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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22화 (22/56)

22화

아사카는 단어 하나하나를 문장에 꾹꾹 눌러 담듯이 요구했다. 베리타는 덤덤한 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서로 조건을 교환했으니 이제는 승부를 가를 때였다.

두 사람의 자세가 미묘하게 바뀌었고,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수군대던 관중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잠잠해졌다.

베리타가 한 걸음을 떼자 아사카도 마찬가지로 한 걸음을 움직였다.

처음에 두 사람은 검을 움켜쥔 채 서로 고요히 탐색할 뿐, 별다른 동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사카가 먼저 검을 휘두르자 베리타는 즉시 무기를 들어 그를 막았고, 십자로 교차한 검날 너머로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게 사람이야, 곰이야……?’

베리타가 이를 악물었다.

상대방을 곰에 빗댄 건 그를 금수 같은 야만족이라고 비하하는 게 아니라, 그의 억센 힘에 대한 순수한 경악이자 경탄이었다.

여성의 골격으로 최상급 검사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그녀는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여러 한심한 남성 검사를 수두룩하게 봐 왔다.

하지만 지금 맞붙은 검날을 타고 그녀에게 전해지는 압력은 고작 그런 보잘것없는 사내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사내들을 베리타는 늘 기술의 우위로 손쉽게 제압했다.

체격의 차이만 믿고 방심한 채 달려드는 무식한 놈들을 쓰러트리는 건 너무 시시해서 유흥조차 되지 못했다.

이 사람은 달랐다. 단지 베리타를 만만하게 보고 대책 없이 근육만 과시하는 게 아니었다.

소년 시절부터 고향 사람들과 초원을 누비고 산을 타며 맨몸으로 사냥감을 때려잡은 이방인 사내는 힘이 너무 압도적으로 강해서, 자칫하면 베리타가 벌레처럼 뭉개질 수도 있었다.

베리타는 현명하게 후퇴했다.

그녀가 손목을 틀며 잽싸게 뒷걸음질하자 교차했던 검끼리 멀어지며 몸을 얼얼하게 짓누르던 힘이 조금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사카는 쉬이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싸움을 속전속결로 끝낼 각오로 베리타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빡!

가죽에 감긴 금속끼리 부딪치며 섬뜩한 충돌음이 울렸다.

아사카의 검이 베리타의 목을 노리는 바람에 그녀는 또다시 빠르게 검을 올려 공격을 막아야 했다.

‘빨라……!’

베리타가 눈을 크게 떴다. 이자는 힘이 곰처럼 세면서 날렵하기는 또 사슴 같아서 베리타를 여러모로 미치게 했다.

왜 그가 이토록 콧대가 드높은지 알 것도 같았다.

‘왜 나한테 그딴 망언을 뱉었는지 이해해 주고 싶을 지경이야.’

제게 장식용 검을 들고 다니냐고 삐딱하게 묻던 괘씸한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이 정도 무력이라면 그 재수 없는 태도를 살짝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념도 사치였다.

베리타는 아사카의 검이 그녀의 검을 튕겨 내고 목을 파고드는 걸 막기 위해 온 정신과 체력을 집중해야 했다.

지금은 연무장에 모여든 구경꾼 앞에서 망신을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리 가죽을 감았다 해도 저 검에 제대로 맞으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베리타는 아예 몸을 휙 낮추며 옆으로 굴렀다. 꽤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아사카의 검에 맞아 목뼈가 부러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어……!”

검으로 힘껏 누르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아래로 쑥 빠지자 아사카는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가 다소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는 순간 베리타는 다시 몸을 일으켰고, 아사카의 검을 떨어트리기 위해 그의 손목을 노렸다.

아사카는 순식간에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가 제 손목을 노리는 베리타의 검을 쳐 냈다. 베리타는 아슬아슬하게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끈질기네, 진짜.”

아사카가 중얼댔다. 그의 고향 언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별로 칭찬 같지는 않다고 베리타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베리타가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렇게 계속 요리조리 피하고 막으며 싸움을 오래 끌었다간 저 불곰 같은 사내를 상대로 체력적으로 불리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전략적으로 자꾸 그의 손목만 노리는 검을 아사카는 하나하나 침착하게 튕겨 냈다.

베리타의 공격이 점점 빨라지고 사나워지며 어느새 아사카가 점점 뒤로 밀리는 모양이 되었다.

“윽!”

그러다 마침내 베리타의 검이 그의 손등을 세게 가격하자 아사카는 하마터면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는 손끝에서 미끄러지려는 검을 간신히 낚아채는 데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베리타는 코앞으로 다가온 승리에 희열을 느끼며 아사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그의 목에 칼끝을 댄다면 그녀는 그에게 사과를 받는 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사카는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다. 그는 검을 들어 베리타의 공격을 막는 대신 몸을 팍 낮추며 그녀의 정강이를 검으로 후려쳤다.

“아!”

상당한 통증과 함께 베리타의 다리가 꺾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는 자세로 털썩 주저앉았고, 그사이 아사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의 목을 칼끝으로 눌렀다.

“제가 이겼네요, 브리넬 경.”

아사카가 숨을 헐떡이며 베리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고양감으로 반짝였다.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아사카의 동료들이 무심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가 잽싸게 황후의 눈치를 보았고, 베리타를 응원하던 제국의 기사들은 실망감으로 신음했다.

베리타는 아사카를 무표정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결투 끝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아니었다면 방금 격투를 치른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고요한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뿌듯하게 미소 짓던 아사카도 베리타의 덤덤한 시선이 이어지자 오히려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 음. 이제 일어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사카가 목에서 칼을 치우자 베리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그와 조용히 마주 서자 아사카는 그녀가 제 뺨이라도 칠까 봐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의 모든 우려가 무색하도록 베리타는 오히려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사카는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바쁘게 수군대기 시작했다.

“좋은 결투 감사합니다, 리카르 경. 제 나라 기사들보다 당신 고향의 전사들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온전히 실력으로 입증해 주셨으니까요.”

“어, 네. 하하, 그럼요. 인정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아사카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도 도리어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베리타가 도로 허리를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 시인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아하하, 그럼요, 물론입니다. 이보다 진심이 아니기도 어렵겠네요. 진심이라는 걸 인정합니다.”

“감사합니다, 리카르 경.”

베리타는 짧게 고개를 꾸벅인 뒤 대련용 검을 챙겨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사카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베리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기, 잠깐만요!”

그가 냅다 외쳤다. 베리타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아사카는 무안한 얼굴로 쭈뼛쭈뼛하더니, 곧 짧은 헛기침에 이어 진지하게 말했다.

“아까 제 발언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당신이 고작 장식용 검을 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습니다. 진즉 알아봤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제 아둔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주 깍듯한 제국어였다.

만약 그의 표정이 저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면 베리타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거로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사카는 오만한 승자의 여유를 부려 그녀를 조롱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망언을 뉘우쳤다.

방금 그녀와 검을 맞대며 그는 그녀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걸 실감했다.

여성인 그녀를 기사로서 높이 사는 다른 제국민들의 태도는 과장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그가 이기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싸움이었다.

진정한 전사로서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고, 그야말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래서는 우리를 야만족 취급하는 레케온 사람들과 뭐가 달라.’

그는 찝찝한 기분으로 베리타의 대답을 기다렸다. 베리타는 가만히 서서 아사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결같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또한 진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정의 기복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으나, 분명히 결투 전과 달리 약간의 온기가 묻어났다. 아사카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안도했다.

베리타는 다시 돌아서서 황후에게 향했다. 그녀가 렌티아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이름에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황후궁으로 돌아가자.”

렌티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대체 결투는 왜 하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남들 앞에서는 질문을 삼가기로 했다.

렌티아와 베리타, 그리고 근처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엘리제는 함께 황후궁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사카가 어기적어기적 키르타에게 다가왔다.

키르타는 부하가 오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그가 앞에서 멈추자 난데없이 활짝 웃었다.

“내게 설명할 게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예…….”

“따라와.”

키르타는 여전히 해사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본디 제 주군은 저렇게 웃을 때 가장 무섭다는 걸 잘 아는 아사카는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주인의 뒤를 쫓았다.

【 성혼 】

치열한 결투 끝에 제국의 기사가 패배하고 이방인 전사에게 고개를 숙인 일화는 그 후로 널리 퍼져 오랫동안 수도의 주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감히 제국의 기사를 상대로 이긴 이민족 전사가 제 분수를 모른다며 씩씩댔고, 또 누군가는 그깟 야만인에게 패배한 기사가 참 못났다고 혀를 찼다.

결투의 정확한 자초지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날 키르타에게 끌려간 아사카가 얼마나 매섭게 까였는지, 베리타가 결투를 신청한 이유에 대해 뒤늦게 설명을 들은 황후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도 오로지 당사자들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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