단순히 인격적인 이유만으로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구는 게 아닐 거야. 초반에 우리를 방심시키거나, 우리가 먼저 무례를 저지르도록 유도하거나, 심리적으로 미리 빚을 달아 두려는 의도일 수도 있어.’
자신이 단순히 힘이 세고 싸움에 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아니듯, 저 사람도 황제 대신 궁을 완전히 휘어잡을 만큼 이면의 능력이 있을 터.
키르타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탁자로 가서 천천히 앉았다. 그제야 렌티아는 그의 맞은편에 우아하게 착석했다.
붉은 머리 시녀는 렌티아의 우측에, 키르타의 부하들은 그의 뒤에 도열했다.
“우선, 레케온의 황후로서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당신과 당신의 동포가 부당하게 겪은 상실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렌티아가 키르타를 똑바로 보며 정중하게 고했다. 키르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여기서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황궁 사람들은 몰살당하고, 키르타의 군대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겠지. 그리고 눈앞의 이 용감한 황후는 제일 먼저 목이 달아날 것이다.
속이 불쾌하게 뒤틀렸다. 키르타는 순간의 언짢음을 털어 버리며 엄숙하게 대답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차피 이미 우리의 방식대로 차고 넘치게 갚았으니, 더는 원한의 칼을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은혜는 일곱 배, 원수는 열두 배, 은혜를 원수로 갚은 금수보다 못한 자에게는 스무 배로.
처음에 죽은 초원 민족의 숫자를 헤아렸을 때, 확실히 여기까지 오며 그 열두 배 이상은 죽였으니 유목민의 셈법에 따른 앙갚음은 이미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제 군대를 데리고 돌아가 주십시오. 원한을 풀기 위해 들어오셨고 이제 목적을 이루셨으니 더는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이 이 땅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렌티아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말투는 우아했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처음으로 시린 단호함이 있었다.
그 단단한 하늘색 눈을 보고 키르타는 짐작했다.
아, 내가 내 고향을 사랑하듯 당신도 고국을 사랑한다고. 당신의 백성이 당한 아픔에 당신도 고통받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