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폐하의 나라가 안정을 회복하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키르타가 공손히 말했다. 렌티아의 기분이 다른 의미로 술렁였다.
“…고맙습니다, 백작.”
폐하의 나라. 내 나라. 그 말에 렌티아의 심장이 아이처럼 두근거렸다.
그때, 누군가 방문에 노크했다. 렌티아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지금 다른 약속이 잡힌 건 없는데? 아랫사람을 호출한 적도 없고.’
오늘 이 시간에 황후를 만나기로 한 사람은 키르타뿐이었다. 렌티아는 의구심을 느꼈다.
“백작,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그대 외에 방문을 청한 사람이 없는데, 예기치 못하게 급한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겠군요.”
“뜻대로 하십시오, 폐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렌티아가 설렁줄을 당겨 입장을 허락하는 종을 울렸다. 문이 열리고 황궁 시종이 당혹감 서린 얼굴로 입장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백작님.”
“무슨 일인가?”
“그게, 지금 브리넬 경과 리카르 경께서…….”
베리타 브리넬과 아사카 리카르. 각자 최측근의 이름이 언급되자 렌티아와 키르타는 동시에 긴장했다.
“그 두 분께서, 현재 결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진 시종의 보고에는 둘 다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 *
그의 주군이 제국의 황후를 만나러 간 시점, 아사카는 배정받은 손님방을 나와 황궁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해. 따분하고.’
군신 관계를 넘어 거의 형제처럼 자란 주군 키르타를 향한 의리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제국에 남긴 했지만, 아사카는 동북부의 광활한 초원과 가파른 산맥이 그리웠다.
그가 머무는 황궁은 호화로웠고 제공되는 음식은 훌륭했으며 잠자리는 편안했으나, 그는 여전히 지독한 향수병을 앓았다.
‘고향에서는 말을 타거나 활이라도 좀 쏘면서 놀면 되는데, 여기서는 도통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사카는 속으로 투덜대며 걸음을 옮겼다. 목을 조이는 제국식의 크라바트가 갑갑해서 저도 모르게 매듭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황궁에는 승마장도 없나? 아니면 연무장이라도. 설마 없지는 않겠지?’
아무리 제국을 싫어하는 아사카라도 이 화려하고 정교한 황궁이 웬만한 시설은 전부 최고급으로 갖추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여태 제국 궁인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느라 찾아가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어딘가에 말을 타거나 무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황궁 탐방이라도 해 볼까. 나는 귀빈으로 입궁한 거지, 포로로 잡혀 온 게 아니잖아. 꼭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이유는 없어.’
남의 집에 몰래 침범한 듯 찜찜한 기분은 훌훌 털어 버리며 아사카는 회랑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다 이제 나름 익숙해진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엇.”
황후의 호위 기사 베리타와 수석 시녀 엘리제였다.
지난 한 달간 매일같이 황후 곁에 붙어 있는 걸 봤으니 얼굴과 이름을 외우기 싫어도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두 사람 다 황후 곁을 지키지 않고 자매처럼 정답게 걸으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다.
‘하긴, 저 사람들도 가끔은 쉬어야지. 오늘은 둘 다 휴일인가 보군.’
제국의 황후에게 저 둘 외에 아랫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니 가끔은 둘도 쉬기는 할 거다.
아사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사카가 원래 걷던 방향으로 계속 걷고 베리타와 엘리제도 돌아서지 않았기에 그들은 결국 중간에서 만났다.
이때 그들이 서로 예를 지켜 간단하게 인사한 뒤 지나쳤다면 이후에 뒤따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카는 기어이 입을 놀리고야 말았다.
그의 고향에서는 침묵이나 가식보다는 시원시원한 소통이 주된 미덕이었고, 그런 문화가 아사카의 다소 대책 없는 성격과 맞물리자 엄청난 결과가 일어났다.
“그 검, 평소에 정말로 사용하는 겁니까?”
그는 그럴싸한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그가 베리타의 허리에 달린 장검을 향해 눈짓했다.
“레케온 여인들이 실제로 검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제가 몰라서요. 만약 그냥 장식용이라면 좀 더 가벼운 검을 들고 다니는 게 낫지 않습니까?”
명백한 시비조였다. 이쯤 되자 문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인성의 영역이었다.
아사카는 자신이 괜한 화풀이 중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하면서도 뻔뻔하게 까불었다.
“…리카르 경, 맞죠?”
찰나의 침묵 끝에 엘리제가 되물었다.
정말로 그의 이름이 긴가민가해서 확인차 묻는 게 아니라, 그의 극악무도한 예의범절의 부재를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말이었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상대방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지하는 건 제국 인사법의 가장 기본이었다.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다니 네놈은 제정신이냐, 이런 뜻이었다.
“네, 제가 아사카 리카르입니다만.”
아사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 달 전에 받은 제국식 성이 아직도 영 어색한 탓이었다.
“그렇군요. 리카르 경, 혹시 방금 경께서 제 친구에게 하신 질문은 실제로 대답이 필요해서 하신 질문인가요? 아니면 그저 참신한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서두인가요?”
엘리제가 곱게 웃으며 나긋하게 물었다.
옆에서 베리타는 어처구니없어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아사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그렇잖습니까. 여기 남자들은 여자들이 부채나 포크보다 무거운 걸 못 들게 하던데, 브리넬 경은 왜 저런 무지막지한 무기를 들고 다니나 해서요. 아, 물론 오직 귀족들 얘기입니다. 먹고살기 힘든 평민들은 남녀 구분 없이 다들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뼈 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당장 내일 먹을 게 없는데 무슨 여유로 성별을 따지겠어요.”
아사카는 고향에는 없고 제국에는 있는 귀족이라는 계급도, 그중에서 특히 자유를 제한받는 여성들의 상황도 한껏 신랄하게 비꼬았다.
이렇게나 모순점을 많이 끌어안고 있는 사회면서 유목민이라는 이유로, 부족 국가라는 이유로 그의 동족을 야만인 취급하는 레케온 제국에 환멸이 났다.
물론, 이에 대해 제국의 황후나 대신들에게 따질 배짱은 없으면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용인 앞에서 마음껏 나불대는 건 비겁한 분풀이였다.
아사카는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다. 동시에, 그래서 뭐 어쩔 거냐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제국에 대해 쌓인 울분을 이런 식으로라도 토로하자 그나마 기분이 후련해졌다.
이전에 말 몇 마디 섞은 적도 없는 이민족 사내의 느닷없는 무례에 엘리제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너무 기가 막혀서 더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때 베리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기사들이 착용하는 두툼한 가죽 장갑을 벗더니 아사카의 발치에 내던졌다. 아사카가 콧등을 찡그렸다.
“제 검이 장식용인지 아닌지 그리 궁금하시다면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괜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베리타가 아사카를 쏘아보며 뚝뚝하게 선포했다.
엘리제는 물리적인 두통을 느끼며 잠시 이마를 짚었고, 아사카는 한껏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게 결투를 신청하시는 겁니까? 정말로요?”
아직 제국 문화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그였지만 몇 가지는 그새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예컨대, 누군가의 발치에 장갑을 내던지는 건 중세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행하는 전통적인 결투 신청법이라는 것도.
“네, 어디 한번 일대일로 붙어 보죠.”
베리타가 냉담하게 응수했다.
상대방이 제국 사교계의 재수 없는 귀족이었다면 엘리제가 화려한 화법으로 두들겨 패는 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세 치 혀로 누군가의 영혼을 탈탈 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친구였으니.
그러나 눈앞의 직설적인 이민족 사내는 아예 다른 차원의 적수였다.
이 사람을 까다로운 화법으로 패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저 단순하고 다혈질적인 머리는 아마도 엘리제가 시도하는 모든 공격을 가뿐히 튕겨 낼 것이다.
“당신이? 나랑?”
아사카가 뜨악하게 반문했다. 단언컨대 일을 이 정도로 키울 의도는 없었다.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베리타를 노려보았다.
“저기요, 브리넬 경. 당신들이 하도 야만족, 야만족 거리니까 제가 정말 그렇게 무식해 보여요? 전장에서 쪽수로 밀어붙이는 데만 능하고 일대일 결투에서는 실력 발휘를 못 할 것 같습니까? 그걸 노리고 지금 저한테 결투 신청한 거예요?”
“천만에요. 제가 그렇게 비겁한 인간으로 보였다니 유감입니다. 당신 민족이 하나같이 유능한 전사로 자란다고 들었기에 결투를 신청하는 겁니다. 저 역시 검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그토록 대단하신 전사님과 한 번쯤은 겨뤄 보고 싶거든요.”
“당신, 지금 비꼬는 겁니까?”
“어머, 그 정도 비아냥은 알아들으시나 보네.”
가만히 듣고 있던 엘리제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아사카는 엘리제를 휙 쏘아보았으나 베리타는 계속 아사카만 응시했다.
“그래서 결투에 응하실 겁니까, 리카르 경?”
베리타가 차갑게 다그쳤다. 그녀도 현재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아까 아사카가 그녀의 검이 너무 무겁지 않냐고 빈정거린 순간부터 쭉 그랬다.
아사카는 조소로 입매를 비튼 엘리제와 저를 차갑게 쏘아보는 베리타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으며 작게 잇소리를 냈다.
“아, 사고 친 거 들키면 키르타 님한테 죽는데…….”
그가 탄식하듯 중얼거린 말은 초원의 언어라서 베리타와 엘리제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사카는 성마른 한숨을 푹 내쉰 뒤, 고개를 들고 결연한 눈빛으로 베리타를 노려보았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결투 받아들일게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좋습니다.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죠.”
“아니, 그런데, 잠깐만요! 저는 여자라고 안 봐줍니다, 알겠죠? 우리 고향에서는 여인이라서 봐주고 그런 거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살살 하려고 해도 습관적으로 전력으로 공격하게 될 확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