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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8화 (18/313)

〈 18화 〉 영화관 이벤트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둘 다 수고했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 나는 테츠야를 흘끗 쳐다보았다.

쉬는 시간 내내 자신의 짧아진 머리에 대한 감상평을 듣고 싶어 했는데, 미유키에게 점수도 딸 겸 좋은 말을 해줘야겠다.

“그 답답한 머리가 없어지니까 괜찮네.”

그에 테츠야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짧게 자른 건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라서 아직 적응이 잘 안 돼.”

무식한 네게 특별히 팁 하나 준다.

해봐야 얼빵한 건 똑같겠지만...

“왁스로 옆머리 누르고 다녀라.”

“아, 그럴까? 제품 추천해줄만한 거 있어?”

“광택 없는 거, 지속력 강한 걸로 해.”

“한 번 해볼게.”

“오냐.”

“화장실 좀 써도 돼?”

넌 전철역 화장실에서 싸라.

“뭘 물어보고 난리야. 그냥 쓰면 되지.”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난 테츠야가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본 나는,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있는 미유키를 도와주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마츠다 군.”

“빨리 사라지라는 뜻에서 도와주는 거다.”

“아닌 거 다 알아. 근데 마츠다 군. 쉬는 시간에 왜 휴대폰만 빤히 봤어?”

“그러면 안 되냐?”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니까 궁금해서 그렇지.”

내 평소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네?

고마워.

“자동차 하나 사려고. 개학하면 타고 다니게.”

네 허벅지와 가슴을 만지며 등교하기 위해서 사는 거란다.

여행도 가야지. 테츠야는 쏙 빼놓고.

자신의 큼지막한 눈을 끔벅거린 미유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비싼 자동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산다고 말하니 약간 놀란 듯했다.

재력 또한 매력의 요소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재력만 내세우면, 미유키는 날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꼴불견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편이 좋다.

“아... 자동차...?”

“또 잔소리할 거냐? 아카데미에 자동차를 끌고 오지 말라는 교칙은 없잖아.”

“자,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어... 근데 마츠다 군, 면허는 있어?”

“있어. 장롱이지만.”

“언제 딴 건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시간 내서 땄어.”

“그렇구나...”

미유키의 가방에 책을 전부 집어놓은 나는 화장실을 쳐다보았다.

테츠야가 오랜 시간 나오지 않고 있다.

환기 안 시키면 뒤진다.

달력을 보니 8월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는 건, 이벤트를 하나 챙길 때가 됐다는 뜻이다.

이 이벤트를 시작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그건 미유키와의 데이트였다.

이틀 전 사진을 찍은 이후 미유키의 심경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어제 일요일에도 미유키가 사적인 메시지를 먼저 보냈고, 오랜 시간 즐겁게 대화를 나눴으니까... 부딪쳐보자.

“야, 하나자와.”

“응?”

“나한테 수업 가르쳐 주는 거, 질리지?”

“안 질리는데? 왜?”

“그냥 좀... 마음이 그러네.”

미유키의 입가가 쓰윽 올라갔다.

“요즘 마츠다 군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네? 난 정말 괜찮아. 마츠다 군이 열정적으로 따라와 줘서 가르치는 재미도 있어.”

“그러냐?”

“응.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 미안하면 내일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줄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맛이라도 있어?”

“아무거나 괜찮아.”

기품이 느껴지는 저 미소가 너무 매력적이다.

요조숙녀 같아. 빨리 갖고 싶어.

“그럼 내일 수업 끝나고 나랑 영화 한 편 보자. 헤어지면서 사줄게.”

“영화? 난 괜찮은데... 테츠야 군한테도 물어보...”

“뭐래... 둘이서 보러 가자고.”

“응...?”

당황해선 입을 살짝 벌리는 미유키.

멍하니 나만 주시하고 있는데, 상당히 놀랐나보다.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인 내가 말했다.

“너희 동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영화관 하나 있더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수업 끝나고 집에 들러서 쉬고 있어. 여덟 시면 괜찮지?”

“어...? 여덟 시...? 괜찮긴 한데...”

나는 미유키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향해 가방을 내밀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가방을 받아들고 등에 메는 그녀.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욕실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는다. 오늘 수업 고마웠고, 난 씻으러 갈 테니까 미우라 돌아오면 알아서들 가라.”

@@

“푸하...!”

베개에 얼굴을 한참 묻고 있던 미유키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뒤집었다.

평온한 물에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져 파동은 물론 파도까지 일으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마츠다 때문에 기분이 굉장히 묘하다.

‘영화 보러 가자구...? 내일...? 둘이서?’

이거 혹시 데이트 신청인가?

마츠다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를 곱씹어보았을 때, 딱히 데이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 ‘둘이서’라는 말은 왜 한 거지?

이런 제안은 처음 받아본데다, 마츠다가 거의 통보하듯 말했던 터라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화가 난다.

‘아니... 조금 부드럽게 물어보면 어디 덧나...?’

속으로 투덜거린 미유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 어플을 켠 그녀는, 마츠다에게 대화를 시도하려다가 멈칫했다.

뭐라고 보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놓고 아까 둘이서 보자고 한 의미가 뭐야? 라고 보내기엔 뭔가 부끄럽다.

그렇다고 말을 빙빙 돌리기엔 바보 같은 마츠다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고...

어찌해야할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결국 이도저도 못한 채 의미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덥당...]

휴대폰 대기시간 30초가 지났음에도, 메시지 란은 조용했다.

까매진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미유키가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려고 할 때,

띠링­!

마츠다가 답장을 보내왔다.

[난 춥다.]

짓궂다. 하지만 마츠다라는 사람에게 딱 어울린다.

간결한 메시지를 보고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미유키가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렸다.

[에어컨 틀고 자면 감기 걸릴지도 몰라.]

[두꺼운 이불 덮어서 괜찮아. 너 근데 뭐하냐?]

[그냥 집에 있어. 자동차는 골랐어?]

[계속 보고는 있는데 어떤 차를 사야할지 모르겠어. 내일 영화 보기 전에 잠깐 같이 골라보자.]

영화에 대한 주제가 나온 지금 한 번 물어볼까?

아니다. 마츠다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게 맞을 것 같다.

[알았어. 근데 무슨 영화 볼 거야?]

[재밌는 거.]

[아직 못 정했구나?]

[지금부터 정하면 되지. 좋아하는 장르 있냐?]

[나는 딱히 가리는 건 없어. 그러니까 마츠다 군한테 맡길게. 오늘 수업 복습은 했어?]

[나 잔다.]

대화를 피하는 걸 보니 복습은 안 했구나.

내일 깜짝 시험을 봐서 성적이 낮으면, 마츠다가 질색하는 점잖은 투로 훈계해야지.

[나랑 공부하기 전에 마츠다 군이 열심히 하겠다고 그랬잖아. 복습해.]

[오늘은 좀 봐줘라. 애가 왜 이렇게 잔인하냐?]

[다 마츠다 군을 위해서야.]

[머리 식히는 날도 있어야 맞지 않나?]

[주말에 다 식히지 않았어?]

[.... 나 진짜 복습해?]

하라고 하면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자신을 헷갈리게 한 죄로 하라고 하고 싶지만... 오늘은 봐주자.

[안 해도 돼. 내일 집중만 해.]

[너 자꾸 날 갖고 노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 놀이터로 나와. 한 판 붙자.]

[응. 난 언제든 준비돼있으니까 우리 동네로 오면 연락해.]

미유키는 한참동안 마츠다와 농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시콜콜한 대화도 마츠다와 나누다보면 재미가 있었다.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다. 아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와의 대화를 끝낸 미유키는 자그마한 별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렸을 때 테츠야와 함께 붙였던 것들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미유키는 순간, 테츠야도 마츠다처럼 브레이크가 없는 성격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일방통행 식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는 테츠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그럼 마츠다가 테츠야처럼 순진한 성격이었다면?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두 사람의 성격이 극과 극이라는 게 와 닿는다.

물과 기름 같은 사람들임에도 의외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다 마츠다가 진심으로 다가갔기 때문이겠지.

마츠다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바뀌고 있는 것처럼, 테츠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앙금을 하나하나씩 지워가면서, 앞으로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

좋은 미래를 그려보던 미유키는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 갤러리를 열어보았다.

가장 최근에 찍었던 마츠다와의 사진이 떡하니 있다.

사진을 터치해 확대한 그녀가 마츠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생겼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잘생겼다.

두툼한 입술의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올라가있는 마츠다.

인생사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의 얼굴에선 빛이 나고 있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면서, 왜 평소엔 인상을 쓰고 다니는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린 미유키는 사진을 옆으로 넘겼다.

그러자 테츠야와 미용실에서 찍은 사진이 나타났다.

마츠다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멋있다.

하지만 저번에 생각했던 대로, 예전의 헤어스타일이 더 나은 것 같았다.

갤러리를 휙휙 넘겨보니 동성 친구들과 찍은 몇몇 개를 제외하곤 죄다 테츠야와 같이 나온 사진밖에는 없었다.

이렇게나 많이 찍었구나.

다음번엔 마츠다와 함께, 세 사람이서 찍어보는 건 어떨까 싶다.

‘졸려...’

묵묵히 사진을 감상하던 미유키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선풍기 소리만이 맴도는 방 안.

그 소리를 자장가삼아, 미유키는 잠에 빠져들었다.

**

“미유키, 집에 가기 전에 오락실에서 게임할래?”

다음 날 오후, 수업이 끝난 테츠야가 미유키에게 저런 제의를 했다.

그에 시계를 본 미유키가 내 눈치를 흘끗 보더니 대답했다.

“그럼 한 시간 정도만... 놀다가 갈까?”

나와의 약속시간을 신경 쓰고 있구나.

두 사람의 상반된 모습을 보아하니 미유키가 나와 영화를 보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은 듯하다.

미유키와 테츠야는 비밀이 없는 사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여러 비밀이 생겨나고 있다.

가령 축제 때 내가 보여줬었던 행동...

예전이었다면 미유키는 테츠야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이게 무슨 뜻일까 물어보면서 같이 토론을 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나와의 영화 데이트를 숨겼다.

우리 관계가 일반적인 친구 사이가 아님을 미유키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연애경험이 전무한 터라 아직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개학을 하고 나면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

“그럼... 갈게, 마츠다 군.”

어색한 미유키의 작별인사.

그녀에게 씨익 웃어준 내가 말했다.

“그래, 가라. 미우라 너도 잘 가고.”

두 사람을 보낸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후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하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확인해본 나는 새어나오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미유키가 보내온 메시지 때문이었다.

[늦지 않게 갈게. 걱정하지 마.]

급하게 보냈구나. 이러지 않아도 난 널 믿는데...

우리 미유키는 마음씨도 참 고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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