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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9화 (9/313)

〈 9화 〉 여름방학, 그날의 밤

* * *

나와 테츠야는 성적 차이가 심하다.

놈이 평균에서 평균 이하라면 나는 끝자락.

이런 수준 차이가 있는데 함께 공부를 한다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라고 생각하던 나는, 미유키가 능숙하게 눈높이 교육을 해주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테츠야와 날 따로 두고, 각자의 수준에 맞게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버벅거리지도 않았고, 테츠야가 질문을 던지면 막힘없이, 그리고 빠르게 대답했다.

그런 와중에도 날 챙기면서 이번 학기의 수업을 복습시켜주는데, 대가리가 텅텅 빈 나조차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쏙쏙 됐다.

교육열과 교육법이 대단한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건 너무 치트키 아닌가?

미래에 교사를 하면 대성할 것 같다.

거의 2시간가량을 쉬지도 않고 맞춤 과외를 해주던 미유키는, 진이 약간 빠진 듯 다다미에 손을 대고 상체를 뒤로 약간 젖혔다.

“잠깐 20분 정도만 쉬어도 돼?”

“선생님이신데 마음대로 하셔야지.”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꽤나 마음에 든 듯, 미유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흰 티셔츠 안으로 베이지색의 브라가 희미하게 비친다.

양호선생만큼은 아니지만 큰 맘마통이다.

주무르고 싶은 충동이 가시질 않아.

눈을 한 차례 끔벅이는 것으로 정신을 차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스 마실래?”

“그래도 돼?”

“공짜로 배우는 입장이니까 당연히 줘야지. 자꾸 그렇게 물어보지 말고 이 집에 있는 동안엔 네 마음대로 해. 마실 것도 알아서 꺼내먹고...”

말끝을 흐린 나는 테츠야를 바라보았다.

이놈에게도 호의를 베풀어줘야 한다. 그래야 미유키한테 점수를 얻지.

“미우라 너도 괜히 주뼛대지 말고, 편안하게 해라.”

근데 좋은 말은 안 나온다는 말이지.

테츠야가 소심하게 감사를 전했다.

“응. 고마워, 마츠다.”

자그마한 쟁반에 컵 세 개를 올려놓고 오렌지 주스를 따른 나는, 원탁으로 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미유키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잘 마실게, 마츠다 군.”

주스를 입으로 가져간 미유키는 곧 목을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청순하기가 짝이 없으면서, 삼키는 모습은 너무나도 섹시하다.

백번 생각해도 내가 가져야 맞다.

“마츠다, 혹시 너 운동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미유키를 감상하고 있던 내 귀에, 테츠야의 거지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내가 대답했다.

“옛날에 했었는데 왜? 운동하고 싶냐?”

“아니... 팔근육이랑 가슴근육이 탄탄하길래 해본 말이었어.”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하고 싶어 하는 티가 팍팍 났다.

미유키 앞에서 몸자랑을 하고 싶나보지?

애석하지만 내가 네게 운동을 가르쳐줄 일 따윈 없다.

인터넷에서 탄단지 비율, 후인하강 같은 거나 찾아보면서, 네가 알아서 하라고.

“옛날에 했었다면... 지금은 그만둔 거야?”

이어지는 미유키의 물음.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왜인지 말해줄 수 있어?”

“재미없어져서.”

약간 우수에 젖은 눈빛을 하자.

뭔가 사정이 있지만, 알려주기 싫어서 얼버무린 척.

“아... 응. 마츠다 군은 주말에 뭐하면서 놀아?”

내 연기에 홀라당 넘어간 미유키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나중에 미유키와 더 친해지고,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물어보면 알려줘야지.

“주말에? 애들이랑 만나거나 집에 있지.”

“애들? 그 와타나베 일행들을 말하는 거지? 그 서클에 소속된 애들... 서클 이름이 분명...”

“슈프리 서클.”

“응... 슈프리... 거기에 질이 엄청 나쁜 학생들이 많잖아. 마츠다 군도 거기 소속이야?”

“맞아. 타카시랑 몇몇 친구들이랑 같이 소속되어있어.”

“대체 왜?”

철없는 마츠다 켄이 사고를 쳐대면서 유명해지니까, 그쪽에서 입단 제의가 왔어.

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고 금방 나올 거야.

너와의 이벤트 때 호감도용으로 써먹기만 하고.

“글쎄.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네.”

“.... 혹시... 마츠다 군, 거기에 소속된 게 자랑스럽고 그래?”

“아니. 그렇진 않아.”

“그럼 나오면 되잖아. 거기 있으면 마츠다 군만 손해인데...”

“진심으로 걱정해줘서 하는 말이냐?”

“당연하지...! 거긴 진짜로 인생 걱정은 하지 않는 학생들만 들어가는 곳이잖아...! 마츠다 군은 스스로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곳은...”

미유키가 말을 하다 말고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히죽거리는 내 미소를 본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며. 그렇게 생각 안 해.”

“그, 그럼... 나와야 맞지 않을까...?”

“나가려면 힘든데.”

“힘들다는 게 무슨 뜻이야...? 혹시 협박 같은 거 당해?”

“내가 협박당할 사람으로 보여?”

“그, 그건 아니지만... 혹시 뭔가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나한테...”

“네가 교수님한테 말해주려고?”

“슈프리 서클은 아카데미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곳이야... 사고 많이 치는 곳인 거, 마츠다 군도 잘 알지...? 조만간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도 몰라...”

어떤 처분이라면 퇴학이겠지? 최소한 정학이고.

도키아카를 플레이할 땐 몰랐던 소소한 정보, 고맙다.

그럼 내가 거기 있으면 안 되겠네?

방학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써먹어야 될 것 같은데...

그 전에 미유키의 호감도를 당겨놔야겠네.

“걱정해줘서 고맙다.”

진중한 내 말투에, 미유키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 그녀의 낯빛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응... 다 쉬었으면 공부할까...?”

“그래.”

**

“오늘 잘 따라와 줘서 놀랐어.”

정문까지 미유키와 테츠야를 배웅한 나는, 미유키의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몇 분 하다가 때려치울 줄 알았냐?”

“솔직히 말해야 해?”

“아니. 그냥 가라.”

“응. 내일 보자.”

“내일도 해?”

“공부는 맨날 하지 않으면 다 잊어버려. 마츠다 군에게 기본기가 생길 때까지, 그리고 테츠야 군에게 응용력이 생길 때까지는 매일 하는 게 좋아.”

나는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속내는 겉모습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장난 아니네...”

“힘들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배우니까 그래. 조금만 지나면 재미가 붙을 거야.”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사람도 있어?

그거 참... 연구대상감이로군.

그나저나 샤워도 하지 않고 간다니 씁쓸하다.

기껏 노천탕도 준비해놓고, 엿보기 구멍도 만들어놨는데.

“내일 보든가 그럼.”

“응. 우리 갈게. 식물 좀 제대로 관리하구, 복습 꼭 해야 해?”

“알았어.”

“내일 시험 본다?”

“알았다니까...”

질렸다는 얼굴로 손을 휘저은 나는 테츠야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눈 후 정문을 닫았다.

그러자 까르르거리는 미유키의 웃음소리와 함께, 두 쌍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희미해져갔다.

담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나는, 미유키와 테츠야가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이들을 그냥 보내는 이유는 이벤트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미유키가 집 근처의 자그마한 놀이터 그네에서 혼자 노는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나는 거기에 개입할 생각이었다.

오늘 나와 공부를 했기에 미래가 달라져서 그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야 한다.

지금은 미유키의 호감도를 최대한으로 빨아야할 때니까, 모든 것을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마친 나는 시간을 보았다.

일곱 시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조금만 더 기다린 뒤에 출발해야겠다.

그리고 타카시한테 만나자고 전화해놔야지.

미유키에게 할 변명이 필요하니까.

**

좁은 도로를 마주본 주택이 틈틈이 늘어서있다.

뭔가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미유키의 동네는 우리 동네만큼 한산했다.

얌전히 동네를 한 번 훑어본 나는 놀이터로 향했다.

어둑한 놀이터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곳보다는 맞은편 놀이터가 더욱 컸고, 가로등이 있었으니까.

입맛을 다신 나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미유키를 기다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유키는 오지 않았다.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개입함으로 인해 이벤트가 바뀌어버린 걸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나는 날 이곳으로 보낸 신을 믿는다.

신님도 저처럼 도키아카를 플레이하다가 빡쳤잖아요.

그래서 날 이곳으로 보낸 거잖아요. 진짜 주인공이 되어보라고.

그런 식으로 자기위로를 하며 애꿎은 모래를 차던 나는, 놀이터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마자 재빨리 그네를 타는 시늉을 했다.

“.... 어? 사람이 있었네...”

입구에서부터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테츠야가 아니라 내가 이 도키아카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그네를 멈추고 가로등에 비친 미유키의 실루엣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나자와?”

“으응...?”

미유키가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이런 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던 모양.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던 그녀가 놀이터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혹시... 마츠다 군이야?”

“어. 네가 여기 왜 있냐?”

미유키가 빠른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진짜 마츠다 켄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내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녀가 놀란 투로 말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방금 내가 물어봤잖아.”

“아... 그... 여기 우리 동네인데...”

“너네 동네? 네가 사는 집 동네라고?”

소스라치게 놀란 체를 하자, 미유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가락으로 한 집을 가리켰다.

“응... 저기가 내 집이야.”

“그래...? 몰랐네.”

“이제 마츠다 군이 대답해봐.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집에서 쉬던 거 아니었어?”

“타카시랑 만나려고 했는데, 재미없을 것 같아서 돌아가다가 여기 분위기가 조용하길래 잠깐 들렀지. 생각할 거리도 있고 해서.”

타카시를 언급하니 미유키의 표정이 마치 바퀴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불쌍한 우리 타카시, 그러니까 양아치 짓 좀 그만하고 살지.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안쓰럽다.

“와타나베 타카시도 이 근처에 살아? 아니면 그냥 약속장소가 이 근처였던 거야?”

“후자이긴 한데, 약속장소는 여기서 좀 더 멀어.”

“아...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한 미유키가 내 옆에 있는 그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내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전화 오는 거 아니야?”

“문자야.”

“급한 문자 같은데? 설마 와타나베 타카시야?”

“맞아. 왜 안 오냐고 징징대는 거 씹고 있어. 볼래?”

“아, 아니... 보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미유키의 말을 들었음에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유키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원래 남의 휴대폰이 궁금한 법이긴 하지.

“뭐라고 써있냐?”

“.... 왜 약속장소에 안 나오냐고... 비, 비속어가 너무 많아서 못 읽겠어...”

이 정도면 남아있는 일말의 의심조차 접었겠지?

이래서 보험을 들어놔야 한다.

킥킥거린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무릎 위에 팔을 대고, 상체를 앞으로 빼며 물었다.

“근데 아까 말했던 생각할 거리가 뭐야?”

“그거? 그냥 미래 생각이었어. 앞으로 뭐하고 살지... 같은 시답잖은 생각.”

“아...”

“너 방금 마츠다 군도 그런 고민을 해? 라고 하려 했지?”

정곡을 찔렀을까?

미유키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 아닌데...?”

“아니긴 무슨. 딱 맞췄구만. 넌 거짓말은 못할 사람이네.”

그 말에 미유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그걸 네가 왜 사과해? 너는 착해도 너무 착해서 문제야.”

“그래...? 마츠다 군이 보기엔 나 착한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약간 사기 잘 당할 스타일.”

“아 뭐야... 그럼 착한 게 아니라 둔하다는 거잖아.”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미유키가 땅을 발로 차며 그네를 밀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벌써부터 미래 생각을 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는 게 어떨까? 우린 아직 1학년이잖아. 아직 시간은 많아.”

“그거는 게으른 사람들이 하는 멘트 아니냐? 우린 아직 젊어, 우린 아직 창창해...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후회하는 사람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기반을 잘 닦아놓을 시간이 많다는 뜻이었어. 마츠다 군이 꾸준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다 보면, 미래는 자연스럽게 그려질 거라고 생각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데?”

“일단 지금은 공부가 있겠지. 오늘 배운 거 복습했어?”

“안 했는데.”

“어떡해? 내일 시험 다 틀리면 벌 줄 건데.”

“묶어놓고 채찍질이라도 하게? 나 그런 거 좋아해.”

이런 말을 테츠야가 했다면, 미유키는 정색을 하며 놈을 나무랐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가벼운 언동을 일삼는 내가 하니, 미유키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마저도 친하지 않았다면 못했을 말이었겠지만, 치한 사건 이후 우리 사이가 제법 가까워졌기에 미유키는 쉽게 내 말을 넘겼다.

“뭐래... 난 못해.”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이대로만 가자.

미유키처럼 땅을 발로 찬 나는, 그네를 움직이면서 그녀와 오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주된 내용은 공부였지만, 내 이미지에 걸맞은 가벼운 농담도 했다.

선은 넘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그리고 미유키는, 다행스럽게도 내 이런 농담들을 좋아해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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