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넌, 대체 나를 어떻게 잊었니
여름이 작년보다도 더 빨리 오는 것 같았다.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 세정이 지훈과 예상치 못한 재회를 한 이후 벌써 사흘이 지났다.
토요일 새벽, 그녀와 차 안에서 질펀하게 섹스한 후 그는 그녀를 곱게 집까지 에스코트했다. 예상은 했지만 지훈은 이미 그녀가 어디 살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보자, 세정아.”
만약 그가 집까지 막무가내로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는 산뜻한 얼굴로 손을 흔들더니 차를 돌려 사라졌다.
길을 걷다가, 혹은 저녁 식사를 하러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지훈과 마주치는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그럴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그를 지나치는 연습까지 머릿속으로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맞닥뜨린 순간은 그동안 그녀가 해 왔던 모든 롤플레잉을 시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자마자 심장이 의지를 배반하고 속도를 빨리했고, 그가 예전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는 마치 그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귓불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차에서 마침내 그녀에게 키스해 왔을 때, 지독한 열병은 다시금 그녀를 덮쳐 왔다. 마치 더운 여름 바깥에 내놓은 아이스크림처럼 온몸이 녹아들고 속수무책으로 끈끈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6개월이라는 시간을 사무실에서 얼굴을 마주치며 함께 보내야 하는 옛 연인과의 정사는 정상적인 사고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정은 그를 밀어내지 못했고 결국 그와 섹스를 했다.
세정은 주말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처음으로 무단결근을 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회사라는 조직에 숨어 그가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올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출근하지 않았다가 지훈이 불쑥 집으로 찾아오기라도 할까 봐 솔직히 겁이 났다. 집으로 찾아온 그를 그녀가 밀어낼 자신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월요일 아침, 핼쑥한 얼굴로 출근한 세정을 보고 직원들이 한마디씩을 던졌다.
“차장님,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더위를 좀 먹어서 그래.”
“아, 요즘 날씨가 미쳤나, 덥기는 덥죠. 쉬엄쉬엄하세요. 그러다 쓰러지실까 겁나요.”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그녀의 책상에 놓인 차가운 아이스커피가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쑥 들자 옆자리에서 조금 쑥스러운 말투가 들렸다.
“출근하는 길에 차장님 것도 샀습니다.”
“…아. 고마워요.”
4년 전에 신입으로 들어와 올해 대리로 승진한 AE 이윤형이었다. 그가 처음 입사했을 때 그의 사수가 그녀였다. 직장 후배였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입사한 그는 그녀와 나이가 같았다.
그럼에도 윤형은 그녀에게 선배 대우가 깍듯했다. 그는 타고나기를 매너가 좋았으며 무엇보다 일적인 센스가 남달랐다.
광고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한 팀에서 그의 태도는 빛을 발했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결국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의견을 관철시키는 힘이 있었다.
윤형이 있어서 세정의 일이 편해진 것도 그에 대한 신임을 높이는 데 일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윤형이 염려가 깃든 눈으로 말을 이었다.
“금요일 촬영이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R호텔 에스세틱 바우처가 생겼는데, 퇴근하고 가 보실래요? 거기 마사지가 꽤나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에게는 지나가듯 걱정하는 다른 동료들과는 결이 다른 진지함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세정에게는 그의 배려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전 남이 제 몸 만지는 거 별로더라고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아….”
그의 눈빛에 당황함이 스쳤다. 세정은 그녀의 불안한 예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제작팀 김한나 씨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요.”
“하하. 괜히 오해받기 싫습니다. 그냥 여동생 주죠, 뭐.”
윤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세정은 제작팀 팀장인 김한나가 윤형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은근히 흘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그냥 두었다.
세정의 옆자리가 그라는 사실을 알고 김한나는 회식 자리에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그에 대해서 물어 왔다.
일할 때는 늘 냉정한 김한나가 쑥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세정은 내심 그런 그녀가 귀엽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세정은 한가하게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연애사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아! 깜짝이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 회의실은 블라인드가 시원하게 걷혀 있었다. 그 안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훈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었다.
“…여보세요.”
- 세정아.
내선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물론 회의실에 있는 지훈이었다. 그녀는 속삭이듯 작게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죠.”
- 내 차 시트가 엉망 됐어. 너랑 내가 섹스하다가 너무 흘려서. 어쩌지?
“…용건 없으시면 이만 끊겠습니다.”
- 그리고 너 팬티 안 가져갔더라. 내 차 바닥에 뒹굴고 있는 거 내가 발견해서 곱게 챙겨 놨는데. 언제 찾아갈 거야?
세정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월요일 오전, 다들 업무에 바쁜 와중이었다. 거래처와 통화를 하고, 콘티를 담은 보고서가 프린트되고, 커다란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광고주의 메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직원들 중에서 그녀의 전화 통화 내용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요 없으니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지훈이 수화기 너머로 얕은 숨을 뱉어 내며 웃었다.
- 사실은 지금 내 사무실 책상에 넣어 놨어. 너랑 섹스하고 싶을 때마다 이걸로 자위하려고.
“…끊겠습니다.”
세정은 화끈거리는 얼굴로 간신히 답했다. 귀에서 수화기를 떼려는 순간 지훈이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 넌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세정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나지막한 지훈의 말이 이어졌다.
- 난 네가 보고 싶더라, 세정아.
얼어붙은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약점을 아주 잘 알았다. 강하게 그녀를 밀어붙일 것만 같은 지훈이 가끔 그녀에게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속을 내보일 때마다 세정은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특이한 집안의 이력 탓에 지훈은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기를 꺼려 했지만 세정에게만은 예외였다.
그가 솔직하게 말을 하면 할수록 세정은 서로의 마음 사이에 놓인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바람을 피웠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대놓고 경멸했어. 아버지가 섹스하는 여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는 혼자 서재에서 와인을 마시곤 했어. 화장기 없는 얼굴로 허무하게 그걸 보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 그러면서도 그룹의 이익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게 웃겼어, 난. 더럽다고 생각했어. 딸 같은 여자 끼고 놀았던 아버지도, 그걸 보고도 참은 내 어머니도.”
세정은 그가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인간과의 관계를 익히기 전에 손해 보지 않고 협상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어느 순간 그에게 연민이 들었다.
“내 인생에 누구도 들일 생각이 없었어. 여자는 더더욱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 보는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난 그냥 널 가지고 싶었어. 너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내 스스로한테 짜증이 날 정도로.”
그녀 말고는 그의 진심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지훈의 주변에 전혀 없는 듯했기 때문에 그가 숨김없이 속을 드러낼 때마다 더더욱 밀어내기 어려웠다.
“배를 갈라서 심장을 꺼내서 보여 주고, 다시 집어넣는 게 가능하다면 너한테 보여 주고 싶어. 너만 보면 펄떡펄떡 미친 것처럼 반응하는 거, 네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싶어. 그럼 넌 기겁을 하면서 싫어하겠지만 적어도 내 진심이 증명은 되겠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뱉어 내는데도 그가 싫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를 보던 시선에서 느껴지는 진지함 때문이다.
“나한테는 너뿐이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허상 같은데, 그중에 너만 생생해.”
세정은 막무가내로 모든 것을 내보이며 다가오는 지훈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면역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 난 너 보고 싶을 때마다 미칠 것 같더라.
세정은 눈을 서서히 떴다. 회의실에서 완전한 남자가 되어 버린 도지훈이 그때와 같은 시선으로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 지금 널 내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네가 날 바라봐 주지 않아서 더 미칠 거 같고.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그녀의 귓가에 달라붙었다.
- 잊으려고 노력 안 한 거 아니야. 나 싫다고 버린 너를, 나도 한번 싫어해 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봤어. 그런데 안 되던데.
“…….”
- 아무리 애써도 결국 네 앞에 다시 나타날 생각밖에는 안 들던데.
지훈이 작게 숨을 내뱉는 떨림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 넌, 대체 나를 어떻게 잊었어?
세정은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 다시 나타난 나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면 줄게. 너는 그런 성격이니까.
지훈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세정은 그의 긴장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 대신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하지 마, 세정아.
***
펑펑 울던 세정이 마침내 진정한 듯, 눈앞의 지훈을 똑바로 보았다. 학교 앞에서 가장 구석진 골목에 위치한 카페라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누가 죽은 것처럼 통곡하는 그녀의 꼴사나운 모습을 모두가 보아야 했을 것이다.
“다 울었어?”
지훈이 옆에 있는 각 티슈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세정은 공격적인 손놀림으로 티슈를 여러 장 뽑아 코를 팽 소리 나게 풀었다. 지훈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눈, 코, 입 다 빨개져서 엉망이네.”
그가 작게 중얼거리자 세정이 눈만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상관없으니까 신경 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 지금 얼굴이 좀 뜨끈뜨끈하게 야해 보여서.”
세정은 지훈이 멋대로 내뱉는 말에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따지고 들 기력도 없었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기로 했다.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자니 그녀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다시금 울컥거렸다. 세정은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고 크게 숨을 내쉰 후, 지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있잖아. 연애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야.”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건 용납이 안 돼.”
지훈이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말부터 들어.”
“다른 변명 있으면 해 봐.”
그가 팔짱을 끼고 오만한 자세로 그녀를 응시했다. 세정은 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이유거든. 팽팽 놀고 1억은 껌값으로 쓰는 누구랑은 다르게 나는 할머니 식당 일도 봐줘야 하고 공부해서 장학금도 놓치면 안 되고 과외로 용돈이랑 생활비도 벌어야 하거든. 그리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훈이 한쪽 손을 들었다.
“잠깐만.”
“뭐?”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내가 가르쳐 줄까?”
“헛소리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세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기어코 말을 끄집어냈다.
“그때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네 시간을 내가 살게. 그럼 간단하겠네.”
“뭐?”
세정의 입에서 앵무새처럼 같은 물음이 반복해 나왔다. 지훈이 간단히 설명을 이어 갔다.
“아르바이트한다고 생각하면서 나 만나란 뜻이야. 날 이용하라고.”
세정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훈의 표정은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농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너 머리 좋잖아. 뭐가 더 이득인지 계산해 봐.”
지훈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작년 겨울부터 의식이 되었던 그의 깊고 어두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세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다시 헛기침을 하자 그가 그녀의 앞에 늘어선 음료수들 중 생수를 골라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는 카페에 있는 모든 종류의 음료수가 죽 늘어서 있었다. 그녀가 많이 운 탓에 탈수 증세가 날까 염려한 그가 그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시킨 것들이었다.
“마셔.”
세정은 그가 건넨 물을 마다하지 않고 휙 낚아채 꿀꺽꿀꺽 들이켰다. 차가워서 머리가 띵했지만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정은 그를 보며 마침내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너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왜 날 만나고 싶은 건데?”
세정은 적어도 지훈의 입에서 그녀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나오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미친 척하고 그의 고백을 받아 줄 생각도 있었다.
인생 최초의 연애를 도지훈 같은 상대와 하는 것은 정말로 미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훈을 상대할 때마다 이상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성질 나쁜 사냥개처럼 거칠게 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지금 세정의 눈앞에 죽 늘어선 음료수들이었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다 시켰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에는 바보 같은 무모함과 동시에 정제되지 않은 다정함이 느껴졌다.
키스를 하지도 못하고 세정의 얼굴을 감싸 쥐던 커다란 손이 긴장해 덜덜 떨리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했고, 그때만 생각하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더워졌다.
이제껏 그녀에게 고백한 남자는 몇 있었지만 도지훈만큼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과외를 할 때도 문득 그의 오만한 얼굴이 떠올라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답해.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날 만나고 싶은 건지.”
세정은 지훈이 그녀가 주는 기회를 잡았으면 하고 바랐다.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면 연애를 시작하는 쪽으로 이미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다. 궤를 벗어나 어딘가 비틀어진 듯한 그의 행동 속에 가끔씩 드러나는 부드러움이 그녀를 가슴 떨리게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신사답게 사귀자고 청했던 남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눈앞의 오만한 남자에게 느끼는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에게 끌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낯선 감정과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붉어진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지훈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예쁘고.”
세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엉엉 울어서 꼴이 엉망일 텐데 지금 사람을 놀리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모든 일에 열심이고.”
칭찬인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말이 이어졌다.
“볶음밥의 달걀 프라이를 소중히 아껴 뒀다 맨 마지막에 먹는 게 귀여워.”
세정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지금 궁상맞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그런 모습을 보면 난….”
지훈이 혀를 슬쩍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쓸었다.
“너랑 섹스하고 싶어져.”
세정의 입술에서 한숨이 탁 풀렸다. 세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마주 앉은 지훈을 향해 생수병의 뚜껑을 냅다 던졌다.
“섹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돈 주고 여자를 사. 이 발정 난 미친놈아.”
얼굴 옆으로 날아가는 뚜껑을 커다란 손으로 손쉽게 낚아채는 지훈의 모습이 얄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지훈이 작게 웃으며 제 입술을 씹었다.
“내가 발정하는 상대는 너뿐이야, 안세정.”
세정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한쪽 관자놀이가 심하게 지끈거렸다. 아까 학교 캠퍼스 안에서 지훈과 함께 벌인 소동이 그제야 실감 나게 다가왔다.
지훈의 뺨을 때리고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던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리자 편두통이 조금 더 심해졌다.
“하아… 내가 웬 미친개한테 물려서 이 고생인지 잘 모르겠는데….”
세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죽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네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계속 날 이렇게 괴롭힐 거라는 예감은 들거든?”
“정답. 내가 널 괴롭히고 있다는 거에는 동의를 못 하겠지만.”
지훈이 빙긋 웃었다.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꼬물거리는 세정의 얼굴이 귀여웠다. 그는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삐져나온 잔머리를 손으로 죽 잡아당겨 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세정이 무슨 중요한 말을 할 것처럼 뜸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있잖아, 너한테 돈 받고 섹스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하는 세정의 모습이 새삼 사랑스러웠다. 지훈은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돈이 싫으면 다른 걸….”
“입 다물어,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어.”
세정이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훈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람 창녀 취급하지 마. 네가 원래 성격이 신중하지 못한 건 알겠는데,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창녀 취급이라니. 스스로를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것들과 비교하는 거냐고 짜증을 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내며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환의 말에 따르면 여자들이 설교를 할 때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고 했다.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지도 마. 허락 없이 몰래 내 사진도 찍지 마. 스토커 같으니까.”
지훈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휘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시를 확실히 내고 있었지만 세정의 말을 함부로 끊지는 않았다.
그녀는 반쯤 남은 냉수를 꿀꺽꿀꺽 들이켠 후, 빈 병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정의 가느다란 손에서 플라스틱 생수병이 우직, 하고 구겨졌다.
“그리고 나는….”
세정의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기세로 쿵쿵 뛰었다. 이런 말을 직접 입으로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상대는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녀의 의중을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키스건, 섹스건 안 사귀는 사람이랑 하고 싶지 않아. 네가 고지식하다고 말한대도 상관없는데, 일단 나는 그래.”
지훈의 입술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세정은 벌게진 얼굴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 너랑 그때…. 아파트에서…. 그런 건, 정말 충동적이었어. 원래라면 내 첫 키스는 사귀는 사람하고만 하는 거였어.”
그가 입술을 꽉 붙인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의 첫 키스가 세정에게도 확실히 처음이었다는 말이었다. 지훈은 찢어지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분명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며 세정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장황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비웃어도 상관없는데, 나한테는 그런 게 중요해.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몸부터 먼저 섞어? 먼저 마음을 보여 줘야 되는 거 아냐? 사람이면 진심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잖아. 말이라는 효과적인 수단이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일단 나한테 정식으로 사귀자고 말부터…. 흡…!”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상체를 숙였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쥐고 그의 입술이 세정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아랫입술을 촉촉하게 애무하다가 놀라 벌어진 그녀의 입 안으로 달콤히 침범한 후 그녀의 타액을 은밀하고도 강하게 빨았다.
지훈의 아파트에서 있었던 긴 키스의 시간이 떠오르며 세정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턱을 기울였다. 더욱 깊숙하게 각도를 맞추어 오는 그의 키스는 세정이 원하던 첫 키스처럼 부드럽고, 농밀했으며 달콤하고 짜릿했다.
“하아….”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살짝 떨어지고 감았던 세정의 눈이 조심스레 뜨였다.
“거지한테 적선하는 마음으로 나랑 만나, 그럼.”
그의 속삭임에 세정이 한숨을 삼키며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네 진심이 그거야?”
“내 진심?”
“…그래.”
세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허스키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I want you.”
널 원해.
지훈의 숨 막히는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며 가늘어졌다. 사귀자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원한다는 간결한 한마디에 세정의 가슴이 어이없게 빨리 뛰었다.
못된 말만 내뱉는 입술인 줄 알았는데 달콤한 말도 할 줄 아는 거였다. 그에게 반해서 다가갔던 여자들의 마음이 어쩌면 아주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정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다야?”
세정의 떨리는 물음에 지훈이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며 그녀의 귓가에 또렷하게 속삭였다.
“I would like to fuck you so bad.(너한테 박고 싶어서 정말 미치겠어.)”
세정은 그의 숨결이 귀 뒤 여린 살에 닿는 아찔한 감각에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
“차장님, 혹시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되세요?”
윤형의 물음에 세정은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왜요?”
“공연 티켓이 하나 생겼는데 혼자 가기가 좀 그래서요.”
사람 좋게 웃으며 윤형이 제안했다. 세정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같이 갈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네, 없네요.”
“회사에서 지겹게 얼굴 보는 상사한테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을 내 줄 정도로?”
오늘따라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느렸다. 세정은 애써 농담으로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윤형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저는, 안 차장님이랑 일할 때 한 번도 지겹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세정은 난감해진 얼굴로 입술을 딱 붙였다. 이곳은 고백하기에 좋은 장소도 아니었지만 상대를 거절하기에 알맞은 장소도 아니었다.
“…이 대리님.”
“제가, 남자로서는 별로인가요?”
띵.
그의 질문과 동시에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세정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윤형에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죠.”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며 직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윤형이 얼굴에 예의 미소를 올리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답은 천천히 하셔도 돼요. 전 차장님 몰아붙일 생각 없습니다.”
세정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매너 있는 남자라는 것은 세정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대답을 미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이 섰다.
“이 대리님, 저랑 이야기 좀 하죠.”
그녀는 비상계단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회사 안은 어딜 가나 다 분주했다. 그나마 오후면 거의 촬영으로 자리를 비우는 제작팀이 위치한 8층부터 10층까지가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적은 곳이었다. 세정은 창문이 있는 쪽을 등지고 서서 윤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 들은 질문의 대답 지금 할게요.”
“아… 왠지 되게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요.”
그가 세정을 보며 밉지 않게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세정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이윤형 씨, 되게 매력 있는 사람이에요.”
윤형이 세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했다.
“차장님도 그렇습니다.”
“근데, 나는 누군가와 연애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닙니다. 어차피 일에 미쳐 있는 건 차장님이나 저나 마찬가지니까요.”
윤형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용하지만 확신이 있는 그의 말투가 이어졌다.
“지금 당장 저를 좋아해 달라는 말도 아니고, 쉬는 날마다 만나 달라고 차장님께 부담 드릴 생각도 없어요. 쉬고 싶으면 거절하셔도 저 상처 안 받아요. 회사에서는 지금껏 그랬듯이 충실한 부하 직원이 되겠습니다.”
“…연애를 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굳이 나랑 그러고 싶은 이유가 뭔데요?”
“제가 차장님을 좋게 생각한다는 것만이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윤형의 태도는 세정의 예상보다 확고했다. 그녀는 계단 난간을 꽉 잡으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이윤형 씨.”
“말씀하시죠.”
“나는 이윤형 대리가 동료일 때 가장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
윤형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실망하는 그를 보는 세정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애써 결심을 다잡았다.
앞으로도 계속 회사에서 부딪쳐야 될 동료에게 마음에도 없는 여지를 주어 질질 끄는 것이 더 잔인한 일인 것 같았다. 차분하고 냉정한 말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윤형 씨가 남자로서 별로냐고 물었죠? 그건, 대답하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나는 이제껏 일을 해 오면서 이윤형 씨를 남자로 의식하고 행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차장님은 어떤 남자가 의식이 되시는데요?”
윤형의 물음에 세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넌 어떤 남자 스타일이 좋아?”
“뜬금없이 그건 왜?”
“말해 봐.”
“성실하고, 매너 있고, 화 안 내고, 강압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남자. 너랑 겹치는 거 단 하나도 없지? 야, 흡… 으흡….”
“도지훈이라고 말할 때까지 키스한다.”
기억 저편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오르는 이유는 회사 건물 안 어딘가에 지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정은 불쑥불쑥 올라오는 기억을 떨쳐 내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일단 이윤형씨는 아니에요.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도 당황스럽고 불편하고요.”
고개를 떨어뜨리는 윤형에게서 짙은 실망감이 드러났지만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상대에게 미련을 남길 수는 없었다. 세정은 조금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며 대화를 끝내려 했다.
“나가죠. 오늘 이 대리님이 나한테 말한 건,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를 지나쳐 나가려고 하는데 윤형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들은 말을 어떻게 못 들은 걸로 만들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늘 차분하고 온화한 그의 두 눈동자에 숨기지 못하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세정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윤형 대리.”
“솔직히 제 마음 눈치채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신 건, 오직 회사 일 때문이었다는 뜻인가요?”
그의 말에 세정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윤형이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며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많은 거 안 바란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제가 부담스러운 건가요? 저도 차장님한테 다가가려고 자존심 다 꺾고 고백한 건데… 한 방에 무시당하니까 솔직히 좀 화가 나서요.”
윤형은 스스로 말을 곱씹으며 더욱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늘 차분한 성격이었던 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에 세정은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를 진정시켜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윤형 씨, 일단 머리를 좀 식히고….”
“제가 왜 싫은지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전 납득이 좀 안 가서요.”
윤형이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세정은 입을 딱 다물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에 분노가 더해진 남자가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자 두려움까지 들었다.
여기서 그에게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이 상황을 다른 이들에게 광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세정은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가십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여기 회사라는 거, 기억해요. 나는 이윤형 씨 상사라는 거 잊은 건가요?”
“자꾸 저를 부하 직원으로만 대하시니까 오기가 생기네요.”
세정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윤형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손을 들어 세정의 팔목을 잡았을 때였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뚜벅, 뚜벅.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구둣발 소리가 계단에 공명음을 울렸다. 지훈을 발견한 세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황한 것은 윤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제가 사내 성추행 장면을 목격한 겁니까?”
계단을 다 내려와 그들 앞에 선 지훈이 오싹한 눈으로 윤형을 노려보며 입술을 올렸다.
“그 손 안 놓을 건가요?”
윤형이 퍼뜩 세정의 팔을 잡았던 손을 내렸다. 지훈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를 감지하지 못할 수는 없었다.
“이사님, 불편한 장면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안세정 차장이 사과를 할 일이 아니죠.”
지훈이 그녀를 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은 윤형을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입술에서 흐르는 말투는 놀랍도록 차갑고 냉정했다.
“죄… 죄송합니다.”
광고주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윤형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훈이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힐끗 확인한 후, 그에게 물었다.
“이윤형 씨는 회사에 연애하러 나왔습니까?”
“이… 이사님.”
“맘에 들지 않는 상대의 고백에도 회사 생활에 영향 안 끼치려고 최대한 노력하면서 거절해야 하는 상사 기분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이윤형 씨가 프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윤형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만약 지훈이 그저 직장 동료나 상사였다면 지금 발언에 뭐라고 대꾸는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상대는 현재 거래처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집행비로 퍼붓고 있는 회사의 임원이었다.
“광고 대행사가 이따위로 일을 하는데 광고주가 어디 믿고 일을 맡기겠습니까?”
윤형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적인 일을 보여서 죄송합니다만, 이건 저와 안 차장님 둘 사이의 문제로서….”
“고백이 범죄 수준이 되면 그건 더 이상 사적인 일이 아니죠. 내가 중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요?”
지훈이 날카롭게 말을 자르자 윤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저는….”
“이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를….”
“안세정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훈이 잇새로 내뱉었다. 세정은 지훈이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성격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윤형에게 주먹을 날릴 것 같은 그였지만 간신히 참고 있는 이유는 그녀 때문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윤형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간신히 입사한 회사에서 지훈이 어떠한 위치인지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윤형은 세정에게도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차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세정은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형 대리. 일단 자리로 복귀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윤형이 지훈의 눈치를 살폈다. 지훈은 정말 나가도 되는지 망설이는 윤형을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상사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윤형이 다시 허리를 깊숙이 숙여 꾸벅 인사한 후,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세정은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새끼가.”
지훈이 넥타이를 잡아당겨 헐렁하게 만들며 욕설을 잇새로 내뱉었다.
“당장 책상 빼라고 연락해야겠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정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지훈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야. 네가 양보해. 일 잘하는 직원은 세상에 많아.”
“사적인 감정으로 일 처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 웬 존대야. 집어치워, 세정아.”
그가 세정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입술은 올라가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세정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내뱉었다.
“여기 회사입니다.”
“맞아. 네 회사라서 최대한 눌러 참은 거야. 내 성격대로라면 여기서 그 새끼 팔목을 부러뜨렸어야 맞아.”
“지훈아.”
휙 뒤를 돌아 윤형이 빠져나간 문 쪽을 확인하는 그를 세정이 저지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여 그의 슈트 자락을 붙잡자, 지훈이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제게로 바싹 붙였다.
“지금 당장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아득하게 잠겨 낮아진 그의 목소리와 블라우스를 통해 느껴지는 뜨끈한 체온에 세정의 몸에 순식간에 익숙한 긴장이 퍼졌다.
“왜 이래.”
“참으려고 했는데, 꼴같잖은 날파리가 너한테 붙는 걸 보니까 도저히 못 참겠네.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이런 개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생각하니까 더 미치겠고.”
지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올라와 블라우스 위로 그녀의 가슴 위를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덧그렸다.
“이러지 마…. 아….”
미약한 터치에 브래지어 안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세정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세정아. 이 회사에 감시 카메라가 없는 데가 딱 두 군데더라. 회의실이랑 비상계단.”
회의실에는 아이디어의 유출을 염려해 카메라가 없었고, 비상계단은 직원들의 반대로 CCTV 설치가 무산된 바 있었다.
“앞으로 남자랑 단둘이 이런 데 있지 마. 위험하니까.”
그가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댔다. 놀라서 떨어지려는 세정을 붙잡으며 가느다란 목에 열기 띤 키스를 이어 나가자 세정의 입술에서 여린 신음이 터졌다.
“흣….”
귀 아래 부드러운 살과 목선이 이어지는 피부에 닿는 느낌에 그녀는 특히나 민감했다. 살짝 씹히고 빨리자 몸이 바르르 떨리며 곧바로 반응했다. 툭. 툭. 타이트한 블라우스의 단추가 풀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이러지 마. 지훈아. 제발.”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가르쳐 주려는 거야.”
그가 브래지어에 숨겨진 가슴을 꽉 움켜쥐며 낮게 중얼거렸다. 와이어 새로 쑥 들어와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누구 여자인지 말이야.”
얼굴을 떨어뜨려 가슴골을 쭉, 빨았다 떼자 그의 입술 자국이 뽀얀 살결에 선명하게 찍혔다. 세정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신음했다.
“안 돼, 지훈아. 안 돼.”
“밀어내지 마. 어릴 때면 몰라도 지금은 안 통해. 네 말대로 전부 다 해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 다 준비해 놨으니까 너도 양보하고 그냥 내 손 잡아.”
그를 밀어내야 했다. 이대로라면 그에게 몸과 마음이 전부 휘둘리는 것은 예정된 결과처럼 보였다. 지훈은 그녀가 왜 떠났는지 아직도 이유를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밀어냈지만, 사실은 지훈의 곁에 서기에 자신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지훈에게 끝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훈아, 그만…. 하지 마. 제발.”
시간이 흘렀어도 지훈이 가진 모든 배경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아무리 세정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한들 도지훈은 여전히 그녀에게 버거운 상대였다.
“그럼 나가서 할까? 아까 그 새끼 불러서 보여 주면서 할까? 씨팔 새끼가 겁도 없이 누구 여자한테 감히 들이댔는지 똑똑히 알려 줄까? 응? 그걸 원해?”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지훈이 춥, 춥, 가슴에 습한 키스를 퍼부으며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울긋불긋 꽃이 피었다. 지훈의 손길이 닿을 때면 애써 다잡았던 그녀의 마음속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 안 돼…. 흣…!”
세정의 가느다란 목이 진득하게 다시 빨렸다. 지훈은 세정의 상체에 자신의 흔적을 잔뜩 남기며 손으로 스커트를 말아 올렸다.
“지훈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지훈이 그녀의 의미 없는 물음에 허스키하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섹스하기 전에는 젖으면 젖을수록 아프지 않으니까.”
엉덩이를 꽉 쥔 그의 손에서 가운뎃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얇은 팬티 사이를 쓸었다.
“오래전 네가 한 말이야.”
세정은 그때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지훈은 지금 이 상황을 계속 이어 나갈 심산이었다.
“안 돼…. 제발…!”
세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며 지훈이 그녀의 귓가에 뜨겁게 속삭였다.
“안 되는 거 없어. 나는 못 참겠어, 세정아.”
“누가, 누가 올지도 몰… 아….”
“이렇게 젖었으면서 뭐가 두려워?”
“여기서는 안 돼, 지훈아… 제발….”
“안세정 차장이 광고주랑 비상계단에서 섹스하는 관계라는 거, 알려지면 큰일이라서? 난 오히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나가자. 그냥, 나가서 호텔로… 가자. 제발, 지훈아. 응? 흣….”
이대로는 위험했다. 지훈은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굴 것이고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자명했다. 세정의 가슴이 불안과 흥분에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너 아까 왜 거짓말했어?”
그가 손을 앞으로 쓱 돌렸다. 팬티 위로 손가락을 파묻더니 숨어 있는 클리토리스를 찾아내 문지르며 빨개진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무, 무슨 말이야. 흐응…!”
“아까 그 등신이 네 이상형 물었잖아.”
부푼 음핵이 그의 손끝에 닿아 슥슥 문질러지자 내벽에서 뜨거운 애액이 울컥 쏟아지듯 흘렀다. 세정은 흥분을 감당할 수 없어 슈트를 입은 그의 각진 어깨를 꽉 잡았다.
“도지훈이라고 똑바로 말했어야지. 안 그래?”
지훈이 그녀의 젖은 팬티를 엉덩이 아래로 끌어 내렸다. 미끈히 흐른 애액을 중지로 비비며 그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내 손길만 닿아도 이렇게 흠뻑 젖는다고 그 간 큰 새끼한테 제대로 알려 줬어야지. 안 그래?”
“지훈아… 지훈아… 제발… 하읏…!”
“아마 여기가, 이 회사 사람들 고백의 장소 같은 그런 곳인가? 아마 그런 모양이네.”
그가 스스로의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몸을 떨며 잇새로 숨을 내쉬었다.
“널 24시간 감시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앞으로 여기 올 때마다 내 생각 나게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겠다. 그렇지?”
“…지훈아.”
그가 고개를 젓는 그녀를 부드럽게 벽에 기대게 한 후, 눈을 맞추며 잔인하게 웃었다. 세정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그를 보며 불안한 예감에 몸을 떨었고, 그 예감은 곧 현실로 적중했다.
“너, 지금 뭐 하는… 아흣!”
타이트한 스커트가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가고 공기 중에 드러난 그녀의 음부에 그의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내가 여기서 너 빨아 준 거, 잊지 말라는 뜻이야.”
허벅지 위에 걸려 있던 팬티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더니 허벅지 사이가 확 열렸다.
“아… 안 돼,…흡!”
지훈의 입술이 그녀의 축축하고 은밀한 속살에 파고드는 순간, 세정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다.
단지 이곳이 밖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이 회사에 출입하는 직원 수만 천오백 명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도 지훈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것이다.
더 견딜 수 없는 점은 이런 상황에서도 반응하는 그녀의 몸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오직 한 사람만을 알고 그리워해 온 세정의 육체는 다시 만난 상대에게 뜨겁게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맺힐 정도로 오싹한 쾌감이 들었다. 다른 남자와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지훈만이 그녀를 미치도록 떨리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세정의 첫사랑이었고, 첫 연애 상대였다. 세정은 그녀의 음부를 애무하기 시작하는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맛있다, 세정아.”
춥춥, 게걸스레 그녀의 밀부를 핥는 그의 혀와 입술에는 거침이 없었다. 둔덕 사이에 숨겨진 클리토리스를 둥글게 돌리다 쪽쪽 흡착하듯 빨아들이자 참을 수 없는 자극에 세정의 허벅지 안쪽이 부르르 떨려 왔다.
“섹스하고 싶은 맛이야.”
지훈이 중얼거리며 그녀의 내벽에 혀를 쑤셔 넣었다. 뜨거운 질 내벽을 가르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살덩어리의 움직임에 세정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의 혀가 안쪽에 고여 있는 애액을 퍼 올리듯 쿡쿡 쑤시며 움직였다. 안과 밖을 개처럼 끈덕지게 핥아 주는 그의 애무에 세정은 다리에 힘이 풀려 쫙 펼친 손가락으로 맨벽을 짚었다.
“흡…. 하아….”
“내가 처음 여기 빨았을 때 생각난다. 너 그때 눈물 뚝뚝 흘리면서 울었었는데.”
생소한 느낌에 놀라서 울었던 그때와는 다른 기분으로 눈물이 났다. 오싹한 쾌락에 몸을 떠는 그녀를 느끼며 지훈이 여린 허벅지 안쪽을 쪽, 빨았다.
“난 너 아파서 우는 줄 알고 놀라서 달래고.”
세정은 지훈이 보이는 데다 키스마크를 내는 것을 질색하며 싫어했다. 그래서 지훈은 그녀의 옆구리, 유두 옆, 허벅지 안쪽 같은 곳을 빨아 붉은 자국을 내곤 했다.
마치 예전처럼 지훈은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쭉, 흡착하듯 빨았다. 입술이 떨어진 자리의 피부에 피가 몰려 붉게 달아오른 자국이 남았다.
“…흣!”
세정이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충분히 그녀를 애무한 후, 지훈이 마침내 상체를 일으켰다. 높은 콧날과 입술, 인중에 온통 그녀가 흘린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그가 손으로 쓱 얼굴을 닦고 그녀에게 다가오며 만족스레 웃었다.
“세정아, 너 되게 많이 젖었어.”
“지훈아, 이제 그만… 제발….”
“그래. 이제 그만 넣을게.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지익. 바지의 지퍼가 내려가는 작은 소리에 세정의 온몸이 다시 긴장했다.
맙소사. 지훈은 정말로 여기서 기어코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
팬티에서 그녀의 한쪽 다리를 빼낸 후,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손에 감아쥐었다. 드로어즈를 빠져나온 성기는 이미 단단히 발기한 지 오래였다. 쿠퍼액을 흘려 대는 커다란 성기가 축축하게 젖어 풀어진 그녀의 음부에 닿았다.
“지금 당장 박아 줄게.”
세정의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막무가내인 지훈이 이 상황에서 절대로 밀려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그만두라고 말하면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그녀가 제발 박아 달라고 부끄러운 말을 내뱉으며 애원할 때까지 애무를 계속할 것이 틀림없었다. 세정이 지훈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지훈 역시 그녀의 몸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린 연인이었던 그들은 말 그대로 불타오르는 연애를 했다. 지훈은 그때처럼 그녀를 집요하게 가지며 결국 숨 막히는 오르가슴을 이끌어 낼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쾌감이었는지를 그의 차 안에서 다시 확인한 후였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지훈의 앞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했다.
“네가 너무 예뻐서 다른 새끼들이 정신 못 차리는 걸 이해 못 할 건 아닌데….”
지훈이 힘줄이 툭툭 불거진 페니스를 쥐고 그녀의 음핵과 질구를 오가자 미끈거리는 애액이 잔뜩 그의 성기에 달라붙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러면 안 되잖아… 응?”
“지… 지훈아…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두려워?”
“당연하잖아…. 아… 흣…!”
“내가 같이 있는데 뭐가 무서워. 쓸데없이.”
그의 페니스가 그녀의 분홍빛 속살을 벌리며 밀려드는 묵직한 느낌에 세정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의 페니스를 받아들이는 질 입구가 침입자를 환영하듯 욱신거렸다. 지훈이 꽉 깨문 세정의 입술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묵직하게 허리를 끝까지 들이밀었다.
“내 좆을 아주 꽉꽉 물고 빨아들이고 있어, 너. 지금.”
깊은 곳의 근육이 멋대로 그를 조여 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더욱 부끄러웠다. 이 상황에서도 느끼는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 세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흣!”
“아…. 다 들어갔다. 벌써 쌀 것 같아. 어떡하지?”
굵직한 성기가 그녀의 안을 결국 꽉 채웠다. 그가 쿡, 하고 내벽의 한 부분을 찌르자 세정이 말도 못 하고 치켜든 턱을 덜덜 떨었다. 이런 건 반칙이었다. 지훈은 처음부터 그녀가 가장 잘 느끼는 부분을 자극해 오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래도, 우리 세정이 기분 좋게 해 주고 싸야지. 그래야 신사니까. 넌 예의 없는 남자 질색하잖아. 그렇지?”
그의 탄탄한 허리가 힘차게 왕복하기 시작했다.
“지훈아, 안 돼… 제발… 제발 그만, 아흣!”
두려움이 섞인 쾌감은 배가 되어 그녀를 공격했다. 아찔함에 울먹이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며 지훈이 깊숙하게 그녀를 쳐올렸다. 살과 살이 세게 부딪힐 때마다 찰박이는 소음이 비상계단에 울려 퍼졌다.
엉망으로 젖은 그의 굵은 육봉이 좁은 살 틈새를 쑤셨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치고 빠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세정의 숨결이 끓는 물처럼 바글거리며 온도를 높여 갔다.
“겁낼 거 없어, 세정아. 도지훈이 네 옆에 있는데 뭐가… 응? 뭐가 두려워.”
예전의 그가 단지 안하무인일 뿐이었다면 다시 돌아온 지훈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며 빠져나갈 수 없게 설득하고 있었다. 세정은 그것이 더욱 두려웠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의 품 안이었다.
“내가 네 대신 다 욕먹을게. 내가 발정 난 개새끼 할게, 넌 그냥 내 곁에만 있으면 돼. 나만 안 떠나면 돼.”
세상에 하나도 두려운 것이 없는 사람처럼 구는 것은 여전했지만 어릴 때의 치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무르익은 자신감이 대체하고 있었다.
“네가 가진 것들, 하나도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냥 내 손 잡아.”
그의 속삭임은 위험하고 관능적인 악마처럼 달콤했고 세정은 그런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녀만을 위해 흥분해 달려드는 남자에게 가슴이 설레고, 세정을 위해 분노를 간신히 참아 내던 남자의 모습에 심장이 떨렸다.
세정은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성숙한 남자가 되어 나타난 지훈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흣, 으흣!”
그녀의 성대에서 신음이 끊임없이 흘렀다. 찰박이는 아랫도리에서 퍼지는 쾌감이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번졌다. 그녀의 한쪽 발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높은 하이힐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훈이 거친 숨소리를 그녀의 귓가에 뱉어 냈다. 예나 지금이나 섹스할 때, 감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똑같았다.
“씨발, 좋아… 좋아, 세정아… 좋아….”
그와 섹스를 할 때면 오래전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차 안에서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놓은 것 같았다. 퍽퍽거리며 그녀를 쑤셔 대던 지훈이 삽입한 채로 아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아!”
“더 깊숙하게 박고 싶어.”
벽과 지훈의 몸 사이에 끼어 버린 채, 세정은 헐떡이며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훈아, 지훈아. 안 돼… 흣, 흣!”
그녀의 양다리가 공중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정은 그의 목을 꽉 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안 되는 거 없어, 세정아. 그따위 말은…. 내 사전에 없어.”
지훈이 본격적으로 그녀를 흔들며 쳐 대는 순간, 아래층에서 끼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세정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지훈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들어 올렸고, 세정은 그에게 안긴 채 손으로 그의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인간적으로 일을 이렇게 많이 하는데, 우리 점심시간 솔직히 너무 짧은 거 아닌가요.”
“맞아. 광고주들 점심시간에 맞추려면 솔직히 15분 늦게 나갔다 15분 일찍 들어와야 되잖아요. 아, 진짜 악질이야.”
비상계단에 커피 향이 희미하게 번져 나갔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직원들이었다.
“기획2팀이 제일 불쌍해. N사 말이야, 광고주 측 이사가 책상 들고 들어와서 회의실 차지하고 앉았다며? 아… 우리 팀에 안 떨어진 게 천만다행이지.”
“아, 말도 마세요. 엄청 까칠하다던데요? 해외 본사에서 직접 파견됐다는데 뭐 그래요?”
“일 처리는 또 더럽게 까다롭대. 매체팀 김 부장님이 회식 때 술 취해서 아주 학을 떼시던데.”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손바닥에 느껴졌다. 낯선 사람들의 등장에 그녀를 거칠게 박아 대는 것은 멈추었지만 아직도 성기를 그녀 안에 삽입한 채였다. 마치 뿌리 내리듯 꾹 눌러 박은 상태로 지훈이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놓았다.
페니스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살점이 잡힐 때마다 내벽이 아찔하게 자극되었다. 세정은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래도 얼굴은 진짜 뻑 가게 생겼더라. 차라리 그 외모로 연예인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 성질로 어떻게 연예인을 해?”
“하하, 그건 그렇다.”
직원 둘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근데 안 차장님이랑 대학 동기라면서요? 둘 사이에 뭐라도 있었던 건 아니겠죠? 박명우 씨가 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그랬다던데?”
“아, 차라리 그랬으면 우리야 편하겠지. 그 덕에 이제 광고주 똥 좀 덜 닦고 살고 싶은데 아쉽게도 차장님은 남자는 눈에 거들떠도 안 보잖아요.”
“그랬던가?”
세정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그 와중에 입이 막힌 지훈이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바닥을 할짝 핥았다.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지만 차마 그의 입을 막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시한폭탄 같은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라도 할까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지훈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읽었다는 듯 대놓고 손바닥을 느리게 핥으며 놀리는 중이었다. 세정은 그의 나른한 시선에 숨이 턱턱 막혔다. 지훈은 마치 눈으로 웃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 누구냐, 작년 상반기 때 서눔 냉장고 찍었던 걔가 엄청 들이댔는데도 안중에도 없었잖아요.”
“맞아. 그러고 보니 입사하고 나서 안 차장이 남자 만나는 거 아무도 본 적 없다.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능성 있어. 진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담겼다. 그들의 대화가 당황스러운 방향으로 전개되자 세정이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그의 남근을 조였다. 그녀의 손끝에 닿는 지훈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의 반응을 알아챈 세정이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느리게 움직이며 다시 그녀를 아래에서 찌르기 시작했다.
함부로 그를 밀어내려 움직였다가 그 어떤 소리라도 날까 봐 세정은 차마 반항할 수도 없었다. 이 와중에 완벽하게 젖어 버린 음부에서는 약하게 찰박이는 소리까지 났다.
세정은 울상이 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신음을 참아 냈다. 제발 지훈이 움직이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는 잔인했다.
“……!”
그녀는 절정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응? 무슨 소리 안 들렸나?”
‘제발, 제발 지훈아….’
그녀의 붉은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박았다가 뺄 때마다 그녀의 속살이 치덕거리며 그의 굵은 페니스에 따라 붙었다. 그가 오만하게 쭉 뻗은 콧날을 찌푸렸다. 그의 사정 역시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아, 제 휴대폰이요. 피드백 이메일이 지금 왔네. 슬슬 들어가 볼까요?”
세정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자리 좀 오래 비웠다고 팀장이 또 지랄하겠다.”
아래층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문이 열리고 쿵, 닫히자마자 지훈이 퍽, 하며 그녀를 거칠게 올려 박았다. 세정은 그의 목을 붙잡고 참았던 신음을 토해 냈다.
“하윽! 하읏!”
“하아, 세정아, 사람들이 너 여자 좋아한다고 착각할 정도로 남자한테는 관심 없이 굴었던 거야?”
지훈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뚝뚝 떨어졌다.
“흣… 안 돼, 이제 그만… 아흣!”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짓만 골라서 해? 응? 안 그래도 예쁜데 왜 예쁜 짓만 하냐고. 응?”
퍽, 퍽, 내부를 박아 대는 힘이 커질 때마다 안에서 터질 것 같은 쾌감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계점을 향해 부풀어 올랐다.
세정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울먹이는 신음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엉망으로 흔들렸다. 마치 구슬이 달린 추가 빠르게 흔들리듯 뽀얀 엉덩이가 공중에 튕겼다가 지훈의 고환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페니스와 질벽이 서로를 삼켰다 뱉어 내며 흥분의 산물을 뿜어 댔다.
“우리 예쁜 세정이 이상형은 성질 더러운 도지훈인데, 그 사실을 아무도 몰라. 그렇지?”
“아, 지훈아. 아, 아, 제발…!”
“우리 세정이가 섹스할 때, 얼마나 야한 신음 소리를 내는지… 내 좆을 얼마나 끊어지게 조이면서 애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 응? 세정아.”
세정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몸속에서 빵빵하게 부푼 풍선이 큰 소리를 내며 뻥 터져 버렸다. 그의 페니스가 깊게 쑤시는 박자에 맞추어 세정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 그의 입술이 세정의 입술을 덮었다.
“흐으윽…!”
붙은 입술 새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아찔한 신음이 터져 나갔다. 오싹하리만큼 아찔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그녀의 몸이 엉망으로 덜덜 떨리며 수축했다. 쥐어짜이는 감각에 지훈 역시 절정에 올랐다.
“…다시 시작하자. 나랑.”
그가 그녀의 귓가에 아득하게 중얼거렸다.
“내 처음을 가졌으니 마지막까지 책임져.”
숨을 몰아쉬는 세정을 꽉 끌어안은 팔은 기대고 싶을 정도로 단단했다.
“네가 내 인생에 없었던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어.”
세정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