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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5화 (5/313)

〈 5화 〉 마츠다 군, 변했네.

* * *

내가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지 이틀이 지났다.

미유키가 날 감시한 건 그날 하루가 끝이었다.

호감도를 특대로 얻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주 꼼꼼하게 화장실을 청소했다.

미유키가 봐주지 않는다고는 해도, 3자의 입을 통해 요즘 화장실이 깨끗하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니까.

교실에선 계속 껄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수업시간만큼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교수의 진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참아내며 수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자, 이 문제는 누가... 흐음...”

칠판에 동그라미와 알파벳을 그린 중년 교수가 말끝을 흐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나는 찔끔했다.

내게 풀어보라고 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인데...

“마츠다 군, 한 번 풀어볼래?”

예상대로, 교수가 날 지목했다.

곧바로 날 향해 쏠리는 시선.

미유키의 호기심 어린 눈이 돋보인다.

멋지게 풀어서 박수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칠판에 그려진 저게 대체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무리 공부를 못한다고는 하지만, 이놈에게 빙의되기 전까지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앞으로 미유키에게 공부를 배워야하는데, 눈앞이 깜깜하다.

머리를 벅벅 긁은 내가 삐딱한 투로 말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 그래...? 알았다. 미유키 양, 대신 나와서 칠판에 풀어보렴.”

미유키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능숙하게 분필을 휘갈기며 멋들어진 필체를 선보이는 그녀.

뭔가 멋있어 보인다.

슬쩍 테츠야를 보니 눈깔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 문제를 푸는 미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줌의 용기도 없어서 고백마저도 거절한 놈이 뭔...

너는 미유키를 그렇게 쳐다볼 자격이 없단다.

수업이 끝난 후 쉬는 시간.

책상에 팔을 기대어 휴식을 취하려던 나는, 미유키가 다소 호의적인 걸음걸이로 다가오자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왜 또.”

“마츠다 군.”

“뭐.”

“모르겠으면 풀어보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교수님께 여쭤보든지 해야 해. 그래야 발전할 수 있는 거야.”

그녀의 조언을 무시한 나는 테츠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우라. 너희 엄마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데,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

장난스러운 태도에 테츠야가 허둥지둥하더니, 미유키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엄마라니... 미유키는...”

“농담이야 새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마츠다 군.”

엄한 말투로 대화를 끊어버리는 미유키.

나는 다소 과장스럽게 양손을 들었다.

“아 알았어. 무서워서 장난도 못 치겠네.”

“그건 장난이 아니라 괴롭히는 거야.”

“괴롭히는 거라고? 야, 미우라. 내가 너 괴롭혔냐?”

인상을 팍 쓴 채로 테츠야를 향해 말을 하니, 미유키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런 식으로 협박하듯이 말하면 누가 사실대로 말하겠어?”

“아니, 내 말투가 원래 이런데 뭘 어쩌라고?”

“상냥하게 할 수 있잖아. 노력이라도 해봐.”

“아주 착한 우리 미우라 군, 내가 혹시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니? 아니야? 다행이네. 그럼 오늘 수업 끝나고 화장실 청소 좀 대신 해줄 수 있어?”

“마츠다 군.”

치한 사건 이후 미유키의 태도가 많이 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성을 부른다는 것이 그 사실이다.

마치 훈육을 하려는 누나처럼, 엄마처럼 말이다.

테츠야에게서 관심을 끊은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 넌 무슨 시어머니냐? 왜 이렇게 사사건건 참견이야?”

“마츠다 군이 참견하게 만들잖아.”

“한 마디도 지질 않네... 야, 그냥 가라. 네 강아지랑 매점이라도 가.”

“강아지?”

“네 뒤에 있는 미우라.”

“하아... 여기서 더 얘기했다간 내가 화날 것 같아서 그만둘게. 오늘 화장실 청소도 잘할 거지?”

암, 그래야지.

“잘한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하긴 할 거다.”

“손은 괜찮아?”

“그럭저럭.”

“물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그리 말한 미유키는 테츠야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매점이라도 가려는 모양이었다.

저 저 씨발놈... 나도 미유키랑 매점 가고 싶은데 그녀를 독점하다니.

보면 볼수록 주먹이 운다.

**

모든 미연시엔 다양한 호감도 이벤트가 있다.

그 중에선 며칠 전에 내가 해결했던 지하철 치한 같은 중요한 것도 있고,

호감도가 적게 오르거나, 오르지는 않지만 서비스 신을 보여주는 이벤트도 있다.

지금 나는 그 서비스 신을 보여주는 이벤트 현장에 와있었다.

본래라면 서비스 신 외엔 아무것도 없는, 호감도가 전혀 오르지 않는 이벤트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왜? 나는 미유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까.

미유키는 소꿉친구형 첫사랑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이다.

정말 참하고, 마음씨가 아주 따뜻하다.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여자이기도 하다.

내가 왜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느냐?

그건 바로 현재 미유키가 있는 곳 근처에 거지 하나가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거지는 다리가 한 쪽 없어서, 배를 올려놓을 수 있는 사각형 대차를 타고 움직이며 구걸을 하는 사람이었다.

강짜를 부리며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괴팍한 성격에,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은 뒤 자신을 업고 신호등을 건너지 않으면 때릴 거라고 하는 미친놈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이 지역에서 유명하기까지 했다.

몇몇 게임을 하다보면 왜 이런 NPC가 나오잖은가.

플레이를 하다가 힘에 부칠 때, 양심을 조금만 팔면 숨통을 크게 트이도록 해주는 NPC.

도키아카에서는 이 거지가 바로 그런 쪽이었다.

냄새나는 양말 한 짝을 주면 자신이 구걸해서 받은 돈 일부를 넘겨주는.

‘테츠야로 플레이할 땐 이놈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었지.’

이제부터 나는 이 거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착한 척.

이 거지에게 나름 상냥하게 대해주면서, 미유키가 그 장면을 보도록 할 거다.

모든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해놓은 나는 거지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행인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놈이 보인다.

혹시 이놈에게 지금 신고 있는 양말을 주면 어떻게 될까?

게임에서처럼 돈을 주려나?

그런 고민을 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츠다 켄은 돈이 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이 거지에게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미유키의 날 향한 호감도가 끝이다.

“이봐! 이봐!”

자신을 무시하는 행인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거지.

나는 길을 지나가는 척 그의 코앞을 지나쳤다.

그러자,

“이봐! 거기!”

예상대로, 거지가 큼지막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고개를 반쯤 돌려 그를 내려본 내가 대답했다.

“왜.”

다짜고짜 튀어나온 반말에 어이가 없어진 듯, 거지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잠깐 멍하니 날 올려다보던 그가 때 묻은 자신의 입가를 쭈욱 내렸다.

“이런 싸가지 밥 말아먹은 놈을 보았나...! 너 몇 살이나 처먹었어! 엉!?”

“스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내가 너보다 세 배하고도 반은 더 살았다 이놈아! 가정교육도 못 받아쳐먹은 놈...! 세상이 어찌 될런지...!”

노발대발하는 모습이 내가 아는 거지 그대로다.

“웃어른을 공경하지 못한 죄를 묻겠다! 네놈은 지금 당장 날 업고 횡단보도를 건너도록 해라!”

“그래?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명령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거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으응...? 그러냐?”

“응. 그럼 업는다?”

“으으응...? 그, 그래... 얼른 해라. 내 자가용도 좀 챙기고.”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양팔을 벌리는 거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후 그를 들춰 업은 뒤, 낡아빠진 대차를 한손에 들었다.

풍겨오는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화장실 청소에 이놈 냄새에... 이러다 코가 둔해질 지경이다.

“흠흠... 내 너를 오해했나보구나. 말버릇은 험하지만 심성은 착한 놈이었군. 등짝도 넓어서 잠을 자기에도 편하겠어. 잠깐 눈을 좀 붙일 테니, 저어어어기 횡단보도를 건너면 말하거라.”

멀찍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거지.

쯧쯧 혀를 찬 나는 그곳으로 가는 척을 하다가, 어깨에서부터 거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걸음을 돌렸다.

이후 미유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한산한 거리.

유동인구가 굉장히 적은 그곳의 자그마한 휴대폰 액세서리 매장 근처로 간 나는, 매장의 투명한 유리 안으로 보이는 미유키를 발견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키링을 고르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물건을 보는 미유키의 치마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보기 좋은 허벅지 사이로 새하얀 팬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팽팽하게 당겨진 팬티 덕에 도톰한 굴곡이 전부 보인다.

찌르면 쑥 들어가다가, 탄력에 의해 튕겨져 나갈 것 같은 느낌.

이걸 실제로 보니 하반신에 피가 확 몰린다.

테츠야 이 새끼도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불쌍한 것.

기존 이벤트와 달리, 넌 미유키의 저 모습을 보지 못할 거다.

왜냐고? 이제부터 소란이 일어날 테니까.

“할아범. 다 왔어.”

대차를 내려놓고 상체를 팔딱팔딱 움직여 거지를 깨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거지가 머리를 빡! 소리가 나도록 때리자 소리를 질렀다.

“아 씨발! 왜 때리고 지랄이야!”

“이노옴! 내가 언제 이곳에 데려다달라고 했느냐! 그냥 횡단보도만 건너랬지!”

응. 그랬지.

“뭐라는 거야? 분명히 조용한 거리로 데려다달랬잖아!”

“요즘 젊은 놈들은 말귀까지 어둡나...? 영 쓸모가 없어요... 에잉... 쯔쯔... 사람도 없는 여기서 구걸을 어떻게 하느냐? 네놈 때문에 오늘 수익이 반토막 났으니 책임져라!”

“그걸 내가 왜 책임져!? 애초에 웅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하든가! 일단 내려!”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자, 얼마 없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문을 연 채로 장사를 하고 있던 휴대폰 매장 또한 마찬가지.

안에 있던 손님들이 거지와 다투는 날 쳐다보았다.

물론 미유키도 포함이었다.

신경질적이면서도 조심스럽게 거지를 내려놓은 나는, 대차 위에 그를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귀찮은 파리를 치우는 양 손을 휘휘 저었다.

“난 할 일 다 했으니까 이제 사라져.”

“사, 사라져...? 이노오오옴!! 네놈은 장유유서도 모르느냐!?”

“할아범이야말로 너무한 거 아니냐? 힘들게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왜 화를 내지?”

“그거야 네가 내 말을 제대로 듣질 않았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느냐!”

“아이 씨... 존나게 질척거리네. 이게 필요한 거지? 먹고 떨어져.”

지갑에서 천 엔짜리 지폐를 꺼내 내밀자, 으악을 질러대던 거지의 입이 꾹 다물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푼 거지는 내민 지폐를 확 낚아채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져갔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대차를 드르럭 끄는 모습을 보자니, 내가 계획한 일이긴 해도 약간 빡이 친다.

그를 지켜보며 한숨을 푹 내쉰 내가 중얼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마츠다 군.”

날 부르는 미유키의 아리따운 목소리.

나는 놀란 낯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하나자와잖아? 뭐냐? 네가 왜 여기 있어? 공부 안 하냐?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잠깐 머리 식히러 나온 거야. 그러는 너는 뭐해?”

“넌 몰라도 돼.”

맥 빠진 투로 대충 얼버무리자, 미유키의 눈가가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

“사실 이야기 다 들었어. 저분이 장난을 친 거지? 개구쟁이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분인데, 마츠다 군은 몰랐나보네?”

“거지새끼한테 저분은 무슨...”

“마츠다 군. 저분은 너보다 한참 웃어른이시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아까도 저분한테 욕했지? 보기 정말 안 좋았어.”

“하... 시어머니 납셨네.”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마츠다 군의 진심을 알려고 하지 않을 거야. 지금도 봐. 저분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모자라 돈까지 줬는데 마츠다 군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하잖아.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편견을 가져버린 거야.”

주위를 둘러보니, 미유키의 말마따나 몇몇 사람들이 날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둑해진 시간에 소란을 피워대니 싫었던 모양.

무안한 척 머리를 벅벅 긁은 내가 말했다.

“관심 없어.”

“정말 관심이 없었다면 주변을 살피면서까지 사람들의 눈치를 보려고 하지 않았겠지. 아니야?”

“....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앞으로 욕 좀 줄이도록 노력해. 화부터 내는 버릇도 고치고.”

다시 말해줬구나? 알았어.

이제부터 슬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볼게.

겉으로는 틱틱대면서 네 말을 듣기 싫어할 거야.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줄게.

그러니까 점점 변해가는 날 보면서, 내가 네 조언을 가슴속에 품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해.

그렇게 날 교화시키는데 재미를 붙여줘.

“아까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참견하지 못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병이라도 있냐? 오지랖 넓어서 좋겠다?”

“마츠다 군.”

예의 그 엄한 투로 날 부르는 미유키.

잠깐 흔들리는 척 침묵한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등졌다.

“.... 나 간다. 냄새나서 빨리 샤워나 할란다. 별 이상한 놈을 다 만나가지고... 일진 한 번 사납네... 젠장...”

나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투덜거리며 미유키를 지나쳤다.

물론 그 투덜거림 안에 욕설은 일절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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