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뜻밖의 사건.
지수 앞에서의 엄마의 행동이 과감해 질수록 내 신경은 지수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난 몇 번이나 지수에 대하여 걱정스런 말을 엄마에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엄마는 지수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넌 그 애 친 아빠야.”
단순히 그렇게 말하고는 이야기를 피해버리는 엄마와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화를 내어도 엄마는 웃기만 할 뿐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누군가와 상담할 처지가 못 되었다. 아빠를 떠올려 보기는 했지만, 아빠의 여자였던 엄마가 이제 완전하게 내 여자가 되었다는 것까지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고, 더욱이 아빠의 아내로 있는 그 여자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뒤로 아빠에게 연락할 용기는 더욱 나지 않았다.
제삿날 조차도 아빠와의 대화는 정말 최소한이었고, 내 느낌만 그런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빠 역시도 나를 그리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모든 것은 내 탓일 수도 있었다. 엄마를 가진 이 후부터 난 아빠의 눈을 단 한번도 바라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혼자만의 고민이 계속 될수록 해법이 없는 내 고민은 내 신경을 모두 곤두서게 했고, 급기야 내 어깨에 기대어 TV를 보려는 엄마를 미쳐내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그 행동은 다소 거칠었다.
“왜……?”
엄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런 엄마를 난 무섭게 노려보며 지수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지마……”
“……..”
엄마는 빙긋 웃었다. 마치 나를 놀리는 것처럼……
“우리 이야기 좀 해……”
“그래……”
엄마는 쉽게 대답을 하면서 나를 따라 아파트를 빠져 나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았다.
“왜 그래? 지수 있는 데서……”
“뭘?”
“몰라서 묻는 거야? 도무지 엄마 생각을 모르겠어. 왜 그러는 건지.”
“말했잖아. 지수는 네 딸이야.”
“그걸 물은 거 아니잖아.”
“그럼 뭐가 궁금한 거야?”
“지수가 알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너 바보지?”
“뭐?”
“지수에게 언제까지 숨길 생각인데? 아니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말 그대로야……”
엄마는 다시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미소라도 그 때만큼은 짜증스러웠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지수에게만 큼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한다는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말이다.
“그럼 지수에게 알리려고 그렇게 한다는 거야?”
“아니……”
“그럼 뭐야?”
“이미 알아.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러는 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뭐?”
순간 난 숨이 턱 막혔다.
“어느 날, 지수가 내게 말해서 안거야. 엄마랑 오빠랑 왜 사랑을 하는 거냐고 말이야..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애가 들었나 봐. 방에서 너와 내가 관계를 맺을 때. 나름 대로는 한참을 고민을 하고서 내게 말한 거 같았어.”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애들이 많이 알더라. 생각도 깊고…… 어쩔 수 없이 다 말했어. 네가 친 아빠라는 것과 또한 네가 내 아들이란 사실까지 모두 다. 생각보다 지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난 그 애와 약속을 했어. 만약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너와 나는 아마 죽게 될지 모르니까 말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그런 바보 같은……”
“바보 같지 않아!! ”
“…!!!”
“바보 같은 건 너와 나야! 좋은 것만 빼먹으려고 하는 그런 바보는……”
난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너 스스로 알길 바랬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말할 게. 최소한 집에서만큼은 지수에게 아빠 노릇을 하기 바래. 당당하게. 지수가 말은 안 하지만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너도 한 아이의 아빠니까 그 책임을 다해주었으면 해.”
“…………”
난 힘없이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돌아서서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난 그런 엄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도무지 머리 속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이상하게도 혜정선배가 몹시도 그리웠다.
그 날 이후 집에서의 내 행동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특히 지수가 곁에 있을 때는 거의 정서불안 환자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에 반해 지수와 엄마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같은 모습으로 밥을 먹고, 내게 말을 하고, TV를 보았다.
나만 외톨이였다.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한 나는 아빠를 찾아갔다. 이 세상에서 엄마를 제외하면 내가 의논할 수 있는 상대는 아빠뿐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안다. 아빠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자신의 여자를 뺏어간 나쁜 놈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동안 아빠를 피한 것은 나였다.
“무슨 일이냐?”
식사를 마친 아빠는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며 용건을 물었다. 하지만, 난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아빠는 마치 예상하고 있다는 듯 먼저 말을 꺼내었다.
“네 엄마 일이냐?”
“응.”
“그럼 어려워 말고 말해 보거라. 이미 네 엄마에게서 말은 들었다.”
엄마에게서 말을 무슨 말을 들었단 말인가?
“엄마에게서?”
“그래. 부부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다.”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사죄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냐. 나에게 죄송할 건 없다. 이미 예견된 일이니까.”
“……”
“그래 그 말을 하러 온 거냐?”
“그런 것도 있고……”
“또 무슨 문제가 있니?”
“지수가 알아버렸어.”
난 힘들게 입을 떼었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내 말을 더 기다리는 듯 했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지수에게 아빠 노릇을 하라고 하는데, 난 도무지……”
“겁이 나는 거니?”
“모르겠어. 겁이 나는 건지. 하지만, 불안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래. 이해한다. 세상에 알려지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당당해져야 돼. 한 여자의 남자가 된다는 건 그래서 쉬운 것이 아니야. 이제 네 엄마를 넌 엄마로 보아서는 안돼. 네 여자로 보거라. 너와 함께 살아갈 반려자로 말이다.”
“반려자?”
“그래. 네 엄마는 이제 네 아내야. 얼마 전, 네 엄마가 나를 찾아 왔더구나. 갑자기 찾아와서는 그렇게 말하더구나. ‘당신의 며느리로서 찾아왔어요.’라고 말이야. 그 말에 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엄마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말이야.”
“엄마가?”
“그래. 물론, 때가 되면, 네 엄마는 네 곁을 떠날 거다. 아니 떠난다기 보다는 아내의 자리를 비워주겠지. 세상이 정한 룰에 어울리는 여자가 네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 일은 없어. 난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지수야. 지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아빠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이제 곧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건 운명에 맡겨두어라.”
“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니? 네 엄마와 내가 너를 소유할 수 있는 자식으로만 생각했다면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거란 걸.”
“……”
난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지금 지수를 생각하는 것처럼 엄마와 아빠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엄마와 아빠는 그 것을 뛰어 넘은 더 큰 사랑으로 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넌 지수에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부모로서 그 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지수의 몫이야. 지수로 인해 네 인생이 뒤틀린다고 해도 겁을 내어서 안돼.”
“미처 그런 생각은……”
“아직도 네 엄마와 다른 방을 쓰고 있니?”
“응”
“그럼 오늘부터라도 같은 방을 쓰거라. 그게 네가 지수를 위해서도, 네 엄마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야. 세상이 두려워 그들을 가슴 아프게는 하지 마라. 불행할까 두려워서 삶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은 없다.”
순간, 아빠의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난 불행이 두려워 현실을 괴로워 하고 있었다. 내 괴로움은 엄마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지수에게도 영향을 미쳐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불행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아빠를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빠는 뜻 밖의 말을 꺼내었다.
“조만간 네 엄마가 네게 한 여자를 소개 시켜 줄 거다.”
“여자?”
“그래. 너도 아는 여자야. 네 엄마가 며느리로서 나를 찾아 온 날 나에게 말하더구나. 지수가 더 크기 전에 그 여자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말이야.”
“내가 아는 여자라니?”
난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황혜정이라는 여자.”
“……!!!”
“너와 작년 한 해 동안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다고 하던데 아니냐?”
“어..어떻게……”
“지금 네 엄마의 부하직원으로 있는 것 같더구나. 네 엄마는 그 여자애가 입사할 때부터 알아 보았고, 기회가 왔을 때 너와의 관계를 모두 말했다고 했다.”
머리를 해머로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뇌기능이 버벅대며 오작동을 일으켰고, 손이 저절로 떨렸다. 그런 내 반응과 무관하게 아빠는 나직하게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그 여자는 나도 만나보았다. 괜찮은 아이더구나. 너에 대한 사랑도 깊고 말이야. 게다가 이해심도 넓어서 너와 네 엄마의 관계도 받아 들여주더구나.”
“서..선배가 어떻게……”
“놀랄 것 없다.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하지만, 그 전에 네 엄마를 안심시켜 주거라. 네 여자로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이상 네 첫 번째 아내는 네 엄마다. 네 엄마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마라.”
하지만, 아빠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혜정선배에게 내 치부를 들켰다는 생각만 내 머리 속을 가득 메웠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절망감만 엄습할 뿐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준 여자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었는데……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아빠와 헤어진 이후에도 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엄마의 임신 소식을 접했을 때에고, 지수가 내 딸이란 것을 알았을 때에도 이 정도의 충격이 아니었었다. 그저 한 여자가 내 정체를 알게 되었을 뿐인데, 단지 그 것뿐인데 왜 이런 절망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난 어디를 걷는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렇게 한 참을 걷던 나를 누군가 잡았다.
“……?”
아빠의 새로운 아내인,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 보았다.
“왜 그러시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에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왜 그러십니까?”
“지금 차도로 뛰어 들려고 했잖아요!”
“……!!?”
그 말에 정신을 차려 보니 확실히 내 몸을 차도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 재수없는 여자에게 그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미쳤습니까? 왜 차도로 뛰어 들겠어요?”
“그래도 위험해 보였어요.”
“알았습니다. 일단 제 팔이나 놓으시죠.”
내 말에 그 여자는 내 팔을 놓으며 재가 반복된 질문을 했다.
“무슨 생각을 했어요?”
“아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직도 제가 그렇게 미운가요?”
“그 이야기는 이미 한 것으로 아는데요.”
“알아요. 우리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실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볼일 보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난 재빨리 몸을 돌려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다시 내 팔을 잡았다.
“왜 이러십니까?”
“우리 차 마셔요.”
“할 이야기 없어요.”
“저는 있어요.”
뜻 밖에도 그 여자는 진지했다. 이전과 달리 가식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 느낌에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그 여자는 다신 한번 나에게 차 마실 것을 권유했고, 난 결국 그 여자를 따라 근처에 있는 커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낮 시간이라 그런 점포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 여자와 난 가게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뭐 마실래요?”
“커피요.”
내 말에 그 여자는 웨이터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서 조용하게 입을 떼었다.
“먼저 축하 드려요.”
“무슨 말씀이시죠?”
“어머님과 부부처럼 산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거 라면 오히려 제가 축하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바라시던 일 아니던가요?”
“제게 아직 감정이 남아 있군요.”
“그런 건 없습니다.”
난 부정했다. 그 여자는 내가 감정을 가질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기에 말이다.
“그 말은 제가 미워할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여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씁쓸하군요.”
“장난 그만하시죠. 우린 감정을 숨겨가며 대화할 사이가 아닌 듯 한데……”
“지금 둘째 아이를 가졌어요.”
그 여자는 엉뚱한 말을 꺼내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 이야기가 이 대화에 왜 끼어 들까? 그 여자를 만나서부터 긴장감을 가진 내 뇌조직은 여자의 저의를 알아내기 위해 빠르게 연산을 했다. 하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냥 그렇다고요.”
“그 아이. 제 아버지의 아이가 맞습니까?”
난 얼마 전, 엄마와 함께 목격했던 그 여자의 외도 현장을 떠올리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내 말에 여자는 황당한 표정이 되어 나를 응시했다.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입니다. 한국말도 모르십니까?”
“상당히 불쾌하네요.”
“상쾌한 기분이 되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왜 그런 의심을 하시죠?”
“몰라서 묻습니까? 저 보다는 본인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몰라서 묻는 거에요.”
여자는 상당히 기분이 상한 듯 시선에 노기가 묻어 있었다. 뭐 뀐 놈이 성낸다고 내 눈에는 적반하장으로 보였다.
“얼마 전, 러브 호텔에서 아버지 외의 남자와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
여자의 눈이 커졌다. 상당히 놀란 듯 입까지 벌어진 그녀는 이전과 달리 쉽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1년 사이 감정 통제 기관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왠지 그 여자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본성이 쉽게 바뀌랴.
“이제 변명을 해보시죠. 제가 잘 못 본거라고 우길 건가요?”
“……”
“왜 말이 없으신 거죠?”
재차 재촉을 하자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연극일까? 순간적으로 혼란을 느낀 내게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여자가 나에게 접근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엄마와 내가 그녀를 본 것처럼 그녀 역시 우리를 본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지혁씨 어머님이랑 같이 보았나요?”
“그게 중요한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물어 보았을 뿐이에요.”
“그럼 변명이나 해보시죠.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제 태도도 변화시켜 보겠습니다.”
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상대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이상 승자로서의 아량까지 베풀었다.
“변명? 아니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잘못을 시인하는 건가요?”
“예.”
“그럼 앞으로 제 태도에 대하여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마세요. 난 당신을 내 새엄마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서 무시하지도 않을 테니 다른 것은 바라지 마세요.”
“수진이 아빠한테 말할 건가요?”
“장난 합니까? 아버지는 저 때문에 이미 충격을 받을 만큼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또 충격을 주라고요? 제가 그렇게 철면피인줄 아십니까? 만약, 당신이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한답시고 엉뚱한 말로 충격을 준다면, 당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제 스스로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말아요.”
그녀는 끝까지 차분하게 말했다. 왠지 연극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1년 사이 뭔가 변한 것만 같았다.
“믿어드리죠.”
“하지만, 저를 나쁜 여자로만 보지는 마세요. 수진이 아빠를 배신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니까.”
“궤변을 늘어 놓을 생각이라면 그만 두세요.”
“궤변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에요. 그 남자는 수진이 아빠를 만나기 이전부터 만나던 남자니까요. 수진이 아빠의 상관이죠. 수진이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만나지 않았는데, 얼마 전, 만나주지 않으면 수진이 아빠가 위험할 거라고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만난 것뿐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제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믿건 안 믿건 상관없어요.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를 속이고 계속 만나겠다는 건가요?”
“제 과거로 인해 수진이 아빠를 다치게 할 순 없으니까요.”
“핑계가 좋군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강하게 말한 그녀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정 변할 것일까? 믿을 수 없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를 빼앗기 위해서는 엄마에게 해코지라도 할 기세였는데 어떻게 쉽게 변할 수 있을까?
“연극하지 마세요. 보기 흉합니다. 차라리 예전처럼 독하게 구세요.”
“심하군요.”
“진심이란 말인가요?”
“그래요.”
“그럼 제게도 몸을 줄 수 있습니까?”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난 그런 그녀를 마주 응시하며 확실하게 반복해서 말했다.
“제게도 몸을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제…… 제 몸을 주면 저를 믿어 줄 건가요?”
“예.”
“나쁜 사람이군요.”
“제가 보기에는 수진이 엄마가 더 나빠 보입니다.”
“제 말이 그렇게 거짓 같나요?”
“누구라도 내 입장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예전 같은 간사한 느낌도, 카멜레온 같은 변화도 일지 않았다. 그제야 난 뭔가 잘 못되어간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요. 가지세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왠지 모를 오기심에 난 그마저도 믿지 않았다. 난 그녀가 지금 나를 공범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가지면, 아빠를 또 다시 배신 하는 것이 되었기에 난 그녀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즉, 그녀는 그런 계산을 하고서 자신을 몸을 나에게 준다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아빠 외의 남자에게 준 몸인데 어떻게 굴리든 무슨 상관일까?
즉, 이것은 나에게만 불리한 거였다.
“왜 대답이 없죠?”
이번엔 그녀가 내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내 무덤을 판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진심입니까?”
“저를 놀리는 건가요?”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여자니까요.”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도중 그녀는 뭔가 통증을 느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1년 전 그 날의 일은 잊어 주세요. 제가 말을 심하게 했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그때는 저도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수진이 아빠는 늘 지혁씨와 지혁씨 어머니 생각 뿐이었죠. 두 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데, 난 질투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나도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았고, 그 사람을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나는 돌아 봐주지도 않더군요. 주변 사람들이 날 보면 행복에 겨워 하는 것 같았겠지만, 속 사정은 그렇지 않았어요. 난 그 사람의 껍데기와 같이 살 뿐이었으니까요. 으음……….”
말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끝내 신음을 내며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악~~”
순간, 그녀는 배를 움켜 잡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건 실제 상황 같았다. 표정이 한껏 일그러진 그녀는 괴로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신음소리 조차 낼 수 없는 것 같았다. 난 반사적으로 일어나 카운터를 향해 119를 불러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녀를 잡았다.
“으윽….”
그녀는 내장이 끓는 듯한 신음을 내며 내 팔을 잡았는데 팔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가득 베여 있었고, 뼈가 울리는 듯한 진동이 내 몸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혹 아이가……?-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지만, 아랫배를 움켜 잡은 것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젠 그녀가 나쁜 여자고, 아니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통 앞에서는 악인, 선인의 구분이 필요 없다. 법 앞에서는 불평등 할지는 몰라도, 고통은 만인이 평등하니까 말이다. 근처에 소방서가 있었는지 5분도 지나지 않아도 구조대가 왔고, 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다. 병원에 도착하는 내내 그녀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받는 듯 했다.
재수 없는 날.
응급실에 도착하자 마자 곧바로 수술실로 향한 그녀를 보며 난 혼란을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내 치부를 들켰다는 소리를 들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꼴도 보기 싫은 여자 때문에 병원까지 따라 왔으니까 말이다. 난 아빠에게 연락을 할 생각도 못하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머리를 쥐어 뜯기만 했다.
혹여 아이가 잘 못되기라도 한다면?
내 책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몸을 요구하자마자 그런 일이 터졌으니 말이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었다. 그 말만 안 했어도, 내 죄책감은 보다 덜했을 것이다. 그녀가 작정이라도 하고 태아가 잘 못된 것을 충격을 준 나에게 미룬다면 꼼짝없이 당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아빠는 그녀가 바람을 피운 것보다 내가 그 말을 한 것에 더 큰 배신감을 느낄 테니까.
“젠장!!!!”
“씨팔!!!”
“니미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욕이 마구 터져 나왔다.
수술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뭔가 잘못 되어 산모의 목숨도 위험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무렵. 수술실의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나왔고, 뒤이어 그녀가 수술실을 빠져 나왔다. 내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로 쏠렸고, 낯선 용어를 사용하는 의사의 말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쉽게 말씀하세요. 산모와 태아는 어떤 상태입니까?”
“흠…… 태아는 불행히도 유산입니다. 산모도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날벼락이었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아빠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솔직하게 다 말해야 하나?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면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녀가 나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유산을 했다고 한다면, 나로선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생각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난 아빠에게 연락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