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살을 주고 호감도를 취한다
* * *
사각.
빨간 색연필로 그려지는 엑스 표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나는, 마지막 문제가 틀린 걸 확인하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섯 문제에서 하나가 모자란 네 문제를 맞췄다.
절망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테츠야의 얼굴은 밝았다.
놈은 정확하게 일곱 문제를 맞혔던 것이다.
“테츠야 군, 잘했어.”
미유키의 칭찬에, 테츠야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움을 표시했다.
비교군이 하필 저 따위 머저리라니. 기분이 더럽다.
미유키가 왜 절반을 내 목표치로 잡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쉬움이 엄청나게 컸고, 승부욕이 마구 생겼다.
원탁에 머리를 박을 듯 앉아있던 나는,
“마츠다 군은... 솔직히 놀랐어. 많아봤자 두 문제만 맞힐 줄 알았는데, 네 문제나 풀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 풀이도 정확했고.”
이어지는 미유키의 극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입가를 가리고 웃은 미유키가 말을 이었다.
“진짜 열심히 공부한 게 보여. 기특하네? 마츠다 군.”
뭔가 어린아이에게 칭찬을 해주는 말투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최고로 좋았다.
이래서 사람은 공부든 뭐든 열심히 해야 해.
인정해주는 사람이 생기잖아?
“내가 뭐 하나에 꽂히면 열심히 하는 편이긴 하지.”
“그새를 못 참고 거들먹거리는 거야? 잘했다고는 해도 아직 한참 멀었어. 이건 기초 중에서도 기초니까.”
신랄하네.
그래도 테츠야와 비교하지 않은 게 어디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나는 다음에 벌어질 이벤트를 생각해보려다가,
우우웅!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화면을 쳐다보았다.
[시모야마 선배]
시모야마...? 이 새끼가 누구였더라?
기억을 되짚어보니 곧 생각이 났다.
시모야마 아키로.
내가 속해있는 슈프리 서클의 2학년 대가리였다.
예전의 나 같은 놈.
이 한 마디면 시모야마에 대한 설명은 끝이었다.
근데 이놈이 왜 내게 전화를 했을까?
“누구야?”
궁금해 하는 미유키에게 잠깐 기다려보라는 제스처를 취한 나는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아지트 알지?
환락가인 가부키초 구석에 있는, 슈프리 서클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 지하를 말함이었다.
“압니다.”
지금 바로 와라.
전화는 곧바로 끊겼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몇 대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좋은 기회라고 봐도 좋았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있을 대사건에 대한 예고편.
주말에 미유키도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다, 바로 가서 내가 주도하는 이벤트를 만들어야겠다.
솔직히 개쫄리긴 하는데,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정색한 내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 공부는 너희들끼리 하는 게 좋겠다.”
“응...? 왜?”
“일이 좀 생겨서. 하다가 마무리하고 알아서 가라. 문은 자동으로 잠기니까 걱정 말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심각한 일임을 직감한 미유키가 대답했다.
“아, 알았어... 끝나면 우리한테 바로 연락해.”
“오냐.”
**
슈프리 서클의 아지트는 요즘 대중매체에 나오는 조폭들의 아지트처럼 삐까번쩍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허름했고, 퀴퀴했다. 마치 올드한 범죄영화의 악당들이 쓰던 본거지처럼.
그 안으로 내려간 나는 예보니 아카데미의 1학년 양아치들이 차렷 자세로 늘어서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양쪽으로 열 명가량씩 나열해있는 그들.
그 중간에 있는 타카시와 눈인사를 한 나는, 눈치껏 가장 맨 끝에 서려고 했다.
하지만 중앙 소파에 앉아있던 시모야마가 나를 제지했다.
“켄! 넌 이리 와야지 이 새끼야. 1학년 캡틴이 왜 거기로 가고 있어?”
캡틴이라니. 말하는 게 참 애들 장난 같다.
그래도 오야붕이라고 하지 않은 걸로 위안을 삼자.
시모야마는 앞니 두 개가 금니인, 험악하게 생긴 말라깽이였다.
싸우다가 돌부리에 이빨을 찧었다는데... 뭔가 어울린다.
놈의 앞으로 간 나는 고개를 한 차례 까딱했다.
“안녕하세요.”
그 싸가지 없는 인사에 시모야마의 눈이 꿈틀했다.
잠깐 날 노려보는 그.
전화를 받을 땐 목소리 때문에 조금 무서웠는데, 실제로 보니까 너무 약해보여서 가소롭기만 하다.
시모야마와 계속 눈싸움을 하고 있자, 놈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입 냄새 한 번 지린다. 좀 꺼져...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시모야마가 입꼬리를 쫘악 올렸다.
그 왜 있잖은가. 사이코들이 정색하며 분위기를 잡다가 갑자기 방긋 웃는...
원래라면 소름이 돋아났을 텐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마츠다 켄으로 빙의하고 나니 깜냥도 마츠다 켄처럼 높아진 건가 싶다.
“새끼... 많이 컸네?”
“감사합니다.”
내 뒷목을 잡아채고 툭툭 두드린 시모야마가 말했다.
“됐고, 너 이나기 아카데미 알지?”
이나기 아카데미...
내가 다니는 예보니 아카데미에서 제법 먼 곳에 자리한 아카데미였다.
그곳의 양아치들이 슈프리 서클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지 아마?
“압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애들 데리고 가서, 거기 애들 몇 놈만 패고 와라. 제복은 꼭 입고 가고.”
아하, 시비를 걸어서 학교 간의 패싸움을 유도하는 거구나.
어쩔까?
아직 서클에 대한 의리가 있는 척 패싸움에 참가할까?
아니면 슬슬 발을 떼려는 모습을 보여줄까?
내 선택은 후자였다.
범죄자를 폭력으로 정의구현하는 게 아니고, 그저 학교 간의 시비로 인한 싸움이다.
한 번이라도 주먹을 내민 걸 들키면, 나에 대한 미유키의 호감도가 팍 내려갈 거다.
“이나기 쪽에서 뭔가 잘못했나요?”
“어엉? 뭐라고?”
잘못 들었다는 듯 귀에다가 손을 대는 시모야마.
나는 검지로 턱을 벅벅 긁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놈들을 건드리는 건 조금...”
짜악!
찰진 소리와 함께 홱 돌아가는 고개.
얼얼하다. 보기보단 힘이 제법이다.
한 군데 부어오를 때까지만 더 때려줄래?
다짜고짜 뺨을 맞은 나는 고개를 원위치 시키고 목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시모야마가 자신이 입은 예보니의 제복 와이셔츠 소매를 걷었다.
“이런 개새끼가 지금 누구 앞에서... 야, 우리가 언제 그쪽 사정 봐주면서 싸웠냐? 이 씨발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뻐억!
이번엔 주먹이구나. 아주 좋다.
나는 아까와 똑같이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이런 내 태도를 고깝게 생각한 시모야마는, 손을 뻗어 내 머리채를 콱 잡았다.
이후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겨대기 시작했다.
뻐억! 뻑!
맞을 때마다 코피가 터지고, 광대가 후끈거리고, 눈 밑과 턱이 얼얼해져온다.
그래도 마츠다 켄의 반골기질이 깨어나려는 것을 억누르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니 그나마 버틸만했다.
이놈의 체급이 조금만 더 컸다면 진짜 존나게 아팠겠지.
거의 열 대 가량 날 때린 시모야마는, 비명소리조차 내지르지 않는 나를 기가 찬 듯 바라보더니 주먹질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타카시를 향해 물었다.
“야, 이 새끼 뭐 잘못 먹었냐?”
“예...? 아, 아닙니다.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됐고, 이나기 건은 네가 책임지고 처리해. 알았어?”
“오쓰!”
일본 무도계에서나 사용하는 인사.
그것을 여기서, 실제로 들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렸다.
“푸핫!”
지금 막 생각난 건데, 타카시는 러브코미디에서 나오는... 리액션이 아주 찰진 감초 조연 같은 느낌이었다.
입을 틀어막고 큭큭거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안 그래도 얼어붙어있던 건물 지하가 더더욱 차가워졌다.
시모야마의 눈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것을 본 나는 이를 악물었다.
또 맞아주지 뭐. 대신 적당히만.
**
“이 병신새끼야... 넌 대체 뭔 생각이길래 그 상황에서 쪼개냐?”
날 부축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던 타카시의 타박.
입에서 계속 나오고 있는 핏물을 뱉어낸 내가 말했다.
“아니... 웃기잖아...”
“그러니까 뭐가?”
“오쓰...”
“이 새끼 진짜 뭐 이상한 거 처먹었나? 너 때문에 나도 쳐맞을 뻔했잖아. 내가 그러는 거 한두 번 봐?”
“자주 하진 않았지...”
“그렇긴 한데... 어휴... 씨발... 모르겠다. 돌아가면 그냥 푹 쉬어라. 꼴이 말이 아니야.”
그냥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의리는 있네.
칭찬해줄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타카시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꺼내는 날 본 타카시가 걱정스레 물었다.
“가다가 쓰러질 것 같은데... 집 안까지 부축해줘?”
“됐어... 그냥 가...”
“꼴에 자존심은... 나 진짜 가?”
“가... 고마웠다...”
“진짜로?”
“아이 씨... 가라고 이 새꺄...! 어억...!”
타카시의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했는데, 갈비뼈가 갑자기 아려와 상체를 수그렸다.
이런 나를 향해 낄낄거린 타카시가 말했다.
“병신... 간다. 이상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그래...”
힘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어찌저찌 옷을 벗은 나는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욕조에 차가운 물을 받았다.
이후 그 안에 들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얼음장 같은 물이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킨다.
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다. 예상보다 더 많이 얻어맞은 결과였다.
그냥 쪼개지 말고 참을 걸... 하필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가지고...
속으로 투덜거린 나는 한동안 냉탕에서 찜질을 했고, 대충 샤워를 마친 뒤 거실에 드러누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탁 다리가 접혀 구석에 세워져있다.
멜론을 놓았던 쟁반과 그릇 또한 잘 씻어져있고.
미유키와 테츠야가 치웠구나. 깔끔하기는.
휴대폰을 살펴보니 미유키의 메시지가 와있다.
[일은 아직 해결 안 됐어?]
수신 시간을 보니 아까 내가 쳐맞고 있을 때 보낸 메시지다.
나는 힘겹게 손을 놀려 답장을 보냈다.
[해결했어.]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렸다.
[표정이 별로 안 좋던데... 무슨 일이야? 통화 가능해?]
아아... 미유키. 설마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 거니?
글자에서 진심어린 걱정이 느껴진다. 고통이 멎는 것 같아.
내일 네 가녀린 손으로 반창고를 붙여줄 거지? 믿고 있을게.
[미안한데 나 지금 엄청 피곤하거든? 내일 말해줄게.]
[응. 알았어. 돌아가자마자 자.]
[지금 집이야. 설거지도 다 해놨더라. 고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 얼른 자구, 내일 봐.]
[그래.]
미유키와의 대화를 끝낸 나는 팔다리를 양옆으로 쫙 벌려 대자로 누웠다.
오늘 정말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
그럼에도 기분은 상쾌했다.
내일 미유키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처음엔 싸움질을 하고 온 줄 알고 날 나무라려나?
아니면 대체 무슨 일이냐고 호들갑을 떨려나?
모르겠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사정을 솔직하게 잘 설명할 경우 호감도는 올랐으면 올랐지, 내려가진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이제 생각은 그만하고 자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