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8화 브라델(24)
* * *
바람이 불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겠지.
"케에엑...?"
"어?"
나를 포함한, 그리고 심지어 칼을 맞대며 싸우고 있던 고블린들마저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의 대기에 어리둥절한 기색이다.
이색적인 느낌. 무엇인가 틀림없이 달라졌다.
하지만 무엇이 바뀐거지?
'...공기가 멈췄어.'
숲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벌레의 울음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새들이 재잘대며 떠드는 소리...
그리고 심지어 고블린들과 병사들이 싸우는 소리마저도 일시적으로 작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바람이 불었다.
부우우우웅!
"끼에에엑!"
"크웩!"
멈춰있던 대기를 뚫고, 고블린들의 머리 위쪽으로 연녹색 기운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폭발적인 굉음은 없었지만, 십수기의 고블린들이 단숨에 그 기운에 휩쌓여 빛이 되어 사라진다.
쓰러진 고블린들에겐, 그래 마치 재해와도 같은 일격이었다.
"후우... 괜찮은가?"
깊은 한숨을 쉬며 쓰러진 병사와 우리를 살피는 자는... 그래, 어쩌면 저 연녹색 기운을 보고 그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연녹색 단발에, 슬랜더한 몸매와 잘 어울리는 타이트한 보라빛 레깅스와 흰색의 레오타드.
레아 브라델, 이 브라델 땅의 젊은 영주였다.
20마리에 가까운 고블린을 순식간에 잡아낸 저 연녹빛 기운은 이미 한번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브라델에서 이 숲까지 수백의 병사를 이끌고 온 기운. 보병이 섞인 그렇게나 많은 병사들을 굉장한 속도로 이끌고 온 그녀의 능력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의 맨 앞에서 레아가 내뿜던 연녹빛 기운과 같은 색이었으니 그녀가 나타날거라는 기대는 충분히 할법한 것이었다.
다만 그녀가 상당히 지친 기색으로 혼자 이렇게 나타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 영주님. 강력한 고블린이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무기를 들고 고블린과 싸우던 병사가 레아에게 우리가 만나 고블린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굉장히 힘이 강한 개체였습니다. 평범한 고블린들과 외모가 다르지 않았는데, 일격에 파티와 저희 병사들을 쓰러뜨렸습니다. 케너드 부대장도..."
"크윽... 염치가 없습니다."
어느새 케너드 부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꽤나 요란하게 날아갔지만, 평범한 병사나 우리보다는 강한 인물이라 그런지 [완파]되거나 특별히 거동을 못할 정도의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굉장히 힘이 강한 고블린이었습니다. 외관이 다르지 않아 조금 방심했다가 한방먹었는데, 맞은 위치가 안좋았는지 잠시 기절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지. 부대장은 나중에 치료소에 들러보게나. 그래서 그 녀석은 어디로 갔나?"
레아는 케너드를 더 추궁하지 않고, 병사에게 고블린이 사라진 방향을 묻는다.
"저쪽입니다만,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쉽사리 추격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케너드 부대장, 자네가 쓰러진 병사들과 용사를 부축해 숲 입구로 가 치료를 해 주도록 하게."
"수습은 병사들에게 맡기고 저라도 함께 가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함께 쫓겠다는 케너드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젓는다.
"아닐세. 지금 다른 병사들도 전부 숲 입구로 돌아가라고 명해두었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러고보니 영주님도 여기 혼자 오신건..."
레아가 작게 한숨을 쉬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더욱 수척해보인다.
"몬스터들이 광란에 빠져 병사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네. 이건 아마... 아니,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살피도록 하지. 우선 자네들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게."
그리 말하곤 레아는 쓰러져있는 우리에게 작게 눈으로 인사를 하곤, 고블린이 사라진 방향으로 순식간에 달려나간다.
슈우웅!
짧게 바닥을 박차는 데에 마치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평범하게 달려 나가는 데에도 굉장한 속도다. 이 짧은 순간에 그녀가 우리와는 수준이 다른 강자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우리를 쓰러뜨린 고블린은 굉장한 힘으로 나와 유나를 쓰러뜨렸지만, 레아와 비교하면 어떨까. ...아니, 그런 비교를 하는 것조차 레아에겐 실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고블린은 일격에 병사들과 나를 쓰러뜨렸지만, 힘이 굉장히 강한 고블린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로서는 대항하기 벅찬 상대지만, 레아와 비교하면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짧은 시간 살펴본 그녀의 기량은 그저 경이로웠다.
대기를 뚫고 나타나 단숨에 20마리에 가까운 고블린들을 자연스럽게 학살하고, 굉장한 속도로 다시 그들을 쫓아나갔다. 그 고블린과 도저히 비교할만한 기량은 아니겠지. 둘이서 정면으로 맞부딪혔을때 레아가 전혀 밀릴거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녀가 상당히 피곤해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그 고블린에게 질 거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정도로 믿음직스런 기량이다. 그녀가 우리의 적이 아닌게 이제서야 감사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케너드와 병사들이 [완파]된 병사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포션입니다. 성능이 좋은 건 아니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몸을 움직이는데는 충분할겁니다."
"..."
병사가 물약을 가져와 내 입에 천천히 부어넣는다. 맛은 조금 떫은 물이었지만, 남정네가 직접 먹여주는 물을 마신다고 생각하니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긴 하다.
그렇게 수습한 병사들과 함께 천천히 돌아가게 되었다.
"...져버렸네요."
유나가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신경쓰이지만, 더 신경쓰이는 쪽은 그녀의 의복이었다.
특정 수준을 넘어가면 조금씩 의복이 파괴되면서 방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상태를 [중파]라고 하는데, 이 상태부터는 의복을 통한 방어력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기에 전투를 하는데에 상당히 조심스러워진다. [중파]된 상태에서도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생명력이 다 떨어지면 [완파]상태가 되고, 행동불능 상태가 되고 의복으로 얻는 방어력은 없어진다. [중파]가 시작된 시점보다 [완파]가 되면 의복도 많이 파괴되는 것도 당연하고.
병사들과 우리 파티는 [완파]상태에 빠졌었다.
당연히 의복이 여기저기 파괴되어 있는 상태다. 병사들이야 어차피 남이고, 내 몸이야 까놔도 그다지 부끄러울건 없었다. 내가 입은 평범한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도 여기저기 찢어져 수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쓰러졌을때 확인했던 유나의 모습은 지금도 굉장했다.
한쪽 가슴쪽의 천은 완전히 찢겨져 나가 유나가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가리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찢겨져 나간 천은 그녀의 허리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었고, 짧은 치마쪽은 정면에서의 시선에서 그녀의 속옷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다.
힐끔거리는 기색을 막기 위해 일부러 병사들의 뒤쪽에서 걷고있는데, 옆에서 걷고 있는 유나의 모습은 나를 평범하게 걷기 힘들게 만든다.
"제가 용사님을 지켜야했는데 미안해요."
"음, 뭐..."
풀죽은 유나를 위로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괜찮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그럴만도 한게, 실제로 우리는 꽤나 위험한 상태였으니까.
나를 일격에 쓰러뜨린 그 고블린은 즉시 우리로부터 멀어졌지만, 완파된 우리를 상대로 다른 고블린들이 나타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레아가 그 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끝장났을지도 몰랐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순전히 레아의 탓으로 돌리기도 쉽지 않은 것도 맞는 일이겠지. 케너드 부대장과 병사들이 함께 있어서 안전할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 고블린이 규격 외로 강했던 것이니까. 적이 케너드를 날려버린 순간 발을 빼고 도망쳐야 했을까? 이건 나도 조금 반성.
그래도 유나를 격려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는 대화의 방향을 돌리는게 맞겠지.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한거야? 칼로 주먹의 방향을 막아낸거 있잖아. 대단하던데."
"아, 그거요?"
응, 확실히 이쪽으로 주제를 바꾼게 정답이었던것 같다. 유나의 얼굴에 조금의 활력이 돈다.
"한방에 사람들이 날아가는걸 보니 상당히 힘이 쌘 적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평범하게 주먹과 부딪히는건 별로 안 좋을것 같았어요. 아시다시피 전 힘이 쌘 타입은 아니니까요."
나보다 근력 능력치가 두배정도 되는 유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검의 면을 이용해서 공격해 오는 방향을 천천히 틀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힘이 쌘만큼, 이상한 쪽으로 주먹을 내보내는데 성공하면 그 후의 틈이 많아질 테니까요. 반정도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실패했어요. 상상한것보다 힘이 쌔더라구요."
실제로 그 고블린의 주먹이 검의 면을 타고 절반정도는 내려오면서 방향이 틀어졌었다. 유나가 말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유나가 무릎을 꿇었지만.
유나가 양손을 가슴앞에서 불끈 쥐며 의지를 다진다.
"그래도 조금만 연습하면 다음엔 성공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엔 꼭 이길게요!"
"응, 기대할게."
손으로 가렸던 가슴이 주먹을 쥐는 바람에 내앞에서 작게 출렁인다. 분명 어제 저녁에서 실컷 주므르고 빨면서 맛보았던 가슴인데, 이렇게 야외에서 다시금 흔들리는 걸 보니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어진다.
...젠장, 오늘은 빨리 숙소를 잡아야지.
민망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유나의 손을 잡아 그녀의 가슴을 가린다.
"아..."
유나도 자신의 몸이 꽤나 무방비하다는 걸 알고, 다시금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가린다.
그렇게 천천히 병사들의 뒤를 따라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크흠, 우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케너드 부대장이 뒤쪽으로 조금 떨어져 걷고 있던 우리들에게 와서 작게 고개를 숙인다.
"위험한 일은 없을거라 생각하고 함께했는데, 전부 제 불찰입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실제로 고블린들이 좀 많아지자 그가 제일 앞에 나섰고, 그 전까지는 우리가 꽤나 쏠쏠하게 고블린들을 사냥해 왔으니까.
그로써는 나름 최선을 다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겠지. 굳이 그를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 실력이 부족해 영주님의 손님께 실례가 되었습니다.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아마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수리를 하는 병사나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사도 있을겁니다. 거기서 조치를 할 수 있게 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장비가 썩 좋은 건 아니라서 수리비가 많이 나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같은 초보 파티에겐 그것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사과하며 함께 하는 제의인데, 거절하면 오히려 케너드가 불편할거다. 기분좋게 호의를 받아들이자.
"그런데 영주님과 아시던 사이십니까?"
"만난지 얼마 안되었어요. 며칠전에 산적을 잡아와서 우연히 뵙게 된 사이라서요."
"아, 그 산적들을 잡아오신 분이 용사님이셨군요. 그것때문에 영주님이 꽤나 기뻐하셨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케너드가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네, 영주님이 용사님을 꽤나 신경써주시는 것 같긴 합니다. 원래라면 이런 군사임무에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예전부터 아시던 사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영주님과 이야기하면 만난지 얼마 안 사이인데도 꽤 이야기가 잘 통하긴 하더라구요."
유나와 함께 식사를 한 자리에서도, 밤 늦게 우연히 레아와 만났을 때에도 영주라는 직책과 상관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아마 그녀도 그러지 않았을까?
케너드는 영주의 손님과같은 내 위치가 신경써서 그런지, 숲을 빠져나갈때까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런데 영주님이 특별히 아이템을 주거나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전방에서 오신 분이니, 영주님에겐 조금 하찮은 물건이라도 시작하는 파티에겐 도움이 되는 물건도 많이 가지고 있으셨을겁니다."
"특별한 아이템이요?"
물론 레아에게 '유령망토'라는 아이템을 받았다. 하지만 케너드가 '특별한 아이템'이라고 하니 망토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물건이 하나 생각한다.
"아!"
이제서야 떠오른다. 처음 레아와 만났을 때 그녀가 나에게 인장을 주었다. 호의의 증표로, 언젠가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는 증표로 준 것이다. 분명 브라델의 국경을 넘으면 태워달라는 말도 덧붙였었지.
인밴토리에서 그 인장을 꺼내 확인한다. 검은색 방패가 박혀있는 인장. 손바닥에 가득 차 있는 인장을 잡고 있자, 그녀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이건 영주로서가 아닌 레아, 개인으로서의 친구로서 공관에 올 수 있는 인장일세.'
친구로서.
그렇게 말한 레아의 말이 떠오른다.
...친구라.
"아, 용사님. 저기 다들 모여있어요."
케너드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숲의 초입까지 다다른 모양이다. 유나의 말대로, 브라델의 병사들이 여기저기 모여 사태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야기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왔어요."
"그렇습니까. 저쪽으로 가서 제 이름을 대면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겁니다. 저는 보병대의 상황을 점검해야해서 이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케너드가 떠나간다. 유나를 데리고 한창 치료와 수리에 열중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간다.
아직도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유나를 보며 눈을 호강하고 있던 내게 이제서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아에게서 받은 망토를 유나에게 입히면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찾은 임시 치료소에는 병사들 이외에도 여성 모험가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어림짐작해도 20, 30명은 되는 것 같다.
저렇게나 고블린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으리라. 그녀들은 꽤 초췌한 행색이었다. 아마도 여기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도시로 들어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겠지. 그곳에서 고블린의 새끼를 생산하는 [저주]도 제대로 치료받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흔한 일이기도 하다. 제대로 치료를 받고, 동굴에서 받았던 치욕은 다시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풀게 되겠지.
의복을 수리하고, 사제의 스킬을 통해 생명력을 회복한 우리는 병사들과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서 레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오늘 내일중으로 브라델을 떠날것 같은데, 인사라도 하고 가는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물론 그녀가 언제든지 오라고 인장을 주긴 했지만, 우리도 떠날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기회가 있을 때 눈인사라도 하는게 맞겠지.
케너드 부대장이 뒷처리를 하면서 기병대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충분히 우리에게도 들리는 거리였다. 상황이 조금 궁금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케너드 부대장이 그런 나를 보고 가볍게 웃더니 기병대장과 계속 이야기를 나눈다. 애초에 영주의 손님인 나에게 들려도 상관없는 이야기라 신경도 안쓴다는 느낌이다.
덕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은 계획한대로, 보병대가 동굴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기병들이 그들을 휘젓는 것까지 성공했다. 고블린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대부분 사방으로 흩어졌고 포위망은 성공적으로 펼쳐져 차근차근 고블린들을 섬멸해 나갔다.
지휘관 개체를 찾는데 조금 애를 먹었지만, 영주인 레아가 도망치려던 특별한 개체를 확인했고, 레인저 부대와 함께 그 몬스터를 쫓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특별한 상황이 없었다면, 작전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겠지.
그리고 레아와 레인저 부대가 그 몬스터를 쫓기 시작하려는 찰나,
고블린들의 눈이 붉게 빛나며 [광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기병의 돌격에 거의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지던 고블린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어찌되도 상관없다는 듯이 돌진해오는 바람에 공터의 고블린을 섬멸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기병대가 위험에 처하자 레아와 레인저 부대도 당장은 그 고블린을 쫓을 수가 없었고, 어느 정도 고블린들의 기세를 꺾는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아무리 [광란]상태에 빠져 호전적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고블린은 평범한 고블린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공터의 고블린들의 저항은 약해졌고, 기병대만으로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레아와 레인저부대는 다시 추격을 개시하려 했으나 또 한번의 소식을 받게 된다. 포위망의 밖에서도 [광란]에 빠진 고블린들이 병사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소식. 당장은 큰 피해가 없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영주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병사들을 물리도록 명령한다. 포위망 외부에서도 고블린이 습격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이야기였다. 우연히 광란에 빠진 고블린들이 병사들을 습격한다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기병대와 레인저부대 대부분은 공터와 동굴의 고블린을 정리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치료소에 눕혀진 여성들은 그 와중에 구해온 모험가들이었다.
포위망을 형성하던 보병들은 뭉쳐서 후퇴하도록 명을 받았다고 한다. 나와 케너드 부대장이 있던 쪽은 가장 멀리 있어 후퇴하라는 소식이 늦은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소수의 레인저들과 영주는 그 고블린을 향해 추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케너드 부대장이 상황을 설명한다.
평범한 외형의 고블린처럼 생겼으나, 그 고블린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고블린이었다. 외형에 속아 조금 방심한 탓에 케너드는 일격에 날아가 잠시 기절해버렸고, 이후엔 영주님이 나타나서 우리 모두를 구해주었다고. 조금 시간이 흘렀지만, 영주가 계속 그 고블린을 쫓아갔다는 것까지.
'흠...'
단순히 동굴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러 왔던 것이지만, 꽤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조금 복잡한 일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만간 브라델을 떠날 예정인 나에겐 크게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긴 하다. 그리고 레아가 보여준 초인적인 힘을 보았을때, 그녀라면 얼마든지 이런 일을 해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문뜩, 고블린을 쫓아가기 전 상당히 피곤해하던 레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냐.'
이건 내 일이 아니다. 영주는 그녀고, 그녀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정리를 하고 있자, 평소보다 조금 크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반기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길을 열어준다. 레아와 몇명의 레인저가 고개를 저으며 병사들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실패인가.
어제 저녁, 레아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말한대로 고블린들이 가득찬 동굴이 있다면 확실하게 포위해서 몬스터들을 섬멸해야한다네. 분명 그 동굴안에 지휘관 개체가 있을테니, 그것만큼은 놓쳐서는 안되네.'
아마 나와 케너드 부대장을 날려버리고 도망친 힘 쌘 고블린이 그 지휘관 개체일 것이다. 그 개체를 잡지 못했으니, 동굴의 고블린들을 섬멸하고 모험가들을 구했어도 실패한 작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아마, 레아는 이 말 다음에 그런 말도 했었다.
'동굴을 포위해서 지휘개체를 확실히 잡으려면 엘릭 보위 대장과 그의 보병대의 협조가 필수적일세. 하지만 아까 봤다시피 보위 대장은 그리 협조적이지 않다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올라간다. 브라델에서 숲으로 오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느긋하게 나타난다.
"험험, 조금 늦었소.'
백발이 무성한 마른 체격의 노인, 보위 대장이 이제서야 온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