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플레이하는 용사님-100화 (100/233)

〈 100화 〉 99화 히드라와 마왕 (7)

* * *

관저를 나와 잰걸음으로 걸으며 히드라의 포격이 들리는 방향을 살핀다. 당연히 어제와 동일한 동쪽 성벽에 히드라가 포격을 가하고 있겠거니 싶었는데...

"...남쪽?"

레아가 조금 의아한 말을 내뱉는다. 바쁘게 걷느라 그녀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 나처럼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밤새 히드라의 브레스를 막아낸 동쪽 성벽은 약간이나마 그 결계가 약해졌다. 그런데 이번엔 동쪽이 아니라 몬스터들이 포획한 영웅들을 잡고 들어간 남쪽 숲쪽에서 히드라가 브라델의 성벽을 포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둘러 올라간 남쪽 성벽 위에서 그 사실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 쿠오오오오오오!!

어둠이 지기 시작한 남쪽 숲. 저 멀리서 조금 익숙한 거대한 몬스터의 형태가 보인다.

"역시 히드라군."

레아의 말과 동시에 저 멀리서 히드라의 입이 크게 열리고, 커다란 불덩어리가 브라델의 위로 떨어진다.

­ 콰아아앙!!

낮게 울리는 폭발음. 하지만 이제는 저 히드라의 장거리 포격에 호들갑을 떨며 도망치는 이들은 없었다.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민병대도, 그리고 우리들도 이미 히드라의 포격은 브라델의 방어막을 뚫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 밤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케르르르..."

성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익숙한 몬스터들. 조금 어둑해지긴 했지만, 그들이 조금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단순히 히드라의 포격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을 가지며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살피는데, 그들이 뒤편으로부터 '무언가'를 브라델에서 잘 보이게 옮기는 것이 보인다.

"..."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망원경을 꺼낸다. 약간 어둡긴 하지만, 퍔필리아의 인챈트로 꽤 먼거리를 살필 수 있는 망원경이다. 언뜻 본 그것이 맞는지, 망원경에 눈을 대고 다시 확인한다.

...역시.

"저건...!"

"젠장! 더러운 놈들!"

이제는 맨눈으로도 확실히 그들이 끌고 나온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성위의 사람들이 몬스터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다. 그런 성벽 위의 반응이 느껴졌는지, 몬스터들이 우리를 비웃는게 느껴진다.

몬스터들이 우리에게 자랑하려느 듯이 끌고 나온 것은... 여자들이었다.

"저 여자들... 레인저 부대 아냐?"

"옆에 있는 여자들은 '흰부엉이'인것 같은데? 유명한 모험가들이 왜 최근에 안보이나 했더니..."

"저 붉은 머리는 설마 마리는 아니겠지?"

브라델의 모험가들에게 익숙한 자들도 있는지 성벽 위가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끌고 나온 여자들은 단순히 몇명의 수준이 아니라, 30~40명은 될 정도로 꽤 많은 규모였다.

몇몇 인지도 있는 사람들에 대해 떠드는 모습을 보다가 몬스터들이 어떻게 수십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포획했는지 조금 고민하게 된다. 브라델의 모험가들이 저렇게나 많이 사라졌다면 분명 영지에서도 눈치챘을텐데.

"아."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이미 겪었다는 걸 깨닫는다.

성벽 위에서도 유명한 몇명에 대해서 지목하지만, 대부분은 아는 이들이 드물었다. 유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신경쓰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마을에 길드를 드나들면 조금 안면이라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들의 대부분은 초면일거다.

왜냐면 저기 잡혀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 브라델로 소환되고 나서 바로 습격을 당했을테니까.

나와 유나가 그러했듯이.

"..."

소환직후의 우리를 습격했던 다부르는 마왕, 크롤드 록을 위해서 일한다고 자백했다. 다부르는 우리를 습격했듯, 막 소환된 자들을 습격해서 마왕에게 바쳤을거다.

그러니 내가 첫번째 카드를 찢고 회귀하지 않았다면, 유나도 저기 묶여서 나온 여자들 중 하나가 되어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마왕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주먹을 꽉 쥔다. 힘만 있었다면, 당장 뛰쳐나가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고 싶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움직임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보라는 듯이, 그들의 가장 앞에 지금까지 붙잡은 여자들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우리에게 보라는 듯이, 몬스터답게 여자들을 범하기 시작한다.

"으, 으아... 앗..."

"싫... 싫어! 아아...!"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브라델의 성벽에 닿을락 말락한다. 이미 전신에 능욕의 흔적이 가득한 여자들의 힘없는 신음소리가 히드라의 폭격보다 크게 브라델의 성벽을 울린다.

"저 놈들이..!"

"내려가서 죽여버려!"

유치한 마왕의 도발이다. 하지만 효과적이다.

분노한 브라델의 목소리가 성벽위에서 울린다. 가장 앞자리에서 그 참사를 목격하는 레아의 주먹도 작게 떨린다.

정면을 주시하며 표정을 숨기며 화를 참던 레아가 고개를 두어번 젓고 몸을 돌린다.

"화가 나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군. 밤은 몬스터들의 시간이지. 지금 당장 뛰쳐나가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닐걸세. 그러니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내일 아침 마왕을 잡을걸세."

영주의 말에 조금 성벽 위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들을 구해오는 걸 기대했을까. 하지만 일부는 레아의 말에 납득한 것 같기도 하다. 레아는 함부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이른뒤 다시 관저로 발걸음을 돌렸다.

여전히 성 밖에서는 여자들의 신음소리가 간신히 들려오고 있었다.

다시 관저의 집무실로 도착한 레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방의 가운데에 있는 책상에 소리를 내며 푹 주저앉는다.

마왕이 수를 걸어왔다. 그것도 이전과 똑같이. 하지만 이번엔 붙잡은 여자들을 보이는 곳에서 범하면서 브라델에 정면으로 도발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다.

"우선은 에릭, 자네의 이야기부터 하도록 하지."

하지만 영주는 에릭의 순서를 우선했다.

"어제 아침, 브라델 병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병대가 사라졌다네. 하지만 에릭 자네는 마치 내가 일부러 보병을 숨겨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군."

"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에릭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어제 해도 뜨기전 새벽에 보병대에 있는 후배 녀석이 저한테 찾아와서 묻더군요. 이 새벽에 영주님으로부터 최대한 조용히 소집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혹시 아는게 없냐고 저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내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레아에게 에릭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최대한 비밀을 지키고 무장을 최소한으로 해도 상관없으니 조용히 모이라고 명령을 받았답니다. 그 녀석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전날에도 이른 아침에 고블린 둥지를 소탕하러 모였으니 이번에도 그런게 아닐까 추측하더군요. 저야 해임당했으니 아는게 없다고 했죠."

"그래서 에릭 자네는 내가 보병대를 따로 다른 작전에 동원했다고 생각한거군."

영주의 명령을 받고 말도 안되는 시간에 최대한 조용하게, 그리고 긴급하게 사라졌다. 에릭의 입장에서는 마왕과 싸우는데 보병대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게 이상할법도 하다.

레아는 다시 크게 눈에 보이게 한숨을 내쉰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네. 고블린을 소탕하느라 피곤해서 아침 늦게까지 침실에 있었지. 아마... 이것도 마왕의 수작이었겠지."

영주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한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보병대가 사라지고나서 브라델의 신전과 성벽에 공격당했다네. 최소한 보병이 위조된 나의 명령을 받고 사라진데에 마왕의 수작이 있었다는걸 부정할 수는 없겠지."

물증은 없는 심증으로 범인을 지목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이상의 이야기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건 브라델에 그 병사들이 필요하다는 걸세. 긴급하게 모인 민병대들이 활약해주고 있지만, 부대로서의 힘을 발휘하려면 사라진 그 보병들이 필요하다네."

레아는 그리 말하고 브라델과 주변을 그려놓은 지도를 책상위에 펼쳐놓는다.

"브라델이 공격당했다는 걸 알자마자 서쪽의 류스테드와 북쪽의 로자란으로 지원군을 요청하는 레인저들을 보냈네. 엘로트 부대장과 에실은 내가 가장 총애하는 레인저들이지. 만약 그들이 길을따라 이동하다가 우리 보병대를 만났다면 분명 그들을 되돌려 보냈을걸세."

영주의 양 손이 각각 양쪽 영지로 향하는 길을 따라 움직인다.

"다른이들의 눈이 닿지 않는 새벽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말을 타고 이동하는 레인저들의 속도보다 빠를 수가 없을걸세. 길 위에 있는 보병들과 만났다면 하루가 지났는데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러니 아마 보병들은 다른 영지로 가는 길 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걸세. 혹시 그들이 어디 있을지 떠오르는 장소는 없는가?"

"...있습니다."

레아의 질문을 받은 노인이 조금 고민하다가 그녀가 펼쳐놓은 지도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브라델에서는 훈련과 주기적인 몬스터 토벌을 위해 성 근처 여기저기에 막사를 지어놨습니다.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면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도 있고, 조금 먼곳도 있지만 인적이 드물고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면 아마 여기일겁니다."

에릭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손 끝에는 브라델의 서쪽에 있는 숲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로가 없고,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곳이죠. 규모도 꽤 큰곳이라서 병사들을 숨겨야 했다면 여기일겁니다."

"그렇군. 바로 사람을 보내야겠어."

영주가 즉시 사람을 불러 에릭이 말한 위치로 기병 몇명을 보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어두운 숲을 가로질러야 하지만 긴급한 상황이었다. 브라델과 비교적 가까운 숲이고, 기마병으로 이동하기엔 썩 멀지않은 거리니 충분히 레아의 복귀명령이 닿을 거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해야겠군."

레아가 팬을 꺼내 지도의 남쪽에 크게 X자 표시를 한다.

"또 히드라가 나타나서 우리의 남쪽 성벽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사로잡은 모험가들을 앞세워 우리를 도발하는군."

영주가 짧게 상황을 브리핑하자 방 안에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고생해서 잡은 히드라가 또 있었다니..."

퓰브르가 내뱉은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적진을 정면으로 순식간에 돌파해서 히드라를 때려눕혔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장 히드라 공략의 핵심이었던 레아, 퓰브르, 퍔필리아 모두 그 짧은 전투가 끝난 후 상당한 피곤을 호소했고, 조금이라도 우리의 돌파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함께한 기병이나 레인저들의 피해가 꽤 컸을거다.

특히 선두에서 기마대를 지휘하고, 마왕과 몇합을 겨루었던 레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잘것처럼 피곤한 기색이다. 저런 얼굴로 신전에서 뒷처리를 하고, 회의를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속으로 작게 영주에 대해서 감탄을 하고 있는데 레아가 문득 떠올른 사실을 내뱉는다.

"아, 아마 히드라는 저게 끝일걸세. 마왕이 저 커다란 녀석을 들고올 재주가 없다면, 동쪽의 대습지에서 데려왔을테니 더 이상의 히드라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네."

"?"

너무나 간단하게 더 이상의 히드라가 없다고 단언하는 영주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레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한다.

"영주로서 당연히 주변의 거대한 위험요소는 파악해둬야 하지 않겠나? 동쪽의 대습지 정도면 히드라가 살고있을거라 생각해 예전에 몇번 다니면서 정찰해뒀지.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울정도로 먼곳이라면 모를까, 마왕이 브라델로 동원할 수 있는 거리의 히드라는 세마리었다네."

그렇구나. 그럼 이제 하나 남은 히드라에만 집중하면 되겠구나.

...라고 넘기기에는 그녀의 말에 작은 모순이 있었다.

"세마리...었다고요?"

퍔필리아가 영주의 말을 되뇌이며 손가락을 꼽는다. 오늘 잡은 녀석 하나, 그리고 저기 남쪽에서 브레스를 쏘고있는 히드라 하나. 그럼 남은 하나는...?

"내가 이미 잡았다네. 거리가 좀 있긴했어도, 위험한 몬스터라서 미리 처분해두고 싶었는데 혼자서 잡아보니 꽤 위험하더군. 그래서 나머지는 그냥 방관하게 되었다네. 그러니 이제 남은 히드라는 없다고 생각하고 떠오르는 작전을 말해주게나."

담담하게 영주가 말한 내용에 다들 소리없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혼자서도 저 히드라를 잡을 정도의 수준이니, 마왕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다. 더 이상의 히드라는 없다.

조금 떨떠름한 분위기에, 고집스런 인상의 노인이 먼저 입을 연다.

"아침이 되면 즉각 병사를 모아 저놈들을 징벌합시다!"

에릭이 예의 고집스런 목소리로 울분을 토한다.

"사랑하는 브라델의 앞에서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있는 저런 꼴을 언제까지 두고볼수 없습니다! 브라델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우면 이번에도 승리할겁니다! 게다가 이번엔 저도 있고요!"

에릭이 주먹을 쥐며 외친다. 나는 그의 열정적인 모습을 뒤에서 보며 조용히 팔짱을 낀다.

레아도 나처럼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에릭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무표정으로 항전을 주장하는 에릭을 바라보던 레아가 천천히 입을 연다.

"...저 녀석들이 이렇게 나온 이상 성밖으로 나가 싸우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긴 하지. 비슷한 방식에 대해서도 이미 성과도 냈으니 거리낄 것은 없겠군."

레아의 손가락이 X로 표시된 곳을 가리킨다.

"그럼 오늘 성과를 냈던 작전과 비슷하게 가도록 하지. 하지만 영웅들이 많이 상했고, 더 이상의 히드라는 없을테니 이번엔 성벽 위에만 있었던 용사들도 대부분 동원해서 전면전을 펼치도록 하겠네. 이건 병사들을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에릭이 맡아주게. 혹시라도 내일 아침까지 보병들이 브라델로 돌아오면 그들도 함께 지휘하도록."

영주의 말에 에릭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퓰브르와 퍔필리아도 오늘처럼 레인저와 기병대들과 함께 별동대가 되어 히드라를 타격해주게. 적들도 바보가 아니니 정면으로 뚫는건 조금 까다로울걸세. 이번엔 진형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적의 중앙을 뚫어보도록 하지."

마왕은 똑같이 히드라를 후방에 세우고, 사로잡은 여성들을 욕보이면서 우리를 도발하고 있었다.

우리의 전력은 크게 떨어진 게 없었고, 이번엔 영웅뿐 아니라 성벽 위에 있던 용사들도 몬스터들과 전면전을 펼칠 준비를 한다.

그러니 레아의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방안의 사람들은 제각각 결의에 찬 표정으로, 또는 후련한 표정으로 방을 나선다.

하지만 나는 모두가 방을 나서길 기다렸다.

그리고 나와 유나만이 남자, 나는 책상에 앉아있는 레아를 향해 다가간다.

내가 입을 먼저 열기도 전에 레아가 먼저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자네도 이상한걸 느꼈지. 안그런가?"

나는 레아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