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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4화 (14/313)

〈 14화 〉 짭짤한 상여금

* * *

크다고 할 수 없는 병원 입구에 들어선 미유키는, 간호사와 살가운 대화를 하며 접수증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까이 다가간 내게 건넸다.

“나머지는 마츠다 군이 써야 돼. 아니면 마츠다 군이 부를래? 내가 대신 쓸게.”

“됐어.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무슨...”

심드렁하게 접수증을 가져온 나는, 미유키가 작성한 보호자란을 보고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보호자 : 하나자와 미유키]

[연락처 : 080 – XXXX – XXXX]

이 ‘보호자’라는 단어가 마음에 쏙 든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쓴 미유키도 정말 좋고.

펜을 쥐고 정보를 기입해나가던 나는, 미유키가 접수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퉁명스레 말했다.

“뭘 보냐?”

“아니... 상상이상으로 악필이라서...”

“.... 뭐 서예학원이라도 다니면 고쳐지냐?”

“학원에 갈 거면 글씨교정학원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근데 글씨는 예쁘게 쓰려고 연습하면 많이 고쳐지니까... 필요 없다고 봐.”

“매사에 진지해가지고... 피곤해 죽겠네.”

“나 피곤한 성격 같아?”

“많이.”

시큰둥하게 대답한 나는 접수증을 다 작성하고 간호사에게 주었다.

내 얼굴에 난 상처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던 그녀는, 접수증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서 대기하고 계세요.”

“예.”

우린 구석자리에 나란히 앉아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마츠다 군, 아까 간호사 분이 마츠다 군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봤어?”

“봤어.”

“화나지 않아?”

“그다지?”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면 귀찮아지거든.”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유키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예전의 마츠다 군이었다면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면서 뭐라고 했을 텐데...”

“너 은근히 날 잘 안다? 혹시 예전부터 나한테 관심 있었냐?”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기겁을 하며 언성을 높이는 미유키.

덕분에 대기하던 환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내가 말했다.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목소리 낮춰라.”

“아...”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미유키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체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인상을 구기며 날 노려보았다.

“마츠다 군이 이상한 장난을 치니까 이렇게 됐잖아...!”

“네가 과민반응한 건 아니고? 책임회피하지 마라. 그리고 좀 상처받았어.”

“갑자기 무슨 상처를 받아...”

“관심이 없었으면 그냥 무시를 하지,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지 않았나?”

“무, 뭐래... 웃기지도 않은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지...”

정말 웃기지도 않은 소리라고 받아들였어? 아니잖아.

날 약간이나마 남자로 보기 시작했잖아.

아직은 내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겠지만.

“마츠다 켄 님, CT부터 찍고 들어가실게요.”

간호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유키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검사 끝나고 진료실 들어갈 때 불러줘.”

“알았어.”

**

늙수그레한 의사와의 면담 끝에, 나는 가벼운 뇌진탕과 타박상을 진단받았다.

뇌진탕은 충분한 휴식만 취하면 됐고, 타박상이야 뭐... 몸이 튼튼하니 금방 나을 것이었다.

아려오던 갈비뼈에 문제가 없는 것도 다행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대화가 잘 진행되고 있는데, 사건이 하나 터졌다.

“진통제 처방해줄 테니까, 두통 생기면 먹어라. 여자친구와는 동거하는 건가?”

의사가 미유키를 내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미유키가 아까 대기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뇨. 따로 살아요. 얘도 혼자 살구요.”

미유키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의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답에,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벙 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 내려다보고는 피식한 미유키는 의사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그럼 요 며칠간은 만나면 유심히 지켜보도록 하는 게 좋겠다. 픽픽 쓰러지려고 하거나 어지럼증을 호소하면 위험해지거든.”

“네, 선생님.”

“그리고 애송이 너는 싸움질은 그만하고 다니고.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 앞에서 허세라도 부리고 싶었느냐? 나보다 더 빨리 죽고 싶은 게야?”

오지랖 넓은 의사의 타박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예? 아, 허세 같은 게 아니라... 아니, 근데 선생님. 왜 쟤한테는 나긋나긋 말하고, 나한테는 협박조로 말하십니까?”

“한심해서 그렇지 이놈아.”

이번엔 배틀물, 스포츠물에서 주인공에게 몸을 함부로 쓴다며 타박하는 괴짜, 그리고 성격 더러운 의사 노인네인가?

그냥 개기지 말자.

“하... 알겠으니까 처방전이나 적어줘요.”

“싸가지 없는 놈... 며칠간은 관계도 피하고 푹 쉬어라. 가벼운 일상생활 정도는 해도 된다.”

툭 내뱉은 의사의 말에, 미유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가 성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의사에 대한 평가가 급격하게 뒤바뀐다.

알고 보니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는 호감형 단역이었구나.

심보 고약한 늙은이가 아니라, 자애로운 천사 중에서도 고위직이었어.

처방전을 받고 나온 우리는,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약국으로 가 진통제와 연고를 타고 나왔다.

슬슬 어둑해져가니 바람이 선선하다.

미유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홀가분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후 고개를 홱 돌리며 날 올려다보았다.

“마츠다 군,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한 거 알지?”

“뭔 소리래?”

“뇌진탕인 걸 몰랐으면, 마츠다 군은 신나게 놀러 다니다가 다른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나한테 감사해야지.”

“그래... 너 잘났다. 근데 뭐냐?”

“뭐가?”

“아까 앉아있을 땐 관심 있냐는 말에도 발광을 하더니, 왜 의사가...”

“의사 선생님.”

“.... 그래, 왜 의사 선생님이 오해를 한 건 그냥 넘어가는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진료 외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미유키의 성격상 날 내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면 바로 부정했겠지.

관심 있냐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의사에 오해도 스무스하게 넘겼다.

종합하자면 오늘의 소득은 상여금까지 포함된 알짜라고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지금이 장난을 칠 타이밍인가?

“그래...?”

말끝을 흐린 내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아쉬워서.”

“뭐가 아쉬운데...?”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앞으로 며칠간 관계를 갖지 말라고.”

“마, 마츠다 군!!”

아까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미유키.

제자리에 서서 낄낄거리는 날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내가 계속 반응해주니까 마츠다 군이 더 놀리는 것 같아.”

“맞아. 원래 당하는 사람 반응이 재밌으면 더 놀리고 싶은 법이지.”

그 말에 미유키가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동의할게. 나도 가끔 마츠다 군을 놀리고 싶을 때가 있거든.”

“나도 타격감이 좀 있긴 하지. 그래서 이렇게 쳐맞은 거고.”

부어오른 얼굴을 가리키며 자조적으로 말하자, 미유키가 헛웃음을 켰다.

“엄청 긍정적이네.”

“고맙다. 그래서, 내일 공부할 거야?”

“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미유키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며칠간 잘 지켜보라고 하셨으니까... 하는 게 좋겠지? 그래도 뇌를 쓰는 일이니까 일단 상태를 봐가면서 하자.”

“그래라.”

“이제 돌아가야겠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보니 꼬깃꼬깃한 지폐가 세 장 잡혔다.

삼천 엔. 지폐를 편 나는 그것을 미유키에게 내밀었다.

“택시타고 가.”

“무슨... 됐어. 바쁘지도 않으니까 버스타고 가면 돼.”

“그냥 받고 택시 타. 신세 지고는 못 살아.”

“괜찮다니까? 그리고 여기서 우리 집까지 택시타고 가면 천 엔도 안 나와. 비싸기도 하고...”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택시 탈 일이 생겼는데, 마침 너도 집으로 돌아간다네? 마음씨 착한 나는 널 태우기로 결정했어. 우리 집에 먼저 들렀다가, 기사한테 너희 집으로 가달라고 해. 돈은 내가 낼게. 왜? 나는 어차피 택시를 탈 예정이었으니까.”

즉석에서 만든 어설픈 시나리오에 황당해한 미유키가 입을 살짝 벌렸다.

히죽 웃은 내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자.”

“마, 마츠다 군...! 그렇게 빨리 걸으면 안 돼...!”

황급히 내 뒤를 따라오더니 한쪽 팔을 잡는 그녀.

몇 번을 생각해봐도 미유키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빨리 썸타고 싶어...

그러니까 빨리 다음 이벤트에 대한 계획을 짜자.

며칠 후긴 하지만, 계획구상을 위한 시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

삑­! 부우우웅­!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선풍기.

샤워를 끝낸 미유키는 선풍기 앞에 주저앉아 더위를 식혔다.

찬물로 샤워를 했음에도 덥다.

집에 에어컨이 있으면 좋겠는데, 없어서 너무 아쉽다.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던 미유키는, 문득 마츠다의 집에 가고 싶어졌다.

‘마츠다 군의 집은 시원한데...’

자신의 집이나 테츠야의 집과는 달리 에어컨도 있고, 전통가옥과 비슷한 구조라 통풍도 잘 된다.

다다미에 앉아 수박이나 멜론을 먹을 땐 피서가 따로 없었다.

내일은 더 덥다는데, 일찍 출발해서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한 미유키가 휴대폰을 꺼내 대화 어플을 켰다.

[마츠다 군, 택시 잘 탔어.]

도착하자마자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샤워가 끝난 지금까지 답장이 없는 마츠다.

몸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걱정이 든 미유키가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려고 할 때,

[오냐.]

마츠다의 답장이 왔다.

거만한 대답. 글자에서도 생색을 팍팍 내는 게 느껴진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미유키가 손가락을 놀렸다.

[혹시 내일 일찍 가도 돼?]

[몇 시.]

[한 여덟 시쯤? 엄청 더워지기 전에 빨리 도착하고 싶어.]

[그렇게 내가 보고 싶어? 그럼 일찍 와도 돼.]

승낙을 해도 꼭 요상한 사족을 붙여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미유키가 답장했다.

[승낙이라고 받아들여도 되지?]

[그러든가.]

[대답 좀 친절하게 해주면 안 될까?]

[내 말투가 원래 이런데 뭐 어떡해?]

[말투가 그런 거지 손은 아니잖아.]

[너는 여기서도 잔소리냐? 이러다 꿈에서도 나오겠네.]

그 메시지를 본 미유키가 혼자 킥킥거렸다.

자신이 훈계를 하면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마츠다.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럼 여덟 시까지 갈게?]

[그러든가.]

[마츠다 군.]

[제발 그만해. 귀에서 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잖아.]

마츠다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뭔가 재미있었다.

아까 마츠다가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타격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더 놀리고 싶고,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의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자.

계속하면 마츠다가 진심으로 짜증을 낼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그만할게. 푹 쉬고 내일 봐, 마츠다 군.]

[그러든가.]

저러니까 또 놀리고 싶다.

그러한 마음을 간신히 참아낸 미유키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내는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으로 마츠다와의 대화를 끝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테츠야에게 연락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연락하겠다고 말해놓고 오랜 시간동안 하지 않았는데... 너무 미안하다.

괜히 죄책감이 든 미유키는, 곧바로 테츠야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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