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첫 사진
* * *
다음 날 아침.
“아이 씨...”
발가락을 꼼지락대보니 엄지와 검지 사이가 따끔하다.
인상을 팍 구긴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마츠다 군, 뭐해?]
미유키의 메시지가 와있다.
자기가 먼저 뭐하냐고 물어온 건 처음인가?
게다를 오래 신어 상처가 나긴 했지만, 의미 있는 하루였고 이런 선톡까지 받았으니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하자.
눈을 벅벅 비빈 나는 손가락을 놀렸다.
[방금 일어났어.]
[지금 열한 신데? 어제 몇 시에 잤어?]
답장이 무척 빠르다.
내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도 되려나?
오늘 하루가 즐거워질 것 같은 기분이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잤는데 일어나보니까 지금이네. 뭐하냐 넌?]
[나 방금 테츠야 군이랑 미용실 다녀왔어.]
이런 씨발. 단둘이 미용실에 다녀왔다고?
하루가 즐겁긴 무슨. 암울하기만 하다.
[머리 잘랐냐?]
[나는 안 자르고, 테츠야 군만 잘랐어. 엄청 짧게.]
[그럼 드디어 그 더벅머리가 없어진 건가?]
[응. 엄청 시원해보여. 근데 난 예전의 테츠야 군 머리가 더 좋은 것 같아. 사진 보여줄까?]
[보내봐.]
얼마 지나지 않아 미유키가 보낸 사진이 도착했다.
두 사람이 딱 달라붙어선 V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
청순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유키의 머리에 테츠야의 거지같은 대가리가 닿은 건 참 좆같지만, 웃기는 점이 있었다.
테츠야의 헤어스타일이 나와 비슷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도 안 어울리네.’
사람의 두상마다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있는데, 테츠야는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나처럼 옆을 짧게 쳐냈다.
테츠야의 두상은 옆머리가 조금 높고, 곡선이 완만하다.
그로 인해 옆머리가 버섯처럼 살짝 올라온 상태였다.
혹시 어제 사건으로 나한테 질투 같은 걸 느낀 건가?
만약 그렇다면 테츠야는 똥볼을 찬 셈이다.
자신의 특징 중 하나를 직접 없애버렸으니까.
혼자서 미친놈마냥 낄낄거린 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별로다. 옆머리 누르고 앞머리 세우면 그나마 볼만하겠네. 미우라 집에 왁스 같은 거 있냐?]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없을 걸? 테츠야는 헤어스타일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서... 근데 그렇게 별로야? 난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았다면 너는 예전의 미우라 머리가 좋다고 하지 않았겠지.]
[일 리 있는 말이네. 그러면 다음 주에 공부할 때, 마츠다 군이 테츠야 군한테 왁스 바르는 방법 같은 것 좀 설명해줄래?]
내가 그럴 이유는 하등 없는데.
어쨌거나 어제 미유키가 보여주었던 반응으로 볼 때, 이젠 둘이서 식사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으리라 본다.
높은 확률로 승낙해줄 것 같은데, 한 번 도전해봄직하다.
[생각해보고. 너 근데 뭐하냐?]
[집에 있어.]
[약속 더 있어?]
[아니.]
[샤워는 했고?]
[그건 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무슨 상상을 하는 건데?]
이제는 반사적으로 내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슬프다. 사실 맞긴 하지만.
[했어 안 했어. 그것만 말해.]
[했어.]
[왜 벌써 하고 난리야?]
[나갔다 왔으니까?]
나는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왜 찌질하게 자꾸 간을 보게 되는 거지? 테츠야한테 옮았나?
이러지 말고 그냥 바로 물어봐야겠다.
[미우라랑 밥 먹었냐?]
[아니, 안 먹고 헤어졌어. 지금 집에서 먹으려구.]
[먹지 말고 나와. 나랑 같이 먹게.]
[지금?]
[어. 그 이상한 헌책방 근처 역에서 만나.]
[마츠다 군. 제멋대로 통보하듯 말하면 안 되지.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야?]
[밥 먹자. 나 배고프다.]
[정중하게 물어봐야지.]
[밥.]
[.... 알았어. 준비하고 나갈게.]
승낙의 메시지를 받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쫄아서 눈치만 보는 것보단, 역시 나답게 제의를 하는 게 맞았다.
요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
“마츠다 군!”
멀리서 밝게 손을 흔드는 미유키.
어슬렁어슬렁 미유키에게 다가간 나는, 그녀가 입은 긴 치마를 보고 질색을 했다.
“그 치마는 맨날 입고 다니네. 안 답답해?”
“응. 편하기만 한데?”
넌 나랑 사귀게 되면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랑 핫팬츠를 입힐 거다.
딱 달라붙는 티셔츠는 기본에, 안에 검은색 브라를 입히고 희미하게 비치게끔 해버린다.
그리고 테츠야가 섹시하게 변한 네 모습에 쩔쩔매는 반응을 구경하면서, 몰래 엉덩이를 만져야지.
그 다음엔 러브호텔에 들어가 테츠야의 반응을 조롱하면서 질펀하게 구르고.
“그거 집에 몇 벌이나 있냐?”
“다섯 벌.”
“많기도 하다... 빨리 가자. 배고파 뒤지... 아니, 죽겠다.”
“뭐 먹을 건데?”
“라멘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나도 라멘 좋아해. 근데 마츠다 군, 야채도 따로 시켜서 먹을 거지?”
“그건 기름진 음식에 대한 모독인데.”
미유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간장계란밥을 안 먹는 게 어디야... 네 딴엔 라멘도 건강식이겠지...”
포기하지 마라, 미유키.
내 건강을 위해 도시락을 싸줘.
우린 오래 만난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며 라멘 전문점으로 향했다.
식탁에 앉아 주문을 한 나는 미유키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빨대를 인중에 붙이고 입술을 앞으로 쭉 빼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생각이 많을 때 저런 행동을 하고는 했다.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모양.
말을 걸고 싶지만 그냥 놔두자.
그렇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미유키가 내 자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건드리자 고개를 들었다.
“왜.”
“마츠다 군, 어제 불꽃놀이 예뻤지?”
미유키의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어제 했던 질문을 다시 한다는 건... 불꽃놀이 때의 일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
내 의도대로 예쁘다는 말을 자신에게 했는지, 아니면 폭죽에게 했는지 헷갈려하고 있구나.
방금 했던 행동은 어제 일을 되새겨보는 것이었어.
어깨를 으쓱인 내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
“뭐가 제일 예뻤어? 보라색?”
보라색은 중간에... 즉, 내가 미유키에게서 시선을 뗄 시점에 노란색과 함께 터진 색깔이다.
그럼에도 보라색만 콕 집어 언급한다?
날 떠보고 있다는 얘기 밖에는 되지 않았다.
나는 네 여우같은 작전에 넘어가주지 않을 거야.
내 감정은 방학이 끝나고 나서 서클을 탈퇴한 직후에 확실히 할게.
15년간 함께 붙어 다니면서 생긴 사랑보단 멀지만 우정보다는 가까운 감정.
너희 둘의 마음에 생긴 그 견고한 탑을 무너뜨리기엔 아직 준비가 덜 됐거든.
대신 여름방학동안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너는 나한테 약간 아리송한데 은근히 달달한... 그런 감정만 느껴줘.
그나마 내가 도키아카에 떨어진 시점이 미유키와 테츠야의 사이가 더욱 좋아지기 전인 초반부라서 망정이었지,
시간이 조금 흐른 시점에 떨어졌다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치한 이벤트를 챙기지 못해 개고생을 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지친다.
“다 예쁘지 않았나?”
“응... 다 예쁘긴 했어.”
“그건 그렇고 너흰 나만 빼놓고 미용실을 가냐?”
“아, 그건 미안해. 부르려고 했는데... 테츠야 군이 가족들이랑 외식 있다고 해서...”
저게 정말일까?
아니면 테츠야가 의도적으로 날 피하려고 한 변명일까?
아마도 둘 다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미유키와 테츠야는 서로의 가족을 잘 알고, 같은 동네에 산다.
미유키가 테츠야의 가족들을 만나고 외식을 잘 다녀왔냐며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금방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테츠야가 아무리 멍청하다고는 해도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하긴 힘들겠지.
게다가 나는 테츠야에게 미용실에 같이 가자고 말했었다.
그랬음에도 굳이 오늘 미유키와 둘이서 갈 정도라면, 날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라고 봐도 좋았다.
테츠야가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걱정은 전혀 안 됐다.
왜인지는 도키아카의 엔딩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그땐 제대로 빡쳤었는데...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되니 지금은 그 상황이 빡치긴 커녕 고맙게 느껴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혹시 삐쳤어?”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내가 반문했다.
“내가 그럴 놈으로 보여?”
“응. 마츠다 군은 조금 어린 면이 있잖아.”
“철없다고 돌려 까는 것 같은데.”
“마츠다 군의 문제 중 하나는 매사에 부정적이라는 거야.”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으며 날 놀리기 시작하는 미유키.
불꽃놀이에 대한 주제가 유야무야 넘어가면서, 잠깐 묘했던 기류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
라멘을 맛있게 먹은 우린 지하철에서 헤어지지 않고, 미유키의 동네까지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쓸린 발이 따끔거리긴 하지만 미유키와의 시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우릴 만나기 전의 마츠다 군은 주말에 뭐했어?”
마츠다 켄은 주말에 가부키초에 있는 고급 소프랜드에 들른다.
단골이었고, 가기가 귀찮을 땐 출장 마사지인 데리헤루를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내가 언동이 가볍다고는 해도, 이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냥 적당히 둘러대자.
“애들이랑 술 마시고... 포켓볼 치고... 뭐 이런 거 했지. 옛날 일은 왜 캐묻고 난리야?”
“나랑 테츠야 군이랑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잖아. 그래서 궁금했어.”
네 말마따나 진짜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오긴 했지.
“창피한 시절이었으니까 자세히 알 거 없어.”
“그걸 자각한 것만으로도 철이 든 거라고 생각해.”
너 계속 이렇게 당근만 주면, 나 그냥 자만해버린다?
채찍도 좀 갈겨주고 그래라.
칭찬이 어색한 척 헛기침을 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오늘 날씨 괜찮지 않냐?”
“응. 바람도 선선해서 좋네. 하늘도 예쁘고.”
“같이 사진 하나 찍을래?”
“사진? 좋아.”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미유키가 크로스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가장자리에 달려있는 귀여운 캐릭터 키링이 흔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이니셜이나 캐리커쳐, 혹은 SD 그림이었으면 완벽했을 것 같은데.
주위를 두리번거린 미유키는 곧 경치가 잘 나올 것 같은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는 내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그런 미유키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란히 선 나는, 그녀가 카메라 어플을 켜자마자 표정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개구쟁이, 혹은 불량한 모습과는 다르게,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눈에 살짝 힘을 준 진중한 얼굴.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 미유키와 테츠야가 찍은 사진처럼 구도를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휴대폰 화면 속에서 미유키의 동공이 내 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지? 신선할 거다.
“더 붙을까? 옆얼굴이 잘리는데.”
태연스런 내 물음에, 딴생각을 하고 있던 미유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응? 아... 응... 조금만 더 붙어볼래?”
나는 미유키와 옆머리를 맞댈 정도로 가까이 붙었다.
이정도면 테츠야와 찍었던 구도랑 비슷한 것 같다.
미유키가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 찍은 사진을 테츠야와 찍은 사진과 비교해봤으면 좋겠다.
지척에 있으니 미유키가 쓰는 샴푸 냄새가 코에 강하게 들어온다.
나중에 샴푸는 물론 바디워시도 같이 공유해야지.
좋은 사진 포인트를 찾은 게 무색하게도, 화면엔 우리 얼굴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유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표정관리를 할 뿐이었다.
슬쩍 내 눈치를 본 미유키가 말했다.
“그럼... 찍는다?”
“쁠르 쯔그...”
웃음을 짓느라 제대로 말도 못하는 내가 웃겼는지, 미유키가 자그마한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내 인상이 점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화사한 표정을 만들더니 촬영 버튼에 손을 올렸다.
찰칵!
그렇게 라멘 전문점에서 생겨났던 그 묘한 기류가 다시 찾아오는 시점에, 우린 기념비적인 첫 셀카를 남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