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0화 (10/313)

〈 10화 〉 럭키스케베

* * *

미유키, 테츠야와 공부를 시작한지 사흘이 지났다.

우린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한층 더 편안해진 채로 공부에 집중했고, 쉬는 시간엔 소소하게나마 잡담을 했다.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 이후, 미유키는 내게 더욱 마음을 연 것 같았다.

가끔 눈을 마주치면 먼저 미소를 보내거나, 뭘 보냐고 장난 식으로 말을 해왔던 것이다.

마치 내 평소 모습을 따라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뻤다. 미유키와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그러나 아직 내가 테츠야와 미유키 정도의 사이까지 가려면 한참 남은 터라 날아갈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

그저 하루마다 관계 발전이 되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

“이제 20분... 아니, 30분만 쉬자. 난 식물들 상태 좀 보러 갈게.”

수업을 끝낸 미유키가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식물에 물을 주고, 쉬는 시간에 잠깐 살피는 건 그녀가 우리 집에 와서 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좋은 징조였다.

저 행동이 버릇으로 굳어져버리면, 수업이 없는 날에도 우리 집에 올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수박을 대충 잘라낸 나는, 거실과 붙은 평상에 앉아 미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미우라에게 다가갔다.

놈의 옆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쟁반을 가운데에 놓자, 미우라가 말했다.

“잘 먹을게, 마츠다.”

“많이 먹든가 말든가.”

그 말에 미유키가 몸을 돌리더니, 장난기가 가득한 투로 날 놀렸다.

“마츠다 군은 츤데레구나?”

이런 씨발, 내가 너한테 츤츤거렸으면 츤츤거렸지, 테츠야 저 새끼한테 그러겠어?

너 이거 담아둘 거다.

나중에 기승위로 갚아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미유키를 보고 있자,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수박을 베어 물었다.

강한 단 맛을 느꼈는지, 그녀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엄청 달다...! 이거 마츠다 군이 직접 고른 거야?”

“재래시장 입구에서 눈앞에 보이는 거 골랐는데.”

“정말...? 운이 좋았나보다.”

여자친구랑 같이 먹을 건데 단 걸로 달라고 말하니까, 시장 아줌마가 잘 골라주더라.

인심이 아주 후해.

수박을 한 입 물고 씹어 삼킨 나는, 이어지는 테츠야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마츠다, 내일 주말인데 뭐할 거야?”

“몰라. 할 거 없어. 넌?”

“글쎄...? 우리도 아직 못 정했는데.”

“우리라고 말하는 걸 보면 너흰 계속 한 몸처럼 붙어 다니나보다?”

“아, 그건 아니고... 함께한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뿐이야. 나는 할 거 없어.”

이 새끼가 지금 나 약 올리나?

흘끗 미유키를 보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테츠야의 말이 맞다는 뜻.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서 확인사살을 당하니 짜증이 나는구나.

테츠야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아낸 나는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너도 할 거 없냐?”

“응. 딱히 생각은 안 해봤어.”

“그럼 나랑 책이나 고르러 갈래?”

“책?”

“어. 만화책 사려고.”

미유키의 놀란 낯빛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중얼거렸다.

“공부할 책을 사러 가는 줄 알았던 내가 바보지...”

“그것도 살 생각이었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너랑 같이 가자고 하겠냐? 그냥 가서 재미있는 만화책 몇 권 고르고 말지.”

일단은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야 한다.

현 상황에서 대놓고 데이트를 신청하면 거절을 당할 것이 뻔하니까.

그저 동급생... 아니, 친구인 날 도와주는 정도로 생각하게 하는 편이 나에게도, 미유키에게도 좋았다.

“음... 그렇긴 하네... 마침 나도 수업용 책을 사려고 하긴 했는데... 좋아, 같이 가자. 대신 책방 위치는 내가 알려줄게. 거기에 만화책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구.”

고민도 하지 않고 제의를 승낙하는 미유키.

나는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옆에서는 테츠야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꼽냐? 그러면 용기를 냈어야지.

나처럼 할 자신도 없어서, 맨날 미유키가 먼저 놀러가자고 하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놈아.

책방 이벤트는 내가 잘 챙길게. 보면서 잘 배워라.

그렇다고 각성 같은 건 하지 말고.

“알았어. 레인으로 위치 보내주고, 내일 정오에 만나.”

“정오? 너무 덥지 않을까?”

“어차피 실내에 있을 건데 뭔 상관이야?”

“그런가...? 알았어. 그러면 나는 한 시쯤 도착하면 되겠다. 그치?”

또 장난을 치고 있구나.

받아주자.

“정오가 한 시였어?”

진지하기 그지없는 내 말에, 미유키의 눈이 동그래졌다.

벙 쪄선 날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깔깔거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신나게 웃던 그녀는, 자신의 눈 밑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마츠다 군은 늦잠을 자서 지각할 게 뻔하니까, 그때 맞춰서 온다는 얘기였어...”

“.... 놀리지 마라. 그리고 울 정도로 웃긴 건 절대 아닌데?”

“이건... 슬퍼서... 그래, 슬퍼서 나는 눈물이었어... 프흡...!”

“수박이나 처먹어. 던지기 전에.”

“응... 수박 맛있지... 먹을게... 근데 마츠다 군... 얼굴 빨개진 것 같아...”

미유키의 계속되는 놀림에 짜증을 낸 나는, 테츠야를 쳐다보며 협박했다.

“입꼬리 안 내려?”

“어... 어? 아니... 나는 안 웃었어...”

알아. 그냥 화풀이하는 거야.

테츠야에게 너도 올래? 같은 말을 해선 절대 안 된다.

분명히 따라올 테니까.

그리고 테츠야는 나도 같이 가겠다고 말할 깜냥이 없는 놈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 무식함을 어필하면서 화제를 돌리기만 하고, 미유키를 믿자.

부디 그녀가 테츠야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기를.

**

뙤약볕이 진짜 존나게 따갑다.

인상을 팍 구긴 채 미유키를 기다리던 나는,

“마츠다 군!”

어깨 바로 뒤에서 미유키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몸을 움찔했다.

“아이 씨... 깜짝이야...”

그러자 미유키가 방글방글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오늘 미유키의 코디는... 공부 첫날에 보았던 흰 티와 발목까지 덮는 검은색 치마였다.

방어력이 참 튼튼해 보이네. 언젠간 미니스커트에 크롭티로 코디시킬 거다.

“마츠다 군은 보기보다 겁이 많네?”

“겁이 많긴 뭘 많아.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다 깜짝 놀라겠네.”

투덜거린 나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테츠야는...

‘없다.’

우리 미유키, 테츠야한테 아무 말도 안 했구나.

아주 잘했어. 이 빚은 질싸로 갚을게.

“뭐해?”

미유키의 물음에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향한 내가 대답했다.

“그냥 낯익은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됐고, 덥지 않냐?”

“더워. 더워서 미칠 것 같아.”

혀를 내뺄 기세로 더위를 탄 미유키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향했다.

거기엔 일본식 빙수인 카키고오리 전문점이 있었다.

시원한 게 무척 간절한가보다.

나는 엄지를 뻗어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했다.

“카키고오리 먹을래? 저기 가게 있던데.”

“어...? 나 방금 그 생각했는데!”

“됐네 그럼. 먹자. 더워 뒤지겠다.”

“마츠다 군. 말 순화해서.”

“이런 날까지 꼭 참견해야 되냐? 그냥 가면 덧나?”

“습관처럼 비속어가 나와 버리잖아. 그걸 고쳐야 돼.”

“엄청 덥다. 됐냐?”

그제야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미유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이제 가자.”

가게로 움직인 우린, 여러 시럽을 섞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까지 올려가며 빙수를 즐겼고, 각자 계산을 마치고 책방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약간 빈티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종이책 특유의 냄새가 나고, 책 정리도 제대로 안 된 곳.

책방 안에 들어선 나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미유키를 기다렸다.

이후 그녀가 내 쪽으로 오자 조용히 불만을 터뜨렸다.

“여기 헌책방이냐?”

“중고 서적도 있기는 한데, 기본적으로는 새 책을 팔아. 만화 코너는 저기 있어.”

“신간이 없을 것 같은데...”

“여기 사장님도 만화 좋아하셔. 분명히 있을 테니까 찾아봐.”

“.... 만화 코너가 어디라고?”

“저기. 네 뒤편. 네가 공부할 참고집이 수학이랬지?”

“맞아.”

“그러면 내가 마츠다 군 것까지 고를게. 마츠다 군의 수준은 내가 잘 아니까.”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만화 코너로 움직였다.

신간 만화책? 솔직히 사고 싶지도 않았다.

난 그저 이벤트를 통해 호감도를 쌓고 싶을 뿐.

나는 만화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미유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천천히 책방을 돌아다니며 여러 서적을 보고 있는 미유키.

그녀가 구석자리로 갈 때쯤, 나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미유키가 까치발을 들고 쌓여있는 책의 중간 부분을 건드리는 순간, 있는 힘껏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다닥­!

고요한 책방을 울리는 발소리.

미유키의 고개가 돌아가며, 눈이 내 쪽으로 향한다.

“마츠다 군...? 무슨...”

기세 좋게 달려오는 내가 무서웠는지, 미유키의 동공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런 미유키의 눈빛은 신경도 쓰지 않은 나는, 팔이 그녀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마자,

그녀의 어깨, 그리고 허리에 손을 대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꺄아악!”

우르르르르­!

미유키의 비명과 함께 우리의 위로 우르르 쓰러지는 책더미.

둔탁한 느낌이 머리, 그리고 등 전반에 일어난다.

정수리에서 따끔한 느낌마저 일었다.

“큭...!”

미유키의 온몸을 내 몸으로 보호한 나는, 책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밑에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미유키를 향해 물었다.

“너 괜찮냐?”

그에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미유키가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아... 응... 마츠다 군이야말로 괜찮아...?”

“넌 키도 작으면서 그걸 꺼내려고 하고 있냐? 주인이나 날 부르면 되지.”

“미, 미안... 근데... 악...! 아파...! 마츠다 군... 잠깐만...”

돌연 한쪽 눈을 감으며 고통스러워하던 미유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내 손이 있었다.

미유키의 한쪽 가슴을 아주 강하게 움켜쥔 채로.

러브코미디 클리셰 중 하나.

어떠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며 남자가 여자의 은밀한 곳을 우연히, 본의 아니게 만지게 되는 상황.

이를 두고 럭키스케베라고 했고, 내게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쓰러지면서 일부러 미유키의 가슴을 만진 것이지만 뭐... 그렇다고 치자.

“.....”

“.....”

미유키와 눈을 마주치면서 잠깐 침묵한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져 앉았다.

이후 뒷버리를 벅벅 긁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하다... 바닥을 짚으려다가...”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미유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야... 날 구하려다가 그런 거잖아...”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그것을 깬 건 미유키의 놀란 목소리였다.

“마츠다 군...! 손에 피 묻었어...!”

알고 있어.

두껍고 단단한 책 모서리에 찧어서 까졌고, 그래서 일부러 뒷머리를 긁은 거야.

피를 보여주면서 이 어색함을 금방 가시게 하려고.

물론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분위기가 냉각되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피해야지.

손가락 첫 마디에 묻어있는 피를 본 나는 멍청한 얼굴로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이거 네 피냐?”

“그, 그럴 리가 있겠어? 난 아무런 상처도 없단 말이야...! 자, 잠깐만 기다려...! 사장님! 사장님!!”

미유키가 호들갑을 떨며 ‘마침’, ‘우연히’ 화장실에 간 주인장을 찾으러 갔다.

그녀가 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유키의 가슴을 만진 반대쪽 손을 보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처음 맛본 미유키의 가슴은 말캉하고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젤리처럼 부드럽게 눌리는 느낌이 대단했다.

완벽 그 자체. 더 이상의 미사여구 같은 건 필요가 없다.

미유키가 브라를 차지 않았다면 더욱 황홀했겠지만...

맨가슴은 나중에 관계가 가까워지면 얼마든지 만질 수 있으니까, 이 정도로 만족하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미유키의 가슴 감촉을 되새기던 나는, 일순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피가 묻어있는 손을 위로 뻗어 휘저었다.

팍­!

그러자 떨어지고 있던 한 권의 책이 내 손에 막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이벤트는 이미 끝났는데, 더 이상 내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지.

마지막 클리셰마저도 해결한 나는 산뜻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 *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