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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이 세상 두 쪽 나도 내가 너 책임져 (10/17)

09. 이 세상 두 쪽 나도 내가 너 책임져

회사를 빠져나온 세정은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꼬박 이틀 동안을 시체처럼 지냈다. 쌓아 놓은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다시 침대에 눕기를 반복했다.

사표는 수리될 것이고 그녀는 직장을 잃었다. 당장이라도 노트북을 꺼내 헤드헌터에게 연락을 하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회의실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지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면 칼같이 끊어 낼 수 있는 성격이었다. 오래전 그들의 이별이 그 증거였다.

“네가 나 같은 놈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너 같은 남자 두 번은 못 만날 것 같아. 사양할게.”

“대체 이유가 뭐야.”

“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만나고 또 별 이유도 없이 헤어져.”

“이유가 뭐냐고, 씨발!”

“욕하지 마. 무식해 보이니까.”

“지금 욕이 안 나오게 됐어? 설명해. 납득할 수 있게 이야기해.”

“나는 너랑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까 연애도 그만하고 싶어.”

세정의 차분한 말에 지훈이 눈을 번뜩였다. 그는 그녀가 왜 갑자기 이별을 말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눈치였다.

“…너 혹시, 누구 만났어?”

“됐고. 나는 너랑 결혼할 생각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처음부터 난 너랑 연애한 거야.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누구 만났냐고! 엄마? 누나인가? 아니면 형이야? 누구야. 누구야!”

“미친놈처럼 굴지 마. 여기 너희 집 아니야.”

“씨발, 당장 다 죽여 버릴 거야.”

“도대체 네가 무슨 힘이 있는데!”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리를 치는 그를 보며 세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일부러 둘만 있는 곳이 아닌 공공장소를 선택했지만 지훈은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세정은 냉정함을 가장하며 싸늘한 말투로 그를 몰아붙였다.

“도경물산 막내아들. 그 잘난 타이틀 말고 너, 도지훈이라는 인간이 가진 게 대체 뭐야? 네 배경 다 빼면 네가 뭘 할 수 있어? 결혼을 혼자 하니? 너랑 나랑 둘이 하는 거야. 근데 내가 너의 뭘 보고 어떻게 가정을 꾸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응? 말해 봐.”

“…뭐라고?”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지훈의 반듯한 이마에 엉망으로 주름이 졌다. 세정은 꼬리가 잘린 뱀을 공격하는 여우같이 굴었다.

“대답 못 하겠지? 당연하지. 넌 네가 가진 잘난 가족들 빼면 그냥 일개 대학생일 뿐이거든. 너랑 결혼하자고? 그럼 난 어떻게 되는데? 재벌 집 며느리? 그게 네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전부야? 아니! 나 그거 싫어. 나는 네 어머니한테 무시당하고 살고 싶지도 않고, 수치스러운 욕을 먹어 가면서 아침 식탁에서 눈물 뚝뚝 흘리고 싶지도 않아.”

“내가 그렇게 안 놔둔다고 하잖아!”

“철없이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너를 내가 어떻게 믿고 내 인생을 맡겨? 아니. 나 그런 거 싫어. 못 해.”

지훈이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그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세정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에게 쏟아 내는 화살은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와 심장에 그대로 꽂혀 들어갔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도지훈. 내 실력 인정받으면서 일하고,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과 결혼하고, 마당이 있는 이층집 지어서 커다란 개 키우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평범하다고 내뱉었지만 세정에게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삶이었다. 남들에게는 소박한 꿈일지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가져 보지 못한, 하지만 상상할 수 있는 현실의 범주 안에서는 최고의 삶이었다.

그리고 세정은 지훈이 그런 그녀의 옆에 서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훈이 그녀에게 선사하려는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너는 아니야…. 너는… 너는 아닌 거야, 지훈아. 우리는 아닌 거야.”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눈이 펑펑 오는 날, 그는 외투를 걸치는 것도 잊은 채 카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눈을 맞으면서 힘없이 걸어가는 지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정은 오래도록 오열하며 흐느꼈다. 이별의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쓰라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기나긴 겨울을 지나 다시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캠퍼스 내에서 지훈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그가 외국의 영주권을 포기하고 군대에 자원입대를 했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도로 유학을 떠났다고 말했다.

세정에게 감히 그의 근황을 물어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에게 쏟아지던 무언의 시선은 곧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세정은 꿋꿋이 학교에 다니며 최고 학점을 유지하고, 졸업을 했고, 직장을 찾았다.

“하….”

저도 모르게 세정의 눈에서 눈물이 길게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옛일을 되새길 필요도 없이 이제 지훈과는 완벽하게 끝이 났다. 회의실에서 지훈은 그녀에게 그의 방식대로 마지막 손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고 세정은 그의 손을 외면했다.

지훈의 말대로 그는 누군가에게 두 번 거절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카페를 걸어 나가던 그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던 것처럼 지훈은 그녀의 인생에서 다시 사라질 것이다.

지잉.

휴대폰이 매트리스 위에서 강력하게 진동했다. 손을 들어 휴대폰을 확인한 세정은 퉁퉁 부은 눈을 찌푸렸다. 끝 번호가 0301인 전화번호. 지훈의 명함에서 발견하고 난감함에 입술을 씹어야 했던 그의 번호가 끈질기게 액정에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 1

세정은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대폰을 꼭 쥔 손이 떨렸다.

지잉.

「전화 받아.」

이번에는 메시지가 떴다. 지훈의 메시지를 글자로 마주했을 뿐인데도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그녀에게 다가오는 지훈의 행동에 세정은 무차별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진동음이 강하게 울렸다.

부재중 전화 2

이대로라면 그의 전화를 받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세정은 휴대폰을 베개 밑에 감추고 거실로 나가서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꺼냈다. 컵에 찬물을 가득 따라 마신 후, 초조하게 거실을 오가다 결국 다시 침실로 돌아와 휴대폰을 보았다.

「안세정. 난 너 없이 안 돼.」

지훈의 말투가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만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으며, ‘제발’이라고 말하는 그 간극이 생생하다.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제발. 세정아.」

「기다릴게. 너 몰아붙이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 밀어내지 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정은 퉁퉁 부은 눈을 감고 애써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지훈과 함께 울고 웃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그녀를 괴롭혔다.

과거와는 달리 매달리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정은 결국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못 참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버릴 것 같았다. 세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뜨끈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가리며 소리 죽여 울었다.

***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들으며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새벽, 회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오며 그는 텅 빈 세정의 책상에 눈길을 주었다.

책상 옆 바닥에는 세정이 가져가지 못한 물품들이 자그마한 상자 안에 몽땅 들어 있었다. 지훈은 입술을 씹으며 차 키를 챙겼다.

그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면서 수백 번 다짐했던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희생하는 일이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세정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일상의 행복을 지켜 주고 싶었는데 결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너한테 갈게. 만나서 이야기하자.」

끼익하는 거친 엔진음을 내며 지훈을 태운 승용차가 주차장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도로에 차는 적었다. 계기판의 속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속력을 내는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지만 1초라도 빨리 그녀를 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오피스텔이 위치한 곳으로 핸들을 거칠게 꺾으며 지훈은 액셀을 세게 밟았다.

조수석에 던져둔 휴대폰을 찾는데 손에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아까 급커브에서 차체가 옆으로 쏠린 탓에 기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세정에게 혹시나 연락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훈은 마음이 급해졌다. 달칵.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한껏 옆으로 기울였다.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지지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이 떨어진 조수석의 바닥을 훑었다.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휴대폰이 걸렸다. 겨우 휴대폰을 들어 올리고 후, 하고 숨을 뱉어 내는 순간이었다. 지훈의 눈앞에 빔 라이트가 점멸했다.

빠앙!

젠장.

차체가 충돌함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그의 온몸을 강타했다.

세정아.

빨리 널 보러 가야 하는데.

***

“헉….”

세정은 눈을 번쩍 뜨고 숨을 헐떡였다. 머리맡에 빛나고 있는 전자시계는 새벽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잠옷을 벗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와 침대 머리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꿈에서 지훈은 몇 번이나 나타나 그녀에게 소리쳤다. 네가 이제 와서 나 없이 정말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울부짖었다.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세정은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지금 너한테 갈게. 만나서 이야기하자.」

확인하지 않은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수신된 시각은 새벽 2시 반이었다. 세정은 무의식적으로 현재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 두 시간이 흘러 있었고 그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는 그게 다였다. 만약 정말로 그가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다면 이미 도착을 하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휙.

세정은 이불을 걷어 내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혹시 그가 문 앞에 와 있을까, 정말로 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침실에서 현관까지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생각이 다 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문에 조그맣게 난 렌즈로 바깥을 살폈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

벽에 툭, 하고 등을 기댄 세정의 입술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나는 대체 뭘 바랐던 걸까.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 놓고선, 그의 연락에 전전긍긍하고 혹시나 그녀에게 달려오지는 않았을까 두근거리며 긴장한 스스로가 한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이래 놓고선 어떻게 그를 잊을 수 있다는 걸까.

세정은 침실로 돌아갈 힘도 없어 거실에 있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직도 밖은 깜깜한 밤이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잉.

다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탁자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요란히 진동하다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정은 소파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지훈이 아니라 부장이었다. 이 시간에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통화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직은 사표가 완전히 수리되지는 않은 상태라 차마 거부를 할 수는 없었다.

“네, 부장님.”

- 안 차장. 쉬고 있는데 미안한데….

박정도 부장의 목소리가 조금 곤란한 듯 느껴졌다. 세정은 뻑뻑한 눈자위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네, 무슨 일이세요?”

- 놀라지 말고 들어. 도지훈 이사가 말이야….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이름을 다시 들으니 한숨만 나왔다.

“…네.”

휴대폰을 귀에 댄 세정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 도 이사가 새벽에 회사에서 이동하다가 삼성역 부근에서 교통사고가 좀 크게 났단다. N사 측에서 전해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광고주 쪽이라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야…. 안 차장이 도 이사랑 대학 동기라며. 지금 회사 근처 대학 병원에서 수술 중이라는데 안 차장이 나중에 가서 도 이사 상태 좀 확인하고 얼굴 좀 비쳐 주면 안 될까?….

세정의 아랫입술이 시퍼렇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귓가가 웅웅거리며 전화를 건 상대의 말이 단어로 조각조각 나뉘었다. 사고. 수술. 병원. 끔찍한 단어들이 그녀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얼마나 많이 다쳤는데요? 얼마나요!”

세정이 갈라진 목소리로 높이 소리쳤다.

- 모르겠어. 우리도 지금 그게 파악이 안 되니까….

그녀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손이 벌벌 떨려 그대로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너한테 갈게. 만나서 이야기하자.」

설마 그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의 집으로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난 것일까.

세정이 아는 지훈이라면 허투루 그런 메시지를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제야 그가 왜 집에 찾아오지 못했는지 퍼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었다. 세정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턱 밑으로 눈물이 툭툭 흘러내렸다.

“지… 지훈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걸까. 끔찍한 상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난무했다. 피투성이가 된 지훈의 얼굴이 떠오르자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세차게 뛰며 속이 울렁거렸다.

“아아… 지훈아….”

세정은 소파에서 내려오다 바닥에 엎어졌다.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실내복 차림으로 외투만 아무렇게나 걸치고 휴대폰만 주워 든 채 현관을 나섰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로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찾았다.

“지… 지갑… 지갑….”

핸드백을 찾는 세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가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훈이 입원해 있다는 병원이었다.

“도지훈…. 도지훈 환자 찾으러 왔는데요.”

“실례지만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사무적인 질문이 세정에게 되돌아왔다. 잠옷 차림으로 달려온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병원은 이른 아침에도 분주했다. 링거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 휠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를 엘리베이터에 태우는 보호자들, 이동 침대를 들고 서둘러 이동하는 의사와 간호사들 사이에서 세정은 뜨거운 호흡만 가쁘게 내쉬었다.

“저는…. 저는 지훈이의… 흐윽….”

세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항상 지훈은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는 그녀밖에 없다고, 이 세상에 여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말했는데 그 손을 두 번이나 내친 것은 바로 그녀였다.

“지훈이 어디 있나요…. 우리 지훈이 보게 해 주세요…. 하아….”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도 이사님 지금 수술 중이십니다. 가시죠, 안세정 씨.”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침통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세정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지훈의 수행원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따라나섰다.

“지훈이… 괜찮은 거죠? 그런 거죠?”

굳게 닫힌 수술실에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한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정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지훈의 수행원을 보았다.

“말해 주세요. 지훈이… 지훈이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건지… 흐윽….”

남자의 말에 따르면 사고가 난 시각은 새벽 3시. 지금 시각은 오전 9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여섯 시간이 넘는 대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수술실 안에서 누워 있을 지훈을 떠올리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정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의자에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새벽에 자차로 급하게 이동을 하시다가 중앙선을 침범한 음주 운전자 차량과 충돌을 하셨습니다. 이사님이 속도를 내시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 충격이 컸습니다.”

세정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아프게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무겁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마르지도 않고 흘러내렸다. 지훈이 차를 얼마나 빨리 몰 수 있는지는 옆에서 경험해 본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충돌 당시 이사님께서는 핸들을 급하게 꺾었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창문 쪽으로 튕겨 나갔습니다.”

귓가로 들리는 잔인한 말들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세정은 이를 꽉 물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상대 운전자는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세정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거칠게 내뱉는 숨결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비명 같은 울음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흐으…. 윽….”

“이사님께서는 왼쪽 다리가 무릎 위까지 충돌 차량과 차체에 끼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세정은 손으로 차가운 벽을 짚었다.

“수술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요?”

세정이 멍한 표정으로 수행원을 올려다보았다. 수행원이 짧은 침묵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설사 수술이 무사히 끝난다고 해도 한쪽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후두둑. 눈물 자국이 회색 바닥에 흩뿌려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것 같았다.

안 돼.

지훈아. 안 돼.

“괜찮으십니까?”

수행원이 비틀거리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세정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공포와 불안이 꽉 찬 그녀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괜찮아요.”

세정의 입술에서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괜찮아요.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였지만 무서울 정도의 의지가 담긴 말투였다. 수행원은 지훈의 수술이 특히나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최고의 외과의가 투입되었지만 솔직히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세정은 지훈이 수술을 무사히 견디고 깨어나기만 해 준다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해도 그럴 수 있었다. 그녀가 핏발 선 눈으로 문이 닫힌 수술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훈이도 당연히 괜찮을 거예요.”

지훈아.

제발 이겨 내 줘.

세정은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가 지금 저 벽 너머에 누워 있을 지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훈은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었으니까.

제발 이번에도 한 번만 날 봐 줘.

그는 늘 말했었다. 신 따위 믿지 않는다고. 그가 믿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나도 널 믿을게, 지훈아. 그러니까 제발 예전처럼 당당하게 웃어 줘.

***

중환자실의 면회 시간은 하루에 30분이었다. 세정은 수술을 마치고 잠들어 있는 그의 머리맡에서 뚫어져라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수행원이 역시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메시지를 작성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지훈의 가족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중이리라.

몇 시간 전, 병실 밖에 기자로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보였지만 경비원들에 의해 급하게 자리를 떠야 했다. 도경물산의 막내아들에게 일어난 교통사고는 경제지에서 충분히 가십으로 소비될 수 있는 거리였다.

지훈의 승용차와 충돌한 음주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지훈의 가족이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기 힘든 것은 그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고의 원인은 중앙선을 침범한 상대 운전자의 과실이었으나 지훈의 배경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세정은 말없이 누워 있는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한쪽 다리는 발끝부터 허벅지 끝까지 붕대와 깁스로 칭칭 감겨 있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앞으로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다고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신경이 완전히 손상되는 것은 막았지만 제대로 걸으려면 오랜 재활이 필요하다는 설명에 세정은 조용히 마른침만 삼켜야 했다.

‘너는 이런 상황에도 혼자여야 하는구나.’

세정은 그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간이 뜨거워졌지만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지훈의 가족들은 수술 동의와 후속 절차를 위해 평소 지훈의 곁을 지켜 왔다는 수행원에게 연락한 것이 다인 듯했다.

아무리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다쳤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안세정.”

세정과 수행원의 눈이 동시에 지훈을 보았다. 세정은 떨리는 걸음으로 그의 머리맡에 한 발 다가갔다. 지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응, 지훈아…. 나… 나 여기 있어.”

“세정아….”

그는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그녀를 찾고 있는 지훈을 보며 세정은 떨리는 손으로 링거가 꽂혀 있지 않은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세정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결국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지훈의 손은 여전히 너무도 따뜻했다. 마치 그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가 장례식에서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주었던 때처럼.

“안세정. 내 눈 똑바로 봐. 바보 같은 생각 할까 봐 미리 말한다.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해서 너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거 아니야. 네 옆에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마. 이 세상 두 쪽 나도 내가 너 책임져.”

그들은 둘 다 어렸지만 그때 지훈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허튼 생각을 할 수 없게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세정은 지훈 덕분에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세정은 그와 어떻게 헤어질지를 생각했었다. 그 사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후회스러웠다.

그가 진심을 다했을 때조차도 자존심 때문에 그를 밀어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미웠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에게 이별을 말하던 때로 돌아가서 스스로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너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 남자를 하나도 잊지 못할 거라고, 뭐가 중요한지 하나도 모르면서 헛똑똑이처럼 잘난 척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그녀가 지훈의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그가 지금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정은 지훈의 사고가 마치 그녀의 탓인 것 같은 죄책감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지훈아. 내가 내 마음을 외면한 벌을 이렇게 받나 봐.

세정은 마취가 서서히 풀리는지 고통스러워 얼굴을 찌푸리는 지훈을 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손등으로 흐르려는 눈물을 서둘러 닦아 냈다.

더 이상 울어서는 아무 일도 해결할 수 없다. 지훈이 눈을 떴을 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지훈이 가장 힘들 이 시기에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라면, 그리고 지훈이 가장 아플 이 시기에 꿈에서라도 찾는 이름이 그녀라면, 그걸로 그의 곁에 설 이유는 충분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던 때, 지훈은 아무것도 두려운 것 없는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는 그녀의 차례였다.

“식사라도 하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중환자실 바깥 의자에 앉아 계속 지훈이 있는 병실 문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세정을 보며 수행원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세정은 수술 후 바로 깨어나지 못한 지훈의 곁을 밥도 먹지 않고 자지도 않고 지켰다. 눈이 쑥 들어간 그녀를 옆에서 보기가 염려스러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사이에 지훈이 깨어나면 어떻게 해요. 저는 못 가요.”

세정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더 큰일일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수행원의 말에 세정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대로 지훈이 깨어났을 때, 엉망인 모습을 보이게 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힘든 그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세정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얼른 집에 가서 옷가지랑 이것저것 챙겨 올게요.”

“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수행원이 그녀를 재촉했고 세정은 그에게 당부하듯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라도 지훈이 깨어나면 꼭 전해 주세요. 저 지훈이 절대 안 떠날 거라고요.”

“…….”

“꼭 좀요. 꼭이요.”

그의 대답을 받아 낸 후에야 세정은 병원을 나섰다. 작열하는 태양에 눈이 부셨다. 지훈은 곧 깨어날 것이고 그의 곁에는 그녀가 있을 것이다. 지훈을 지키려면 더 이상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 들었다. 세정은 어깨를 쭉 펴고 빠르게 걸었다.

***

세정은 긴장되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 특실의 문을 열었다. 지훈은 침대에 다리 한쪽이 들린 채 누워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그녀를 보았다. 세정은 짐 가방을 옆으로 내려놓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많이 아프지? 잘 참았어.”

“왜 왔어?”

지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틀 전, 그는 뼈가 엉망으로 으스러져 철심을 박고 맞추는 수술을 했다. 세정은 듣기만 해도 뼈가 쑤시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의연했다. 세정은 애써 얼굴에 미소를 올렸다.

“왜 오긴. 보고 싶으니까 왔지.”

“내가 걱정이 돼서 온 건가? 한쪽 다리 영영 못 쓸지도 모른다는 소리 듣고?”

그가 자조하듯 내뱉었다. 세정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풀었다.

“의사 선생님 말 제대로 안 들었구나? 재활 치료 하면 된다는 말은 못 들었어?”

“가라. 그냥.”

지훈이 그런 그녀를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늘 빛나고 자신만만하던 지훈이었다. 그가 지금 느껴야 하는 기분이 얼마나 참담할지 예상할 수 있었기에 세정은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훈아.”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가.”

지훈이 침잠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그 눈동자에 숨겨진 빛을 찾으려 노력하며 세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게. 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날 도와줄 수 있는데?”

지훈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데 달려가 안아 주지 못하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비참했다. 수술이 끝난 다리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깁스를 푼다고 해도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는 아랫입술을 꽉 씹었다.

“너, 강한 사람이잖아. 재활 훈련 하면 돼.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내가 불쌍해서 옆에 있어 준다는 건가?”

그녀의 말을 자르는 지훈의 입에서 자조 섞인 한숨이 흘렀다. 세정은 지훈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가슴이 더욱 아렸다. 여태껏 부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이 살아온 그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충격적일지 모르지 않았다. 세정은 지훈이 이 정도로 침착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재활 훈련사라면 너 말고도 훨씬 전문적인 사람 쉽게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내가 네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래. 안 돼?”

지훈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말했던 건 너야.”

“넌 그런 날 못 잊어서 붙잡았잖아.”

세정이 가라앉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투는 차분했다.

“두 번 차이는 거, 용서 못 하겠다고 말한 네가, 나한테 매달렸잖아.”

“…내가 널 잡으려고 지난 6년간 노력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내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인지도 모르지.”

“지훈아.”

“네가 영원히 휠체어 신세로 살지도 모르는 남자 곁에 있어야 할 이유 없어.”

지훈이 쓰게 중얼거렸다. 그는 세정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를 떠나겠다는 태도를 바꾸고 이렇게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에게 죄책감을 씌워 주고 싶지 않았다. 올가미가 되어 그녀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도지훈.”

세정이 그를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가 눈물에 반짝였다.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휠체어에 앉아 있든 지팡이를 짚든 넌 도지훈이야. 너 이겨 낼 수 있어. 나는 여태까지 너만큼 오만하고 잘난 사람은 보지도 못했어. 내 인생에… 너만큼 날 뒤흔든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거짓말하지 마.”

지훈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응시하며 낮게 말을 이었다.

“동정은 그만둬. 너무 뻔해서 듣는 내가 더 초라해지니까.”

“…그래? 그럼 더 솔직히 말할게. 예전에, 내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말한 이유.”

세정이 마침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꺼내 놓았다. 더 이상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나한테는 네 배경이 너무 버거웠어. 내 인생을 뒤집는 게 불안하고 무서웠어.”

지훈이 그런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지금 내가 다리를 못 쓸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 배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세정아.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네가 그렇게 버거워한 내 배경 정도면 내가 아무리 다리가 불구가 되더라도, 곁에 있을 여자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어.”

“그게 내가 되면 안 돼?”

세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지훈이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세정.”

“네 다리는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도 다 괜찮아.”

세정의 목소리에 희미한 물기가 번졌다.

“나 그냥 네 옆에 있고 싶어, 지훈아. 나…. 전화받고 정말…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런데도 수술실에 들어간 너 기다리면서 생각한 건 있잖아, 네가… 네가 살아 있는 게 감사하다는 거였어. 나 너 영영 못 보는 줄 알았어.”

고개를 세차게 젓는 세정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한 벌은 가혹했다.

“널 이렇게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여기가….”

세정은 터지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아프게 씹으며 가슴을 쿵, 하고 아프게 두드렸다.

“누가 내 심장을 꽉 쥐어 터뜨리는 것 같아.”

그녀는 그를 보며 눈물을 겨우 참아 내며 웃었다.

“지훈아, 나 너 사랑해.”

그녀의 말을 듣는 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흰자위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제발.”

그가 마침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꽉 잠긴 목소리가 그의 마른 입술에서 흘렀다.

“…이리 와.”

세정은 그에게 꽉 안겼다. 혹시나 그녀가 우는 모습에 지훈이 더 비참해할까 봐 겁이 나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제멋대로 터져 나와 지훈의 환자복을 뜨겁게 적셨다.

지훈이 그녀의 진심을 혹시나 동정으로 여겨 그녀를 밀어낼까 봐 두려웠다. 세정은 숨겨 온 진심을 모두 드러냈다.

“어릴 때부터 계속 사랑했어. 네가 내 앞에 나타나고부터는 더 그랬어. 가슴이 뛰고 머릿속에 온통 도지훈 생각에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였어.”

세정을 안은 그의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세정은 그의 품 안에서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자꾸 흔들려서, 너 안 보려고 했어. 결국에는 내가 너한테 상처받을까 봐…. 흑… 네 조건이 아직까지 나한테 너무 버겁게 느껴져서…. 그래서 그랬던 것뿐이야. 근데 너 다치고 깨달았어. 그따위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내가 뭐가 중요한지 몰랐던 거야, 지훈아. 나는… 너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 이제야 알았어.”

세정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지훈의 말이 맞았다. 그따위가 뭐라고 그렇게 신경을 썼을까. 그의 배경이 어떻다 한들 그라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닌데, 왜 지레 겁을 먹고 그를 밀어내려 했을까. 사랑을 포기하려 했을까.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지만 지훈을 아예 못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 봐.”

지훈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차가웠던 검은 시선에 감췄던 열망이 그제야 드러났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 날 사랑해?”

세정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사랑해. 지훈아.”

세정의 입에서 서러운 고백이 터져 나왔다. 입 밖으로 한번 내뱉으니 이리도 쉬운 말을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

“나랑 같이 있자. 너 없이 버텨 냈던 하루하루가 난 너무 아까워, 지훈아.”

“그렇게 쉽게 말할 일 아니야. 나… 진짜 못 걸을 수도 있어.”

지훈이 쓰게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에 떨렸다.

“아니. 넌 걸어.”

세정이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그의 손등에 번졌다.

“넌 걸어. 네가 할 수 있는 거 난 알아. 하지만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네가 못 걸어도….”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던 절망감이 떠오르자마자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 순간 세정이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상실감, 그리고 후회였다.

지훈에게 끌리는 마음을 숨겼던 것에 대한 지독한 후회에 눈물이 끊이지가 않았다. 이제껏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끔찍한 현실 앞에 미세한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그녀는 지훈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영원히 그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도록 두렵게 만들었다.

“내가 네 다리 돼 줄게. 네가 발목 다친 나 안고, 달동네 계단 올라갔던 것처럼은 못 해도 내가 너 옆에서 부축하고 쓰러지면 일으켜 줄게…. 그러니까 지훈아… 제발… 나랑 같이 있어. 응?”

그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터졌다. 그는 세정을 다시 끌어안았다. 거친 숨결이 그의 잇새를 타고 흘러나왔다.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도지훈이 그런 꼴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지훈이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세정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여린 목덜미에 축축하게 젖은 그의 숨결이 닿았다.

“나는 상관없어. 사랑해. 사랑해, 지훈아…. 흑….”

지훈은 눈물로 고백하는 세정을 끌어안고 다짐했다. 품 안의 여자를 고생시키는 등신 같은 남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병원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게 차라리 나았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그러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세정이 그의 곁을 계속 지켰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다.

남자답게 그녀를 보내 주고 싶었지만, 사랑한다는 세정의 말 한마디에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세정을 안은 지훈의 떨리는 손에 힘줄이 솟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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