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유치하고 진부한 클리셰 #2
* * *
“이번엔 누구랑 싸웠니?”
아리따운 양호선생님의 물음.
그녀의 가운 안으로 거대한 젖통이 보인다.
셔츠가 팽팽해질 정도로 크다. 파이즈리 마렵네.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당과 싸웠습니다.”
“하나도 재미없어. 교수님한테 말씀드리기 전에 똑바로 얘기해.”
“하나자와한테 물어보세요.”
“하나자와가 알아? 네가 누구랑 싸웠는지?”
“네. 직접 봤어요.”
“이상하네... 하나자와라면 네가 누군가를 때리려는 순간 교수님께 얘기하러 달려갔을 텐데. 왜 소식이 없지?”
“걔가 가만히 있었다는 게 제가 나쁜 놈이랑 싸웠다는 증거 아닐까요? 여기도 보세요. 저한테 맞은 애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쳐줄게.”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이미지가 너무 구리다.
이러다 퇴학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마츠다 켄 이 새끼... 적어도 교수진한테는 까불지 말지.
모두가 싫어하는 나지만 양호선생은 사명감이 있었는지, 내 오른손을 아주 정성스레 치료해주었다.
두껍게 둘러진 붕대를 보며 손목을 돌려보던 나는, 이어지는 양호선생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술이나 담배라도 하면 아무는 시기가 늦어지는 거 알지? 웬만하면 하지 마.”
“안 해요.”
“아카데미 밖에서도 하지 말라는 뜻이야. 저번에 길에서 봤어. 네 친구들이랑 네가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담배도 피우고 있던 거. 밖에선 교칙이 적용되지 않지만...”
“상처가 빨리 낫고 싶으면 자제하라 이거죠?”
“맞아.”
“고맙습니다.”
“....? 방금 고맙다고 한 거야?”
눈을 크게 뜬 채로 놀란 기색을 보이는 양호선생.
히죽 웃은 나는 말없이 한손을 들어 올리며 양호실을 나섰다.
상황은 일단 잘 끝났다고 할 수 있지만... 뒤처리가 남았다.
테츠야가 이 이벤트를 겪었을 땐, 아카데미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
치한이 나름 순순히 물러나기도 했거니와, 테츠야의 이미지가 아카데미에서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닐 것이다.
놈의 얼굴을 아주 피떡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아마 치한이 어떻게든 날 해코지하려고 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거닐던 나는,
“마츠다 군!”
뒤에서 미유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입꼬리를 올렸다.
몸을 돌린 내가 물었다.
“뭐냐 또?”
“주, 주임님께서 마츠다 군을 교무실로 데려오라고 하셨어... 그 치한이 마츠다 군을 고소했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표정을 지은 내가 말했다.
“그냥 놔둬.”
“뭐...? 미쳤어? 너 지금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몰라...? 아, 아무튼 빨리 가자.”
내 옷가지를 잡아당기며 낑낑거리는 미유키.
손목이라도 잡아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나는, 싫어하는 티를 역력하게 내며 미유키와 함께 교무실로 향했다.
**
“그 사람은 치한이었어요... 제 허벅지를 만진 파렴치한 사람인데... 마츠다 군이 도와준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미유키가 옆에서 열심히 날 변호하고 있다.
아아... 이래서 이 이벤트는 놓치기 싫었다는 말이지.
어제 일찍 자길 잘했다.
묵묵히 미유키의 말을 듣던, 안경을 콧등에 걸친 60대의 교수가 인자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경찰에 인계하고 보니 전과가 많은 사람이더구나. 치한 신고로 잡혀갔던 적이 여러 번이야. 고소는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그에 안도한 미유키가 한시름 덜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마츠다 군이 징계를 받아야하죠...?”
“사람을 때려도 너무 심하게 때려서 그렇단다. 이빨이 다섯 개나 나갔어. 익명의 누군가가 당시 상황을 말해줬는데... 너도 마츠다 군을 말렸다지? 과도한 폭력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니?”
“....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치한을 당한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니? 아마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겠지. 우리 예보니에 이런 학생이 있어서 무섭다고 하더구나.”
“마, 말도 안 돼...! 학교 이미지를 챙기자고 마츠다 군에게 징계를 내리겠다는 건가요?”
계속해서 따지려 드는 미유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막아선 내가 교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하면 되는데요?”
“보름간 1학년 복도 남자화장실 청소. 매번 사고만 일으키는 너한테 청소 징계면 감지덕지지? 본의는 아니었지만 경찰이 찾던 범죄자를 잡아냈고, 같은 아카데미 학생인 하나자와 양을 구하기도 했으니 이 정도로 끝내는 줄 알거라.”
보름 뒤엔 방학인데?
그때까지 똥내를 맡으면서 변기를 청소하긴 싫은데... 어쩔 수 없지.
교수의 말마따나 이 정도면 무척 싸게 먹힌 것이기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재차 물었다.
“고소 건은 확실히 처리된 건가요?”
“장담하마.”
“그럼 됐어요.”
“다만 경고하겠는데, 징계를 빼먹거나 징계 도중 결석이라도 하면 아웃이다. 아무리 선의로 한 행동이었다지만... 폭력이 너무 과했어. 너는 지금 아주 위험해. 지금 아카데미에서 네 입지가 어떤지 알지?”
“대충은요. 전 갑니다. 수고들 하십쇼.”
어깨를 으쓱인 나는 교무실에서 나갔다.
그러자 곧바로 뒤따라온 미유키가 날 불렀다.
“마츠다 군! 잠깐 멈춰봐!”
“소리 좀 그만 지르면 안 되냐? 떽떽거리니까 귀가 아프잖아.”
그 말에 울컥한 미유키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내게 불만이라도 내뱉으려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그만두고는 심호흡을 했다.
평정심을 되찾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성공한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너 아웃이라는 말 몰라? 결석 한 번이라도 하면 퇴학이라는 뜻이라구.”
“알아.”
“그런데 왜 하겠다고 한 거야? 다른 동급생들한테 시키려고?”
테츠야한테 하라고 시키면 재미있기는 하겠네.
“너 지금 내가 무조건 결석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 응. 자주 그랬으니까.”
“허... 사실이니까 봐준다. 근데...”
말끝을 흐린 내가 능구렁이 같은 눈으로 미유키를 훑어보자, 그녀가 반 걸음정도 뒤로 물러났다.
“무, 뭐야? 그 눈빛은? 징그럽게...”
“내가 나가면 네가 엄청 좋아하겠지? 물개박수까지 치면서 기뻐하는 널 보긴 싫은데...”
“.... 누가 기뻐한다고 그래...”
“아니야? 너 나 못 내보내서 안달이었잖아.”
“아, 안달까지 한 적은 없는데... 괜히 멋대로 넘겨짚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나가는 걸 원하기는 했다는 뜻이네?”
“.... 소,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었는데...”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주면 어디 덧나나? 서운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너무 억울한 상황이잖아... 그러니까 보름간은 학교 좀 꼬박꼬박 나와... 지각도 하지 말고... 그러면 교수님들이 널 좋게 봐주실 수도 있어... 너도 아카데미는 졸업하고 싶잖아.”
“내가? 그래 보여?”
“마츠다 군, 사람이 이렇게 걱정해주면 능글맞게 굴지 말고 알아듣는 척이라도 좀 해.”
갑작스레 정색을 하는 미유키.
지금은 살짝 물러나자.
잠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는, 미유키의 기세에 눌린 척 대답했다.
“알았어.”
계속 청개구리 짓만 하다가 이제야 말을 들은 내게 놀랐을까?
미유키의 큼지막한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정말?”
“어.”
“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빈말 아니지?”
애초에 결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다.
“아냐. 꾸준히 나올게. 이제 됐지?”
“.... 사족을 붙이는 게 의심스러운데... 그래도... 믿어볼게.”
저 말 한 마디가 어찌나 힘이 되는지 넌 알까?
전력을 다해 테츠야에게서 널 빼앗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져.
보름간 꾸준히 똥통만 치우자.
미유키가 나를 보며 ‘어쩌면 갱생이 가능할지도...?’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장 교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누가 봐도 도망갈 것처럼 미유키를 한 번 쓰윽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남자화장실에 들른 나는, 거기서 노가리를 까고 있는 아카데미 동급생들을 향해 낮게 가라앉은 투로 말했다.
“다 꺼져. 청소해야하니까 옆 칸에서 노닥거리든지.”
“미, 미안... 금방 갈... 응...? 청소?”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쫑긋하는 놈들.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을 지은 나는 청소 창고함에서 호스를 들고 왔다.
“오늘부터 여기 변기 막혀있으면, 니네들 찾아서 반으로 갈라 죽인다.”
“.....”
“농담 같으면 한 번 해보든가.”
“우, 우리가 하지 않은 거면...?”
“그래도 죽인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애들보고 깨끗하게 쓰라고 해. 화장실은 깔끔하게 써야 돼. 그래야 다음 사람도 찝찝함이 없거든. 너네 손은 씻었냐?”
“.... 어...? 응...? 뭐라고...?”
“그냥 꺼져 빨리.”
“아, 응...”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들을 보낸 나는, 수전에 호스를 끼우고 소변기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후 대걸레를 들고 화장실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는데,
“.... 잘하고 있네?”
뒤에서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고 있었어, 미유키. 올 줄 알았다구.
이래서 내가 교실을 나가기 전에 그런 행동을 한 거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내가 말했다.
“감시하러 왔냐?”
“그냥 뭐... 도망갈 것처럼 하길래...”
“난 약속한 건 지켜.”
“.... 그럼 다행이구... 근데 마츠다 군, 걸레질은 마지막에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건가?”
“보통은 그렇지?”
“그럼 뭐... 변기부터 청소하면 되나?”
“응.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
미유키의 조언을 받아들인 나는 뚫어뻥을 가지고 왔다.
“근데 여기 남자화장실인 거 알지?”
“알아. 사람도 없잖아.”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라.”
“일단 오늘은 마츠다 군을 지켜보려고 해. 꼼꼼히 하나 안 하나 봐야겠어.”
“미우라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원래 같이 돌아가지 않나?”
“보통은 그러는데... 반장으로서 체크도 할 겸... 그리고 오늘은 너한테 은혜도 입었으니까...”
“고마워서? 그러면 대신 청소해.”
미유키는 팔짱을 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백한 거절.
피식 실소를 터뜨린 나는, 화장실 가장 구석 칸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 가운데에 자리해선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는 개 같은 오물을 보고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아 씨발!!”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물은 대체 왜 안 내리는 거야? 좆같은 새끼들...
이 새낀 찾아서 진짜 죽인다.
간신히 손잡이를 아래로 내린 나는 오만상을 다 쓰며 밖으로 나왔다.
“더러운 새끼들...”
그리고 미유키는, 이러는 내가 웃겼는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자그맣게 킥킥거렸다.
몸을 돌린 채로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야 오늘 안에 끝낼 수 있겠어?”
“네가 직접 봐봐. 그 말이 나오나.”
“난 싫어. 그리고 사람한테 새... 흐흠...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푸짐하게 싼 그 새끼가 너무한 거지... 하... 씨발... 거지같네.”
“욕 좀 줄여. 사람이 저렴해 보여.”
응. 나중에 다시 말해주면 고치려고 노력할게.
귓구멍을 파는 시늉을 한 나는, 휴지를 뜯어 코를 막은 채로 다음 칸에 들어갔다.
굳게 닫혀있는 변기 커버. 뭔가 불안해진다.
이걸 보름동안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앞길이 깜깜하다.
그래도 오늘은 미유키가 있으니까... 불만은 그만하고 열심히 해야겠다.
테츠야에게서 미유키를 구원해주기 위해서라도 좋은 이미지를 쌓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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