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린 선황제가 사납게 선포했다.
옆에는 그의 정부 다프네 멜레인이 요염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벌써 본인이 이 나라의 황후가 된 듯 도도한 표정이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충신이라면 반역자 렌티아 파올린과 그자의 미개한 남첩을 부정하고 제국의 유일한 황제인 내게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수도로 돌아가서 똑똑히 전해!’
루이크는 혈통이라는 명분을 믿고 기고만장했다. 실제로 제국에는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옛 황제파 세력이 남아 있었다.
만약 루이크가 계속 죽은 자로 남았다면 그들 역시 끝까지 렌티아에게 충성했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 모시던 황제는 없고, 이제 그보다 훨씬 유능한 황족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니.
그러나 루이크가 살아 돌아온 이상, 그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들에게 렌티아는 훌륭한 대안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대안에 불과했다.
원래 황제가 살아 있다면 그 황제를 대신해 즉위한 여인에게 굳이 충성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그 여인이 선황제의 주장대로 남편의 죽음을 고의로 조작한 거라면.
한동안 회복과 희망의 분위기가 흐르던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내전의 조짐이 들이닥쳤다.
* * *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궁인들을 치료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뒤, 렌티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옛 황제파 대신들을 전부 황궁으로 잡아들이는 거였다.
비공식적 체포 겸 감금이었다.
개중에는 렌티아가 황제로 즉위한 후로 견고한 충성을 바쳐 온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렌티아는 방심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위기 앞에서 그녀는 다시 비정할 정도로 냉정해졌다.
‘인제 와서 그중에 몇 명이라도 선황제 쪽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파. 안 그래도 내전이 터지게 된 마당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 위험인물을 그냥 둘 수는 없어.’
렌티아는 전쟁을 즐기는 폭군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싸움을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폭력을 싫어할 뿐 폭력을 이용할 줄 모르는 건 아니라서,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황제 쪽에서 먼저 궁인들을 욕보이고 그녀를 도발한 이상 참아 줄 의향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딴 놈에게 제위를 양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단, 그 과하게 예바른 호칭부터 수정하자.’
선황제는 이미 죽거나 물러난 선대의 황제를 예우하는 존칭이었다.
루이크는 알고 보니 죽지 않았고 엄밀히 따지자면 물러난 것도 아니니, 그에게는 훨씬 모욕적인 단어가 어울렸다.
“나, 렌티아 레케온은 내 전남편이자 돌아가신 선황제 폐하의 손자인 루이크 레케온을 오늘부로 폐위하고자 하네.”
선황제가 아닌 폐황제. 폐주가 된 그는 앞으로 죽어서든 살아서든 제 조부나 증조부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루이크 레케온은 위기의 순간에 이 나라의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죄인이며 그 전에도 무능과 탐욕으로 국정을 방치해 제국의 미래를 위협했어. 게다가 신 앞에서 맺은 성스러운 서약을 깨고 법적인 황후 대신 다른 여인들과 혼외 관계를 맺었지.”
신하들이 모인 회의장에서 렌티아는 차분하게 선포했다.
그때는 이미 루이크 레케온이 그녀를 뭐라고 비방했는지 온 수도에 퍼진 뒤였고, 회의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니 나는 내가 그자와 맺었던 혼약을 아예 무효화하고 그자를 폐위하겠네. 그리고 폐주와 폐주를 따르는 무리는 반역자로 선포하고, 필요하다면 군사로 그들을 진압할 걸세.”
긴장감이 한층 첨예해졌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숙덕이지도 못하고 초조한 얼굴로 황제와 그 옆에 선 대공을 힐끔거렸다.
렌티아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진압군을 이끄는 건…….”
여기서 그녀는 처음으로 동요했다. 그녀는 잠시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이다가, 손끝을 오므려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장을 마저 끝냈다.
“에우론 대공이 직접 맡을 거야.”
그제야 귀족들은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전통적으로 황제가 직접 전쟁터에 나간 적은 있어도 황제의 반려가 출정한 경우는 없었다.
하긴, 여태껏 레케온에서 왕이나 황제는 대부분 사내였고 전쟁도 사내의 영역이었으니 궁의 안살림을 맡은 황후가 전쟁터에 나갈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역할이 바뀌었다.
렌티아는 유능한 황제였으나 전장에서는 경험이 없었고, 황제의 남편 키르타는 고향에 있을 때부터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이의가 있어도 받지 않겠네.”
렌티아가 엄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누군가 절대 안 된다고 매섭게 반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평소에 대공이 ‘야만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뒤에서 은근히 험담하고 다니던 사람들조차 지금만큼은 입을 봉했다.
그들은 대략 열 달 전, 동족의 원한을 갚기 위해 제국 땅에 쳐들어왔던 키르타의 군대가 얼마나 강력하고 일사불란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때 수많은 제국민을 죽이거나 공포로 몰아넣은 군대를 인제 와서 아군으로 써먹자니 찜찜하긴 했지만, 전쟁의 실리를 따지다 보면 그런 찜찜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다들 받아들인 걸로 이해하지.”
다들 순종적으로 침묵하자 렌티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얼굴빛이 평소보다 창백한 걸 빼면 제법 말짱한 얼굴이었다.
금실 좋기로 유명한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게 된 아내치고는.
그러나 렌티아를 유독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억지로 내리누른 떨림을 알아채고 그녀의 본심을 깨달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겁먹었는지, 얼마나 절망했는지 짐작할 것이다.
키르타는 다 알고 짐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미어졌으나, 이미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할 뜻은 없었다.
애초에 진압군을 지휘하겠다고 자원한 건 순전히 키르타 본인의 의지였다.
‘군대 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제게 군권을 맡겨 주십시오, 폐하.’
‘뭐라고요? 절대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저와 제 부하들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제가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다면 분명 폐하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왜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지금 그대의 전력을 과소평가해서 이러는 것 같아요?’
희게 질린 얼굴로 파들파들 떨며 제게 화내던 사랑스러운 아내. 키르타는 그녀가 왜 출정을 반대하는지 이해했지만,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렌티아, 적군이 제 고향과 가정을 위협할 때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는 건 제 민족에게 당연한 명예입니다. 그 명예를 지키고 싶습니다. 부디 저와 제 부하들이 싸우게 허락해 주십시오.’
‘안 돼요, 안 돼. 만약 그대가 나갔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제가 다치는 건 안 괜찮고 다른 병사들이 다치는 건 괜찮습니까? 저와 제 부하들이 전력을 보태면 분명 폐하의 백성을 훨씬 많이 지킬 수 있을 텐데요.’
렌티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 대신 다른 사람이 몇 명이나 죽든 상관없으니 내 곁에 안전히 있어 달라고 차마 애원하지 못했다.
이런 순간에마저 황제의 정체성에 목이 졸려 입술만 가련하게 뻐끔대는 그녀를 키르타는 애달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당신이라서 제가 사랑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당신이에요.’
키르타가 이끄는 전사들의 부대가 선두에 선다면 렌티아 쪽의 승률이 훨씬 올라갈 테고, 그러면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테고, 그럴수록 인명 피해도 더 줄어들 것이다.
영민한 황제가 여기까지 계산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냉정한 군주는 다수를 위한 최상의 선택을 내려야 마땅했다.
‘이런 당신을 위해 싸우게 해 주십시오. 당신과 당신의 아이, 우리 둘의 아이를 위해.’
키르타는 괴로워하는 아내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듣는 이의 심장을 애절하게 녹이는 다디단 저음으로 속살거렸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나쁜 놈. 렌티아는 그를 소리 내어 욕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와 깊숙이 입을 맞췄다.
결국 전쟁이 터질 시, 에우론 대공이 선두에 서는 걸로 결정되었다.
꼭 전쟁까지 가지 않고도 상황을 해결할 수 있기를 렌티아는 간절히 바랐으나,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
루이크 레케온은 황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렌티아도 마찬가지였으니, 둘 중 한 명이 처참하게 패배하기 전에는 제국이 다시 하나로 통일될 기미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임신 소식으로 기뻐하던 도시가 전쟁 준비로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사이 가을이 깊어졌고, 겨울이 다가왔다.
* * *
레케온의 겨울은 전쟁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
사실 어떤 계절이든 전쟁에 어울리겠느냐만, 겨울밤의 추위는 행군 도중에 야영해야 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유독 쉽게 꺾었다.
폐황제가 멍청할 정도로 무모하게 굴지 않는 한 봄이 오기 전에 군사를 움직이지는 않을 거라고 렌티아는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출정 날짜를 봄으로 잡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렇다고 폐황제가 온전히 자신의 추측대로 움직여 줄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기에, 렌티아는 만일을 대비해 군대가 언제라도 출정할 수 있도록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동안 키르타도 훈련에 전념했다.
고향에서 함께 내려온 전사들뿐 아니라 레케온의 병사들까지 아울러 지휘해야 했기에 철저한 협력이 필요했다.
개중에는 왜 자신들이 고작 이민족 대공 따위의 지휘에 따라야 하냐며 남몰래, 또는 대놓고 투덜대는 병사들도 있었다.
겁대가리 없이 대놓고 떠든 자들은 훈련이라는 핑계로 혹독하게 데굴데굴 구른 뒤에야 입을 닫았고, 그 광경을 지켜본 나머지 병사들도 앞으로는 현명하게 처신하기로 했다.
키르타가 시범으로 부하들과 대련하는 모습을 보인 뒤로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게 된 레케온 병사들도 더러 있었다.
실제로 키르타는 굉장히 강했고, 객관적이고 압도적인 힘은 다른 무인들을 매료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