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마츠다 군, 변했네. #2
* * *
혼자 있으려니 약간 덥다.
매미들이 꽥꽥대니 짜증마저도 난다.
미유키도 없어서 무료하기까지 하다.
친구들이 연락을 해오긴 하지만, 호감도를 쌓아야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엔 아깝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아카데미로 가자.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다 보면 미유키가 올 수도 있다.
그녀는 가끔 아카데미에 들러 잊어버린 물건을 챙기고는 하니까.
솔직히 도박이긴 한데, 그럴 가치가 있다.
나는 미연시로 따지면 열심히 내실을 다져야할 극초반을 플레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히로인을 마주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야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옷을 갈아입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아침 대중교통을 타니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주중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정문부터 고요하다.
“무슨 일... 으응? 마츠다 군 아니야? 기다려.”
40대로 보이는 경비원이 정문을 통과하려는 날 제지했다.
내가 하도 사고를 많이 쳐대서 그런가? 바로바로 알아보네.
창문을 연 채 미심쩍은 눈빛을 하고 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내가 말했다.
“화장실 청소하러 왔어요.”
“화장실... 청소...?”
“징계요.”
“징계? 아... 그거...? 치한 사건?”
“예.”
“주말에도 하라던?”
“매일 하라고 했고, 하루라도 빼먹으면 퇴학이라고 했으니까 주말에도 하라는 게 맞겠죠.”
“그러냐...? 일단 방명록에 이름부터 써라.”
경비원 사무실로 간 나는, 펜을 집어 들고 이름을 쓰면서 방명록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방문객이 거의 없다.
미유키는...
‘있다.’
내 이름을 쓸 공간 바로 위에, 예쁜 글씨체로 하나자와 미유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운이 아주 좋은 날이다.
초반부라 초보 버프라도 받은 건가?
삐뚤삐뚤하게 이름을 적은 나는 곧바로 경비실을 튀어나오려다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경비원에게 지나가는 듯한 투로 말했다.
“수고하세요.”
“그래. 너도 수... 어엉?”
내가 인사하는 거 처음 보십니까? 그렇겠네요.
놀란 경비원을 뒤로하고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간 나는 곧장 1학년 복도로 향했다.
미유키는 지금 교실에 있겠지? 찾아보고 싶지만 일부러 그러는 건 미친 짓이다.
카메라에 다 찍혀서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내겐 다행스럽게도, 1A반은 계단 바로 옆에 있었다.
끝에서부터 청소를 하는 건 사람의 자연스러운 심리.
여기서 시끄럽게 청소를 하다 보면 미유키는 날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청소도구함에서 호스를 챙긴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능숙해진 솜씨로 소변기를 닦고, 어제 청소했었던 변기에 다시 한 번 물을 뿌리고 하다 보니,
“마츠다 군?”
의문이 가득한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미유키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몸을 돌렸다.
미유키는 무지 청바지와 흰 티만 입고 있었다.
간단한 코디. 그럼에도 빛이 난다.
애써 속내를 숨긴 나는 목소리 톤을 약간 높였다.
“하나자와잖아? 너 여기서 뭐하냐? 아니,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검지를 펴고 들어 올리자, 미유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내가 무슨 개소리를 할지 기대하는 것 같다.
짧은 시간에 많이 발전했다. 예전엔 나랑 말을 섞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몇 초간 가만히 있던 내가 말했다.
“중간고사 시험지를 훔쳐볼 목적이었지?”
미유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츠다 군의 머리로는 그런 생각밖에는 못할 테니까 이해할게. 답을 하자면, 나는 마츠다 군 같은 사람이 아냐. 아니, 마츠다 군이라면 시험지를 훔쳐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비교를 잘못된 대상으로 해버렸네.”
카운터 한 방 먹었네. 팩트라 씁쓸하다.
입맛을 다신 내가 물었다.
“그럼 뭘 하고 있던 건데?”
“잊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다가, 조용하길래 공부했어.”
“그러다가 내가 청소를 하는 소리에 확인하러 와본 거고?”
“이번엔 잘 맞췄네. 대체 왜 지금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 거야?”
“왜냐니? 교수가...”
“교수님이라고 불러야지.”
“.... 그래, 교수님인가 뭔가가 하루라도 빼먹으면 아웃이라고 했잖아.”
내 설명을 들은 미유키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주말에까지 나와서 청소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건 아닐 텐데... 그래서 오늘도 나온 거야?”
“그런 거지. 다른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 혹시 주말에 학교에 들른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해서 더러워졌을까봐 걱정했어?”
단순하기는... 여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면 놀랄 텐데.
나는 미유키에게 아카데미에서 발생하는 비밀스런 일들을 약간만 말해주기로 했다.
“하나자와.”
“응?”
“너는 순진해도 너무 순진한 거 아니냐?”
“무슨 소리야?”
천진난만한 미유키의 눈망울을 보며 혀를 찬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아카데미에는 기숙사가 있어. 그렇지?”
“응, 그렇지.”
“기숙사 안에는 커플들도 있겠지?”
“응.”
“그중에선 돈이 별로 없는 커플도 있을 거야. 맞아?”
“그야... 그렇겠지?”
“다음 날이 주말인데 혼자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아깝고, 기숙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니 남녀 층이 분리되어있는데다 감시까지 확실하고... 그렇다고 밖에서 보자니 돈이 나가. 그러면 한창 불타오르고 싶은 걔네들이 뭘 할까?”
미유키의 고개가 15도 각도로 틀어졌다.
눈동자를 위로 치켜뜬 채로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잠깐 그러고 있던 미유키가 물었다.
“뭘 하는데?”
“화장실에 와서 성관계를 갖지.”
“아... 그렇구나... 성관... 잠깐만... 뭐라구??”
수긍을 하려던 미유키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듣고 멈칫하더니 입을 떡 벌렸다.
순식간에 붉어지는 그녀의 얼굴.
낄낄거린 나는 확인사살을 했다.
“성관계.”
허리까지 흔들고 싶지만, 이러면 잘 쌓아놓았던 점수가 크게 깎일 것이었다.
미유키로 하여금 부끄러움만 느끼게 하는 정도가 적당했다.
“마, 마츠다 군!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아니, 물어본 질문에 사실을 대답한 것뿐인데 왜 화를 내냐? 증거 보여줄까? 1F반 화장실로 가면 변기가 막힌 곳이 분명히 있을 텐데, 거기 뚫어보면 콘돔이...”
“그, 그만해...!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뭘?”
“그거... 그... 관계...”
“성관계가 적나라한 단어라고? 섹스라고 했으면 기절했겠네?”
“마츠다 군! 너 정말...!”
이제 그만하자.
원래 입이 천박한 나였으니 여기까지는 넘어가주겠지.
어깨를 으쓱인 나는 다시 변기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궁금증은 해결됐지? 이제 그만 가라.”
“해결은 무슨... 이거 내가 교수님한테 말씀드릴 거야...!”
“뭔... 아카데미 학생들이 초등학생이냐? 중학생이야? 다 큰 성인들한테 성관계를 금지시킨다고?”
“하, 하지만 여긴 아카데미야... 게다가 교칙엔... 아카데미 내에서 심각한 일탈행위를 하면 벌점을 부과한다고 쓰여 있단 말이야... 벌점이 부과된다는 건 곧 아카데미의 의사에 반하는 거잖아... 하면 안 된다구...”
그 교칙은 미래의 나와 네가 신나게 깨뜨릴 건데.
“다르게 생각해봐. ‘심각한’ 일탈행위임에도 퇴학처분이 아니라 벌점을 준다는 건, 아카데미 측도 청춘의 열정 같은 걸 어느 정도는 이해해준다는 뜻 아닐까?”
그 말에 미유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교칙을 밥 먹듯이 위반하는 너라면 이 상벌점제를 엄청 싫어할 줄 알았는데... 아카데미를 옹호하는 것처럼 말하네?”
“의외냐?”
“응. 엄청.”
“엄밀히 말하면 아카데미가 아니라 학생들을 옹호한 거지만 뭐... 그냥 넘어가자. 그리고 유도리 있게 넘어가면 되지 뭘 그리 빡빡하게 굴어. 누가 반장 아니랄까봐...”
“나, 나도 상벌점제는 좋게 보지 않아. 방금은 그냥... 홧김에 한 말이었어... 놀라서...”
“놀라서 한 말치고는 상세하던데. 교칙까지 들먹이면서...”
“비아냥거리지 마... 진짜야...”
알고 있어.
난 네가 그렇게까지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 걸 알거든.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라. 청소하는데 방해된다. 공부하고 싶으면 도서관이라도 가든가.”
“시험기간이라 사람이 꽉 차서...”
“아침 일찍 일어났어야지. 일찍 일어나는 새가... 그... 뭐냐...”
“벌레를 잡는다구?”
“그래, 그거.”
“속담도 잘 모르는 마츠다 군한테 그런 얘기까지 듣고 싶지 않아.”
“저번에 지하철에서도 그러더니 또 이러네? 그럼 나는 그냥 입 다물고 사냐?”
“농담이야.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농담? 네가 나한테?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
전신으로 퍼지는 성취감을 억지로 가라앉힌 내가 말했다.
“기분 안 나빴으니까 이제 가라 좀. 아니면 도와주든가.”
“알았어. 어떻게 도우면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내 몸이 확 굳어졌다.
“어...?”
“어떻게 도우면 되냐구.”
“.... 진짜 도와주려고?”
“응. 도와줄게.”
“진심?”
“그렇대도? 뭐 어떻게 하면 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청소도구함을 가리켰다.
“대걸레 빨고 바닥 닦아.”
“난 호의로 도와주는 입장이잖아.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지. 단어 하나 붙이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꼭 사족을 붙이는 것이, 날 놀려먹는 게 재미있는 것 같다.
미유키의 심경변화가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인상을 팍 구긴 내가 말했다.
“네가 먼저 도와준다고 나섰잖아.”
“마츠다 군. 나 그냥 갈까?”
“.... 재밌냐?”
“간다?”
날 등지며 화장실을 나가려는 미유키.
나는 그녀를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야... 야...! 말할게! 말한다고!”
그에 미유키가 다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청소가 어지간히 하기 싫은가보네?”
청소하고 싶어! 네 얼굴을 보면서 같이 청소하고 싶다고!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려고 한다.
“청소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어쨌든 그... 청소도구함에 대걸레 있거든...?”
“응.”
“그거... 세면대에서 빤 다음에... 바닥 좀... 닦아... 줄... 래...?”
몸까지 부들거리며 말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 미유키가 날 향해 방긋 웃었다.
칙칙한 화장실 안이 확 밝아지는 아름다운 미소.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다.
“거봐. 하면 되잖아. 앞으로는 웬만하면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노력해봐. 듣는 사람도 기분 좋고, 말하는 마츠다 군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 지금도 기분 좋지?”
“전혀. 얼른 도와주기나 해.”
“알았어. 대걸레부터 꺼낼게.”
날 스쳐지나간 미유키의 머리카락에서 상큼한 자몽 냄새가 풍겨온다.
그녀 몰래 변태마냥 코를 벌름거리던 나는, 오늘 수확은 완전히 풍년이라고 생각했다.
농담에다 일손을 도우고 말장난까지... 분위기가 너무 좋다.
내일은 근처 신사에 새전이라도 드리러 가야겠다.
도키아카에 오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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