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1화 (11/313)

〈 11화 〉 럭키스케베 #2

* * *

미유키와 말을 하지 않고 길을 걸은 지 30분이 지났다.

인적이 뜸한 길로 가다보니 터벅거리는 발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아까부터 말을 걸고 싶었지만 미유키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다.

가슴을 만진 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긴 한데...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건가? 내가 구해준 사건을 생각하면서?

“하...”

긴 날숨을 내뱉은 나는 붕대가 감긴 머리를 긁으려고 했다.

하지만 미유키가 내 손목을 잡아채며 만류했다.

“만지지 마... 그리고 한숨은 왜 쉬는 거야?”

이제야 대화의 물꼬를 트는구나.

진작 이럴 걸 그랬다.

“아니 분위기기 왜 이렇게 어색하냐... 가슴 만진 건 진짜 미안하다.”

대놓고 아까 있었던 파렴치한 일을 들먹이자, 미유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책방 주인이 미안하다고 공짜로 준 책을 품에 꼭 안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거 때문이 아니야...”

“그럼 뭔데?”

“.... 그냥... 조금 뻘줌해서...”

“그거 때문 맞네. 네가 거짓말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 아니래도...?”

“아니긴 무슨... 딱 봐도 맞구만...”

투덜거리며 뒷목에 손깍지를 끼자, 입술을 삐죽 내민 미유키가 돌연 발 한 짝을 옆으로 내밀었다가, 재빨리 다시 원위치 시켰다.

그 알 수 없는 행동에 입을 살짝 벌린 내가 물었다.

“너 뭐하냐?”

“다리 걸려다가... 마츠다 군의 몸이 성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어.”

“대가리 빼고는 멀쩡한데?”

“대가... 흐흠... 아니, 머리는 조금 괜찮아?”

너도 이제 내 말버릇을 따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무심코 나온 말이긴 하겠지만 기특하다, 기특해.

히죽 웃은 내가 대답했다.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원래 무식한 머린데 좀 다치면 어때.”

“그런 말 하지 마... 왜 스스로를 낮추고 그래?”

“농담이다. 너는 내가 농담할 땐 왜 맨날 진지하냐?”

“지, 지금 상황에서까지 농담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지...”

“나 신고할 거냐?”

“응...?”

큼지막한 미유키의 눈이 두어 번 끔벅거렸다.

내가 가슴을 만진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그녀가 날 나무랐다.

“마츠다 군, 나 진짜 신경 안 써. 마츠다 군도 신경 쓰지 마.”

그럼 한 번 더 만져도 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벼운 성적 농담은 이럴 때 쓰면 안 된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자제하자.

“알았어. 근데 덥지 않냐?”

“나는 그다지...? 마츠다 군은 더워?”

“나도 별로. 그냥 어떤가 물어본 거야.”

“아... 응.”

미유키의 대답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우린 느린 보폭으로 걸음을 놀렸고, 결국 미유키의 동네까지 도달했다.

미유키와 놀이터에 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밤이 아니니만큼 참자.

오늘은 그냥 미유키를 보내주는 거다.

그녀가 오늘 있었던 일을 조용히 곱씹을 수 있도록.

“여기가 우리 집이야.”

미유키는 자그마한 어느 2층짜리 단독주택 앞에서 멈췄다.

시선을 위로 올려 주택을 감상한 내가 말했다.

“집 예쁘네. 주황색 지붕이 마음에 들어.”

“마츠다 군의 집보다 훨씬 작지?”

“작다고 느껴지진 않는데? 가족이 몇 명이라고 했지?”

“나 포함해서 네 명. 엄마, 아빠, 그리고 언니랑 같이 살아.”

자매덮밥, 모녀덮밥, 모녀 4P까지 할 수 있다고? 알았어.

“이런 좋은 집에서 가족들이랑 살면 재미있겠다.”

“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유키.

혼자 사는 내 입장을 신경 쓰면서 말을 조심하는 게 눈에 보였다.

헛웃음을 켠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그나저나 너 은근히 이기적이다?”

“뭐가...?”

“날 경비견 취급하면서 여기까지 데려왔잖아. 부상당한 경비견인데 쉬지도 못하게 하냐?”

“겨, 경비견이라니...! 그건 절대 아냐...!”

“농담이다.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네. 난 간다. 쉬어라.”

대충 손을 흔들고 몸을 돌리자, 뒤에서 미유키가 날 불렀다.

“마, 마츠다 군...!”

“엉?”

“고마워... 오늘... 구해줘서.”

“별 걸 다 고마워하네. 수고해라.”

“조심히 들어가...!”

미유키를 향해 가볍게 웃어준 나는 동네를 벗어나며 생각했다.

미유키의 태도는 고마운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가슴을 만졌다는 게 창피해서 저런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폐를 끼쳐 미안한 건가?

물론 미유키는 정말 착한 여자니 그런 마음도 가졌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날 남자로 의식했구나.’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내가 그녀를 구해준 순간과 그 직후만큼은 분명히 날 남자로 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저 태도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태까지 해온 업보가 있는 만큼, 한 번만 방심하면 호감도는 다시 추락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미유키를 챙기자.

@@

“다녀왔어요.”

힘없는 인사에, 부엌에서 나온 미유키의 엄마가 물었다.

“일찍 왔네? 책은 샀니?”

“응, 샀어.”

“너 혹시 더위 먹었니? 오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이상해... 똑같은데. 나 올라갈게.”

“에어컨 틀어놓고 테츠야한테 전화라도 하렴.”

“테츠야 군한테 연락 왔었어?”

“그건 아닌데, 오늘 시장 다녀오면서 마주쳤어. 얼굴에 근심이 서려있더라.”

근심? 공부가 잘 안 되어가고 있는 건가?

잠깐 쉬었다가 나가서 만나봐야겠다.

그리 생각한 미유키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움직였다.

“하아...”

침대에 털썩 누운 그녀는 아까 책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되새겨보았다.

항상 여유만만하던 마츠다가 그렇게나 다급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튀어나온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수수 떨어지는 책에 맞으면서도 자신만을 살피던 것도 생생하다.

솔직히... 조금 멋있다고 생각해버렸다.

‘자, 잘생기긴 했는데...’

짧은 머리가 각지고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와 더없이 어울리긴 했다.

요즘 서서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모습도 보기 좋고...

눈을 감은 미유키는 평소와는 전혀 달랐던 마츠다의 생소한 모습을 생각해보다가 머리를 털어냈다.

지금 건 그냥 한순간의 변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선 그 어떤 남자라도 백마 탄 기사님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이라, 뭐라도 해줘야 맞다.

어플을 뒤적거린 그녀는 마츠다의 동네에 있는 편의점 기프티콘을 샀다.

이후 마츠다에게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귀여운 이모티콘을 곁들여서 선물을 보냈다.

**

다음 주 월요일.

미유키에게 배운 것들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심심한 주말을 보낸 나는, 미유키와 테츠야가 찾아오자 정문을 열었다.

“왔냐?”

미유키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미묘하게 즐거워하는 기색이 섞여있는 것 같다.

“응. 복습은 했지?”

“하긴 했는데... 이해가 안 가는 게 많더라.”

“그럼 물어보지 그랬어.”

“하는 데까진 내 힘으로 해봐야지.”

“좋은 자세지만,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걸 붙잡고 있는 것보단 물어보는 게 더 나아. 앞으로는 그렇게 해. 근데 우리 언제 들어가? 날씨 진짜 더운데...”

하긴, 어제 비가 와서 오늘 습도가 장난이 아니긴 하지.

나는 두 사람이 쉽게 들어오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미유키는 자연스럽게 돌길을 건너 화단으로 향했고, 이파리가 점점 살아나고 있는 식물들을 보더니 방긋 웃었다.

그런 그녀를 놔두고 테츠야와 함께 거실로 간 나는, 미리 깎아놓은 멜론을 가지고 왔다.

“먹어.”

그러자 테츠야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니, 멜론을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잘 처먹는 건 또 존나게 잘 처먹어요.

놈의 맞은편에 주저앉은 내가 물었다.

“많이 덥지 않냐?”

“응. 오늘 장난 아니더라. 여기 오니까 살 것 같다...”

“근데 너는 머리 안 잘라?”

마침 거실로 온 미유키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테츠야 군. 마츠다 군처럼 짧게 잘라보는 건 어때? 여름이기도 한데 답답하지 않아?”

미유키는 덥수룩한 머리의 테츠야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머리를 자르라고 한다는 건...

이거 꽤 의미심장하거든요?

멜론을 우걱우걱 먹던 테츠야가 의아한 눈으로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여태까지는 아무 말 없었잖아.”

“아니... 이번 여름은 엄청 덥다길래 걱정돼서 그러지.”

“그래...? 그럼 한 번 잘라볼까? 마츠다, 혹시 미용실 어디 다녀?”

꼴에 남자라고, 미유키가 말하니까 헤벌쭉해져선... 쯔쯔...

속으로 콧방귀를 낀 내가 대답했다.

“동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있는데, 공부 끝나고 같이 가보든가.”

“그럼 부탁할게.”

테츠야는 머리를 자르는 것보단 기르는 게 어울리는 얼굴형이다.

놈의 색채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나야 좋지.

알겠다고 답한 나는 미유키를 향해 감사를 전했다.

“야, 기프티콘 잘 썼다. 덕분에 도시락 사서 배 터지게 먹었어.”

멜론을 먹다 멈칫하는 테츠야.

그가 미유키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프티콘?”

“아... 마츠다 군이 책방에서 날 구해줬다고 했잖아?”

“응.”

“그때 고마운 마음에 선물 보낸 거야. 마츠다 군. 막 기름진 음식으로만 산 건 아니지? 요즘 샐러드 도시락도 나오잖아.”

평범한 대화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테츠야가 배제된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

아니, 과대해석하지 말자.

현재의 미유키는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니다.

대화장의 주체가 나인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그리고 말하는 걸 들어보니 본의 아니게 가슴을 만졌다는 건 얘기하지 않은 듯하다.

뭐,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일이긴 하지.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했던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 생기면 좋은 것이기도 하고.

“가라아게 도시락만 사먹었는데.”

“샐러드도 먹어야 건강도 챙기지.”

“과일로 챙기잖아.”

“....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오늘 수업은 수학이지? 시험 볼 거야.”

그 말에 나와 테츠야가 서로를 바라보며 낭패감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이런 우릴 본 미유키가 킥킥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번처럼 열 문제를 낼 텐데, 테츠야 군은 이번엔 일곱 문제 이상 맞춰야 돼. 마츠다 군은... 다섯 문제로 봐줄게.”

“아니, 야. 미우라는 저번보다 두 개만 더 맞추면 되는데, 왜 난 네 개나 더 맞춰야 되냐? 이거 사람 차별하는 거야.”

“하나밖에 못 맞춘 자신에게 창피하지는 않은 거야?”

“주관식을 맞춘 내가 자랑스러워서 미치겠는데?”

“그러면 이번엔 다섯 개 이상 맞춰서 자존감을 더욱 높이도록 노력해보자.”

미유키는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둔 반으로 접힌 A4용지 두 장과 두꺼운 노트를 꺼내더니, 나와 테츠야의 앞에 놓아두었다.

“문제는 너희들 수준에 맞게 냈어. 제한시간은 40분이야. 엄청 많지? 그러니까 안 풀린다고 포기하지 말고, 공식을 이것저것 다 시도해봐.”

“지금 풀어?”

“아니. 멜론 다 먹고.”

헤실헤실 웃은 미유키가 자리에 앉았다.

포크로 멜론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더니 감탄을 하는 그녀.

날 쳐다보는 호의적인 눈빛이 예전보다 강한 것 같다.

* *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