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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8화 (8/313)

〈 8화 〉 튜토리얼 종료

* * *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으면 뭐해? 공식 자체를 모르는데.

빨리 미유키한테 공부를 배우고 싶다.

수학 시험지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낸 나는 객관식 문제를 모조리 찍고 책상에 엎드렸다.

앞으로 다섯 개의 시험이 더 남아있는데,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푹 쉬고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게 나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체 공부를 못하는 만큼, 망한 건 확정이지만.

딩­동­! 딩­동­!

숙면에 제대로 빠져있던 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오른쪽 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이 날 보며 킥킥거렸다.

흐리멍덩한 눈, 그리고 뺨에 난 팔자국이 웃긴 모양이었다.

“웃기냐?”

껄렁한 내 말투에 흠칫한 그녀였지만, 이내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아니... 미안해. 얼굴이 눌린 게 조금... 많이 졸렸나보다. 껌 먹을래?”

요즘 순해진 모습을 보여주다 보니, 예전이었다면 날 피했을 다른 학생들도 내게 근근이 말을 걸고는 했다.

피곤해 찌든 사람마냥 입맛을 다신 내가 손을 내밀었다.

“하나 내놔봐. 아니지... 하나만 줘.”

“응. 여기...”

내미는 손이 굉장히 수줍다.

껌을 받아 입 안에 넣고 짝짝 씹어보니 블루베리 맛이 났다.

그런데 내가 블루베리를 먹어본 적 있던가?

맛있으면 됐지 뭐.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나는, 여학생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고맙다. 친하게 지내자.”

그러자 여학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내 말을 듣고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뭐지?

설마 친하게 지내자는 말을 듣고 꾸리꾸리한 일을 당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중년 교수가 다가오더니 내 시험지를 걷어갔다.

“마츠다 군. 시험지를 걷을 때까지는 잡담하면 안 된단다.”

“예.”

요새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기 때문인지, 실수를 했음에도 교수의 눈빛이 호의적이다.

내 시험점수를 보면 사색이 되어선 욕을 쏟아낼 것 같은데 괜히 불안해진다.

시험이 완전히 끝난 쉬는 시간.

나는 문제집을 열심히 보고 있는 미우라를 향해 턱짓했다.

“야, 미우라.”

“응?”

“잘 봤냐?”

“나는... 그냥 반 정도는 맞춘 것 같아.”

이놈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키아카의 이벤트에 미유키와의 공부가 있는 것이고.

“반이면 잘 맞췄네. 의외다?”

“의외가 아니라 반이면 못한 거 아닐까 싶은데...?”

“그럼 다 찍은 나는 대가리가 빈 놈이냐?”

“아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미안해.”

미유키가 양호실에서 테츠야에게 사과하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한 이후, 나는 테츠야와 어느 정도는 말을 섞으면서 지냈다.

사과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테츠야는 예전보단 날 싫어하는 정도가 덜한 것 같았다.

매일 괴롭히는 걸 멈추고 잡다한 이야기나 해대니 이러는 듯한데, 이놈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 속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한여름임에도 덥수룩한 머리를 유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말이다.

그래도 미유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꾹 참아준다.

슬쩍 앞을 보니, 미유키가 친구들과 함께 시험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쟤는 안 봐도 수석이겠지.

**

“시험은 잘 봤고?”

치한 사건 때 만났던 교수의 물음.

콧방귀를 낀 내가 반문했다.

“그럴 것 같아요?”

“아니.”

“잘 아시면서 왜 물어보고 그래요.”

“삐딱하기는... 오늘이 청소 마지막 날이지?”

“예.”

“며칠 하다가 내팽개칠 줄 알았는데, 주말까지 나오면서 청소를 하다니 솔직히 의외였다. 편견이란 게 이래서 무서워.”

“칭찬인가요?”

“진심을 다한 칭찬이야. 오늘까지 수고해라. 다음 학기 땐 공부 열심히 하고, 부활동도 좀 하고 그래라.”

부활동? 당연히 해야지.

2학년이자 메인 히로인 중 한 명인 렌카가 있는 검도부로 할 거다.

어깨부상에서 돌아오자마자 양아치 신입을 받게 될 우리 렌카... 빨리 보고 싶다.

“생각해볼게요. 못난 학생은 이만 갑니다.”

“알긴 아는구나. 그래, 가라.”

부정이라도 해주면 덧나시나.

투덜거린 나는 교무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미유키를 마주쳤다.

품에 여러 책을 안고 다가오던 그녀는, 날 발견하고는 방긋 웃었다.

“안녕, 마츠다 군.”

요즘 저 미소를 자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아침에 인사했는데 또 하냐?”

“하면 안 돼?”

“그건 아닌데, 받아주기 귀찮잖아.”

“안녕이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마츠다 군이랑 이야기하다보면 나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아. 엄청 안 맞아.”

“그럼 잘 맞겠냐?”

“이거 봐. 또 비아냥대는 거. 이런 것도 좀 고치도록 노력해봐. 시험은 잘 봤어?”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야?”

“아... 내가 실수했네. 미안해. 당연히 못 봤겠지.”

아무리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는 해도, 그거 선입견이라고.

물론 잘 못 보긴 했지만.

그런데 우리 꽤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담소도 나눌 정도면.

지금 한 번 말해볼까? 사실 지금이 아니면 기회조차 없다.

뒷머리를 긁적인 나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미유키에게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야, 하나자와.”

“응?”

“혹시... 나 공부 좀 가르쳐줄 수 있냐?”

“으응...? 공부...?”

안 그래도 큼지막한 미유키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내 진중한 표정을 보더니 자신 또한 덩달아 진지해졌다.

“기특하긴 한데...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그리고 너도 잘 생각해봐. 여름방학은 길잖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멘토가 없는 2개월간, 내가 뭘 하고 다니겠니?

불량한 친구들을 만나고, 술, 담배는 기본으로 하면서 양아치 짓이나 하겠지.

그렇게 방학이 끝나고 개학했을 때, 나는 다시 개 쓰레기 마츠다 켄으로 돌아가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고.

그런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하란 말이야.

너 똑똑하잖아. 이 정도 생각쯤은 할 수 있잖아.

“어. 과외 같은 거 시켜줘. 돈 낼게.”

“아, 아니...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중간고사 시험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어?”

“야, 야. 됐다. 그냥 갈란다.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놀리기나 하고 있어... 짜증나게.”

미간을 구긴 내가 미유키를 지나치자,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노, 놀린 게 아니야. 생각 좀 하려는데 왜 가고 있어?”

그에 제자리에 우뚝 멈춘 내가 다시 미유키를 돌아보았다.

“그럼 해주겠다는 거야?”

“내가 방금 생각한다고 했잖아. 마츠다 군의 문제 중 하나는 참을성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얼마나?”

“마츠다 군.”

“알았어. 기다리면 될 거 아니야.”

툴툴거린 나는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껄렁한 자세로 미유키를 기다린 지 1분여,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한 채로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던 미유키가 내게 물었다.

“제대로 할 자신 있어?”

“아마도.”

“확실하게 이야기해. 난 발전할 의지가 없는 사람한테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네가 보기엔 어떤데? 내가 제대로 할 것 같냐? 객관적으로 평가해봐.”

“그걸 왜 내가 평가해? 마츠다 군 스스로한테 물어봐야지.”

틈을 안 주네.

물론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한 상황이니만큼 이해는 간다.

나는 복도에 똑바로 서서 미유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제대로 할 거야.”

“그래...? 좋아.”

재긴 했지만 의외로 흔쾌히 수락을 해줬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내가 물었다.

“장소는 어디로 해? 내가 갈까?”

“음... 중간에서 만나면 좋긴 한데... 마츠다 군은 어디 살아?”

“네리마구 아래쪽.”

“그래...? 가깝네...? 난 스기나미 위쪽인데. 그러면 중간 카페에서 가르쳐줄까? 도서관은 정숙해야하니까 별로고...”

집으로 오라는 말은 곧 죽어도 하지 않는구나. 슬프다.

“카페도 정숙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렇긴 하지. 음... 날씨가 더우니까 공원은 조금 그렇구...”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이랑 지도 한 번 보고 적당히 가깝다 싶으면, 그냥 우리 집에서 할래? 집 비는데.”

“으응...? 그건 좀... 너희 부모님도 계실 테고...”

“죽었어.”

“.....”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미유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동공을 보니 어지간히 당황했나보다.

“미, 미안해... 난...”

“뭘 미안해. 난 신경도 안 쓰는데. 죽은 지 오래돼서 얼굴도 기억 안 나.”

“마, 마츠다 군...! 말을 조금... 순화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귀엽다.

피식 실소를 터뜨린 나는 휴대폰을 내밀었다.

“레인 아이디나 줘.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게. 나 화장실 청소해야 돼.”

“아, 그래... 알았어...”

“공부 가르쳐주는 거다?”

“응. 가르쳐줄게... 대신 정말 열심히 해야 해. 조금이라도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바로 그만둘 거야.”

“알았다고.”

테츠야 또한 미유키에게 나와 같은 부탁을 할 것이다.

미유키는 당연히 승낙할 테고, 내게 세 명이서 함께 공부하자고 제의를 하겠지.

미유키와 단둘이 있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여름방학부터는 온갖 이벤트가 일어날 테니까.

거기에 테츠야 대신 내가 있으면 그만이다.

혹은 세 명이서 함께 보든가.

테츠야만 미유키와 단둘이 붙어있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도키아카의 초반부는 플레이에 사용할 자금을 유통하거나, 게임의 정보를 알아내는 시간.

쉽게 말하자면 튜토리얼이다.

그리고 나는 그 튜토리얼을 막 끝냈다고 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도키아카를 즐기는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

“와... 집 좋다... 그치? 테츠야 군.”

“응. 엄청 크네...”

정문 밖에서부터 테츠야와 미유키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결국 우린 우리 집에서 보기로 했다.

크게 떠들 수 있는 빈 집이라는 메리트가 컸거니와, 위치 또한 가까웠기 때문이다.

테츠야는 내 예상대로 공부 모임에 참가하게 됐고, 그 결과가 두 사람의 방문이었다.

에어컨을 풀가동한 나는 슬리퍼를 신고 거실에서 나왔다.

잡초가 무성한 돌길을 지나 정문을 열려고 하는데,

“마츠다 군! 우리 왔어!”

미유키가 큼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헛웃음을 켠 나는 정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타박했다.

“벨이 있는데 왜 소리를 질러? 왔냐? 미우라.”

테츠야를 향해 턱짓하자, 그가 어색한 몸짓으로 한손을 들었다.

“안녕, 마츠다.”

안녕은 무슨... 세 명의 히로인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줏대 없는 놈이.

속으로 놈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나는 몸을 옆으로 비켰다.

“들어와.”

그러자 미유키가 밝은 낯으로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오늘 미유키의 코디는 흰 티, 그리고 발목 바로 위까지 덮는 치마.

걸을 때마다 드러나는 새햐얗고 얇은 발목이 욕구를 자극한다.

“어디로 가야 해?”

고개를 돌린 미유키의 물음.

테츠야와 함께 걷다가 정신을 차린 내가 대답했다.

“길만 따라가면 거실 나와.”

“집주인이 앞장서는 게 정상 아니야? 그리고 마츠다 군, 잡초 같은 건 관리 안 해?”

“굳이 해야 되나?”

“마츠다 군답네. 근데...”

말끝을 흐린 미유키가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식물들을 본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날 나무랐다.

“마츠다 군...! 식물을 저렇게 놔두면 어떡해? 다 죽어가잖아...!”

죽어간다고? 이미 다 죽은 게 아니었어?

“그럼 어떻게 놔두는데? 버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물뿌리개는 왜 저렇게 낡았는데?”

“안 쓰니까?”

“이해할 수가 없네 정말...”

주위를 두리번거린 미유키는 바깥에 나와 있는 수도를 찾아내더니, 물뿌리개를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꼼꼼하게 물뿌리개를 씻고 식물 상태를 확인해보는 그녀.

뭔가 동거를 하러 온 여자친구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옆에 있는 이 버러지만 어떻게 하면 참 즐거울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뭐하냐? 들어가자.”

“아, 그래.”

테츠야를 데리고 거실로 간 나는, 놈과 함께 우리가 공부할 원탁을 펼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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